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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1.19 17:44 수정 : 2018.01.19 19:14

이명석
문화비평가

“여긴 남자 중학교 같지 않을 겁니다.” 강원도의 어느 학교에 갔더니 교장 선생님이 말했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방방곡곡 백 군데의 학교에 가보았다. 다르면 뭐가 다를까 싶었다. 그런데 달랐다. 교실 앞 화단은 파릇파릇 생기가 넘쳤다. 복도엔 미술 작품이 가득했는데 보통 솜씨들이 아니었다. 마주치는 아이들은 모두 반갑게 인사를 했다. “도서관이 어디예요?” 물었더니 이랬다.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강연을 마치고 호숫가를 걷자니 내가 남중생이었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나는 누나와 자취를 했다. 대학생인 누나가 부모 역할을 했으니 불만이 많았을 거다. 어느 날 고향에 가니 어머니가 나를 불러 앉혔다. “누나한테 밥을 얻어먹으려면 말이다. 항상 깨끗이 씻고, 네 물건은 네가 치우고, 가끔 애교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꼴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후회가 막심이다.

‘남자아이 키우기’는 인류의 오랜 숙제다. 모든 전통적인 동화, 놀이, 수련이 여기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그 전통은 점점 효력을 잃고 있다. 1950년대 미국에서는 영화 <이유 없는 반항> 식의 비행 청소년 문제가 심각해졌다. 폴 굿맨은 그들의 일상을 추적한 뒤 <바보 어른으로 성장하기>라는 저서로 당대의 교육 시스템에 반기를 들었다. 그런데 그는 소년만을 과제로 삼았다. 여자는 아이를 낳는 데서 자연스럽게 가치를 찾지만, 남자는 남자다움을 따로 찾아야 한다는 거다.

어쩐지 요즘 한국에 남자 선생님이 없어서 남학생들이 롤모델을 찾지 못한다는 주장과 닮았다. 그렇다면 요즘 미디어가 보여주는 남자, 그러니까 소년들이 열광하는 롤모델은 어떤 모습인가? 무례를 재미로 아는 중년 예능 엠시(MC), 약한 상대만 조롱하는 청년 래퍼, 범죄를 장난이라며 실시간 중계하는 유튜버들이다. 이들을 따라하는 아이들을 누군가 야단치면 부모는 말한다. “우리 아들 기죽이지 마라.” 짓궂고 더럽고 예의없게 자라더라도 공동체에서 능력을 발휘하면 제대로 큰 남자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만화 <은하철도 999>에서 메텔은 소년 철이를 데리고 우주를 여행한다. 하나의 목적은 성공했다. 소년은 남자다움을 배우고 용감하고 정의로운 존재가 된다. 그러나 결국 실패한 게 있다. 메텔은 모든 별의 숙소에 도착하면 철이에게 몸부터 씻으라고 한다. 철이는 죽으라고 뺀질댄다. 지구에서 안드로메다까지 250만 광년을 왕복하면서도 결국 청결은 못 배웠다. 철이 같은 은하의 영웅이면 용서받을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자. 우리 대부분의 삶은 은하철도의 차장에 훨씬 가깝다. 더럽고 불친절하면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

청결, 친절, 아름다운 환경에서 행복해지는 일은 누구나 배워야 할 가치다. 한국의 누나와 여동생은 대체로 이걸 잘 습득했다. 오빠와 남동생까지 돌봐주는 일도 많았다. 그 결과 지금도 티브이 광고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 집엔 애가 둘 있어요. 어머님이 낳은 아이, 내가 낳은 아이.” 그런데 아무도 다 큰 아이를 돌봐주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중년의 고독사를 걱정해야 한다.

스스로 밥하고 빨래하고 씻을 줄 모르면 병에 걸린다. 예의를 몰라 사회적 관계를 못 맺으면 정신이 피폐해진다. 정글이나 캠프장 같은 야생에서 생존하는 게 남자의 멋으로 보이나? 평범한 일상에서 깨끗하고 건강하고 친절하게 살아남는 게 더욱 훌륭한 일이다. 올해 정년을 맞는 호숫가 중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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