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난생처음 이디엠(EDM, Electronic Dance Music) 뮤직 페스티벌에 갔다. 아시아 최대 규모라는 ‘울트라 코리아 2017’이 열리는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근처에 이르러 친구와 수군거렸다. 우리가 옷을 너무 많이 입고 온 거 같지? 과감한 신체표현 의상에 타투는 기본, 코스튬은 선택, 국기를 든 외국인도 눈에 띄었다. 옷 한 벌로 한 계절 날 거 같은 중년의 덕후들도 오는 록 페스티벌과 이디엠 뮤직 페스티벌은 달랐다. 나이와 계급의 차이랄까. 관객이 젊고 부티 났다. 나중에 관계자에게 들어보니 이십대가 가장 많고 사오십대 예매율은 2%라고. 내 생에 그렇게 처음 2%가 되어보았다. 나 역시 록 페스티벌을 처음 간 건 이십대였다. 송도에서 열리는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에 남편이랑 두 돌 지난 아이와 동행했다. 중년 남성의 숙소 주인이 말했다. “아줌마도 이런 데를 다녀요?” 질문도 질타도 감탄도 혼잣말도 아닌 그것은 ‘아무말’. 아이와 다니면 존재가 납작해진다. 몰개성, 무취미, 무례함의 대명사 아줌마는 제3의 성으로서 청소년, 흑인, 여자처럼 장소에 제약이 따른다. 트집 잡는 이들을 무시로 대면해야 한다. 1999년에 겪은 일이다. 영화 <런던 프라이드>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두 남자가 얼굴을 맞대고 하는 말, ‘게이 처음 봐요.’ ‘나도 광부 처음 봐요.’ 유쾌하고 통쾌하게, 광부와 퀴어라는 이질적인 두 집단이 합심해 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영화는 다룬다. 게이 활동가가 단체 동료들에게 광산 노동자 파업에 연대할 것을 제안했을 때 우리가 광부랑 무슨 상관이냐는 반발의 목소리가 나온다. 활동가는 이렇게 답한다. “광부는 석탄을 캐고 그 석탄으로 전기가 만들어져야 우리가 클럽에서 새벽까지 놀 수 있으니까.” 도구적 접근이긴 하지만 세상에 나와 무관한 존재는 없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삶은 무수한 타인과 연결돼 있으나 도통 만나지 못한다. 단조로운 일상의 동선을 태엽 인형처럼 왕복하며 보는 사람만 보고 가는 데만 간다. 살면서 직접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책이나 티브이(TV)에서 접하는 게 전부다. 회사원은 사무실에, 주부는 집안에 머무는 일면적이고 기능적인 존재로 나온다. 그러니 실제 삶에서 ‘락페에 온 아줌마’처럼 지정 구역을 벗어난 사람을 ‘처음 보면’ 혼란을 느낀다. 그게 심하면 혐오가 될 테고. 나 역시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삶의 기술을 배우지 못했다. 인터뷰와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매번 낯선 존재와 마주하는데, 무지로 인한 긴장과 혼돈의 시간을 치르며 공부하는 중이다. 얼마 전엔 비혼모를 처음 봤다. 만남이 거듭되자 그녀는 “책 낸 사람 처음 봐요” 내게 말했고 “이렇게 글 잘 쓰는 비혼모 처음 봐요” 나도 고백하고 같이 깔깔댔다. 처음 보면 한 사람이 비혼모로 보이지만 자꾸 보면 비혼모는 결혼제도 외부에 위치한 상태의 설명일 뿐임이 드러나고 자기 한계와 고민을 안고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입체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처음 보고 계속 보는 게 관건이다. 영화처럼 서로 삶이 스밀 때까지. 이디엠 뮤직 페스티벌에 같이 간 친구는 일 중독자처럼 사무실에 갇혀 청춘을 보냈다. 공연장에서 미친 듯이 노는 젊은이들 ‘처음 본다’며 자기는 왜 저렇게 살지 못했는지 한탄했다. 나는 아들 또래를 보면서 군 복무 중인 아이가 떠올라 잠시 미안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다리 아프게 놀았다. 집 나간 자식 찾으러 오는 엄마가 아닌 사오십대 여자 관객을 뮤직 페스티벌에서 ‘처음 보는’ 나와 낯선 이웃을 위해.
칼럼 |
[삶의 창] 그런 사람 처음 봐요 / 은유 |
작가 난생처음 이디엠(EDM, Electronic Dance Music) 뮤직 페스티벌에 갔다. 아시아 최대 규모라는 ‘울트라 코리아 2017’이 열리는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 근처에 이르러 친구와 수군거렸다. 우리가 옷을 너무 많이 입고 온 거 같지? 과감한 신체표현 의상에 타투는 기본, 코스튬은 선택, 국기를 든 외국인도 눈에 띄었다. 옷 한 벌로 한 계절 날 거 같은 중년의 덕후들도 오는 록 페스티벌과 이디엠 뮤직 페스티벌은 달랐다. 나이와 계급의 차이랄까. 관객이 젊고 부티 났다. 나중에 관계자에게 들어보니 이십대가 가장 많고 사오십대 예매율은 2%라고. 내 생에 그렇게 처음 2%가 되어보았다. 나 역시 록 페스티벌을 처음 간 건 이십대였다. 송도에서 열리는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에 남편이랑 두 돌 지난 아이와 동행했다. 중년 남성의 숙소 주인이 말했다. “아줌마도 이런 데를 다녀요?” 질문도 질타도 감탄도 혼잣말도 아닌 그것은 ‘아무말’. 아이와 다니면 존재가 납작해진다. 몰개성, 무취미, 무례함의 대명사 아줌마는 제3의 성으로서 청소년, 흑인, 여자처럼 장소에 제약이 따른다. 트집 잡는 이들을 무시로 대면해야 한다. 1999년에 겪은 일이다. 영화 <런던 프라이드>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두 남자가 얼굴을 맞대고 하는 말, ‘게이 처음 봐요.’ ‘나도 광부 처음 봐요.’ 유쾌하고 통쾌하게, 광부와 퀴어라는 이질적인 두 집단이 합심해 권리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영화는 다룬다. 게이 활동가가 단체 동료들에게 광산 노동자 파업에 연대할 것을 제안했을 때 우리가 광부랑 무슨 상관이냐는 반발의 목소리가 나온다. 활동가는 이렇게 답한다. “광부는 석탄을 캐고 그 석탄으로 전기가 만들어져야 우리가 클럽에서 새벽까지 놀 수 있으니까.” 도구적 접근이긴 하지만 세상에 나와 무관한 존재는 없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삶은 무수한 타인과 연결돼 있으나 도통 만나지 못한다. 단조로운 일상의 동선을 태엽 인형처럼 왕복하며 보는 사람만 보고 가는 데만 간다. 살면서 직접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책이나 티브이(TV)에서 접하는 게 전부다. 회사원은 사무실에, 주부는 집안에 머무는 일면적이고 기능적인 존재로 나온다. 그러니 실제 삶에서 ‘락페에 온 아줌마’처럼 지정 구역을 벗어난 사람을 ‘처음 보면’ 혼란을 느낀다. 그게 심하면 혐오가 될 테고. 나 역시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삶의 기술을 배우지 못했다. 인터뷰와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매번 낯선 존재와 마주하는데, 무지로 인한 긴장과 혼돈의 시간을 치르며 공부하는 중이다. 얼마 전엔 비혼모를 처음 봤다. 만남이 거듭되자 그녀는 “책 낸 사람 처음 봐요” 내게 말했고 “이렇게 글 잘 쓰는 비혼모 처음 봐요” 나도 고백하고 같이 깔깔댔다. 처음 보면 한 사람이 비혼모로 보이지만 자꾸 보면 비혼모는 결혼제도 외부에 위치한 상태의 설명일 뿐임이 드러나고 자기 한계와 고민을 안고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입체적인 존재로 다가온다. 처음 보고 계속 보는 게 관건이다. 영화처럼 서로 삶이 스밀 때까지. 이디엠 뮤직 페스티벌에 같이 간 친구는 일 중독자처럼 사무실에 갇혀 청춘을 보냈다. 공연장에서 미친 듯이 노는 젊은이들 ‘처음 본다’며 자기는 왜 저렇게 살지 못했는지 한탄했다. 나는 아들 또래를 보면서 군 복무 중인 아이가 떠올라 잠시 미안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다리 아프게 놀았다. 집 나간 자식 찾으러 오는 엄마가 아닌 사오십대 여자 관객을 뮤직 페스티벌에서 ‘처음 보는’ 나와 낯선 이웃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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