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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8.24 18:21 수정 : 2018.08.25 18:56

은유
작가

‘너희들 나이도 어린데 대단하다 같은 말을 삼가 주세요.’ 얼마 전 청소년 대상 강의를 앞두고 몇 가지 당부가 적힌 메일이 왔다. 강사들에게 귀띔할 정도면 이런 일이 잦나 보다. 부끄럽지만 나도 전적이 있다.

한 강연에서 그간 청소년을 만나면서 편견이 깨졌노라 고백하다가 그 문제적 발언, ‘청소년들 정말 대단하다’고 했다는 걸 지적받고 알았다. 한 청소년이 말했다. “만약에 은유 작가님께 누가 ‘여자가 이런 글도 쓰고 대단하다’는 말을 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무안함에 ‘땀뻘뻘’ 상태가 된 나는 다른 섬세한 표현을 찾아보겠다며 사과했다. 며칠간 그 쓴소리가 웽웽거려 혼자 얼굴 붉어졌다. 맞는 말인데 ‘좀만 살살 말해주지’ 싶은 서운함이 들었지만, 청소년을 동료 시민으로 대하지 못하고 은근히 하대한 내 무지를 깨우쳐준 은덕을 입어 놓고 다정함까지 바라는 건 염치없다는 자각에 이르렀다.

나 기성세대인가. 자동으로 늘어나는 뱃살처럼 안정과 나태에서 오는 ‘정신의 군살’이 한번씩 만져질 때마다 당혹스럽다. 편견을 깬다면서 편견을 쌓아가고 있었음이 들통났다. 어른은 성숙, 아이는 미숙 같은 이분법의 잣대로 충고하거나 칭찬하는 권력을 스스로 부여하기도 한다. 이게 단지 나이 탓일까.

한 여자 선배는 동일범죄 동일처벌의 기치를 내건 젊은 여성들의 ‘혜화역 시위’를 두고 과격하다며 도리질 쳤다. 자기 같은 여자들도 아우르려면 개방적이고 온건하게 해야 한다는 거다. 순간 선배가 기성세대로 보였다. 그건 남자가 이해하는 만큼만 허락하는 ‘오빠 페미니즘’ 입장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절실함 없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일은 어떤 대단한 혁명세력에게도 어려운 미션이다.

유명한 시구대로 늙은 의사가 젊은이의 병을 모르듯이, 우리 세대만 해도 젊은 여성들의 ‘불법촬영’에 대한 공포와 분노를 체감하지 못할 테니까 노력은 우리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다. 일전에 혜화역 시위 참가자에게 들었다. 4시간 넘는 집회에서 1~2분도 안 되는 시간에 흘러나온 혐오성 구호만 자극적 이슈로 남았다며, 혐오 발언이 옳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말하려는가 들어달라고, “말투에 트집을 잡는 사람은 대화에 집중하지 않는 것”이라는 그의 일침을 선배에게도 전했다.

요즘은 여성주의 이슈가 복잡다단하다. 외국어 배우듯 줄임말과 신조어를 익혀가며 간신히 쟁점을 따라가지만 벅차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지난 토요일엔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주관하는 광화문 집회에 나갔다. “피해자다움 강요 말고 가해자나 처벌하라” 구호를 외치며 생생한 현장의 언어를 수혈받고 돌아와 기사를 검색하니 댓글은 딴 세상이다.

‘여성단체는 왜 장자연은 가만히 있고 김지은만 떠드느냐’는 댓글이 최다 추천에 올랐다. 이는 한국 사람이 굶어죽는데 왜 해외 난민을 돕느냐는 말처럼 익숙한 구도다. 이런 말 하는 사람치고 구체적 대상을 지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여성단체 호통칠 시간에 과거 뉴스를 조금만 찾아봐도 안다. 미투라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속에서 장자연 사건이 9년 만에 재수사에 착수했고 미투는 여성(단체)의 오랜 분투와 역사 속 김지은들의 목소리로 일궈낸 거센 물결임을. 김지은과 장자연은 대립항이 아니라 공의존 관계다.

기성의 관념에 갇히는 건 게으름 탓 같다. 특히 이분법은 사유의 적이다. 생각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누구나 기성세대가 된다. “선입관이 현실을 만나 깨지는 쾌감”(고레에다 히로카즈)은 세상에 자기를 개방할 때만 누리는 복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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