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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1.12 17:50 수정 : 2018.01.12 18:50

김종옥
작가·전국장애인부모연대 회원

친구야, 네가 장애를 가진 아이를 데리고 이 땅을 훌쩍 떠난 지 한참이다. 이제 그 녀석도 눈이 빛나는 청년이 되었겠구나. 안부를 전한다. 오늘 새해 인사 대신 지난겨울 우리 모임 신입회원으로 들어온 왕언니와 왕왕언니 얘기를 해줄게. 여태까지는 내가 우리 모임에서 큰언니 축에 꼈었지만 언니 대접이 뭐 그리 달가운 일이라고 챙기겠어, 나이 들어보니 알겠더만. 그러던 차에 확실한 왕언니들이 오신 거야.

지난달 장애인부모연대의 우리 지회 송년회에 그 두 분이 나란히 참석하셨어. 고운 털모자를 쓴 왕언니들이 젊은 회원들 틈에 앉아 있는 모습은 무척 이채로웠고, 그만큼 어색하기도 했지. 돌아가며 인사말을 하는데, 왕왕언니 차례가 되자, “이제서야 왔습니다. 늦게 나와 미안한 만큼 열심히 같이하겠습니다”라고 하시는 거야. 어른인 양하지 않을뿐더러, 투지 넘치는 이 짧은 인사말이 황송하기 짝이 없었지. 젊은 회원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눈치챈 왕언니가 이어서 말씀하셨어. “나는 56년생이고, 이짝 분은 39년생입니다. 우리 아이는 서른넷, 지적장애 1급이고, 이짝 분 따님은 63년생이지요.”

나는 그때 모두의 머릿속을 스치는 마른바람, 그 서걱거리는 표정들을 보았어. 한순간에 당장 지금 처한 현실이 미래의 자기 것인 양 겹쳐 보인 게지. 당황한 기색들이 역력했어.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지금 저 모습은 미래의 내 모습인 게야. 하지만, 그래, 설마 그렇겠니? 지레 가슴이 무너져 내릴 일이 아닐 테지만, 왕언니들의 신산했을 삶이 가늠조차 안 되어 먹먹했겠지.

왕왕언니의 딸은 쉰다섯이 되도록 교육은 거의 못 받았고 평생을 집에서 지냈대. 낮에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주간보호시설에 다니지만 집에서는 여전히 종이찢기놀이를 반복하며 지내는데, 형편 생각해서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 먹고 여의치 않으면 뒤로 미뤄두고 그럭저럭 살아가신다네. 환갑 지난 왕언니의 서른다섯 된 아들은 학교를 마치고 장애인 작업장에서 몇년 일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설움을 겪다가 그만두었대. 서른 즈음부터 낮시간 주간보호센터에 다니는데, 집에서는 주로 퍼즐맞추기를 하며 논다네. 버스 타고 가다가 승객과 기사가 내리라고 해서 내리고, 택시를 탔더니 택시 기사가 내리라고 해서 서러웠던 적이 많았대. 두 언니 다 장애인 수용시설 같은 데는 자녀를 보낼 생각이 없대. 가끔 뉴스에 나오는 그곳에 눕거나 앉아 있는 아이들 보면 다 내 자식이 그러고 앉아 있는 것 같아 차마 거기까진 못 보내겠대. ‘살아도 죽어도 자식 두고 눈 못 감기는 마찬가지라, 나라에 바라는 건 오직 나 죽은 다음 내 새끼 따뜻하게 살 곳이 있는 거’라고 하셨어.

처음에 우리는 환갑이 지난 왕언니는 그렇다 치고 거의 친정엄마와 갑장인 분은 어떻게 불러드려야 하나 잠깐 고민했었어. 우리들 나이대를 감안하면 대체로 어머님이라고 불러드리는 게 맞는 일이었지만 어쩐지 그렇게 하기 싫었어. 이분들은 우리의 동지요 투사로 나오신 것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우리는 단박에 왕언니와 왕왕언니로 모시기로 했어. 왕언니들의 시대에, 당신들이 바꿔나가기에 세상은 너무나 견고한 고집불통이었겠지. 왕언니들이 대접받고 사는 세상을 우리도 아직 못 만들었으니 아랫것으로서 죄송하기 짝이 없어.

새해가 되었고 우리는 모두 내 새끼들과 함께 아픈 나이를 먹었어. 왕왕언니는 여든이 되셨지. 그러니 이 나라는 정말 정말 잘해야 해. 여든이 된 언니가 운동권이 됐으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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