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싱클레어> 편집장, 뮤지션 아이가 카시트에서 잠이 들면 나도 그냥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등받이를 조금 젖힌 후 한숨 눈을 붙인다. 토함산에서 내려오는 바람, 간간이 들리는 사람들 소리, 차 소리도 반갑다. 여기는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동. 오래전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포레스트 검프>. 본의 아니게 역사적 사건들에 자취를 남긴 포레스트 검프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랑하는 사람이 남긴 아이를 키운다. 밀밭을 걸어서 아이를 학교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그 자리에서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 밀밭과 하늘을 번갈아 보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을 하는 듯. 시간은 느리지만 지루하지 않게 흘러간다. 아이의 유치원 버스는 집 앞 보리밭에 선다. 그 덕에 이곳으로 오고 나서 생전 처음 보리가 자라는 것을 하루하루 관찰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소먹이로 키우는 보리라고. 집 앞 80평 정도의 삼각형 모양 땅은 주인장의 어떤 고집인지 모르겠으나 불국동의 빌라 건축 바람을 이기고 당당히 낮은 땅으로 남아 있다. 아침저녁으로 아이가 버스를 타고 내리는 자리여서 매일 그곳을 서성이며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밭을 바라본다. 보리밭은 내 방 창문에서도 보이는데 4층에서 내려다보는 보리밭은 또 다른 모양이다. 시간은 느리지만 지루하지 않게 흘러간다. 유치원 버스가 오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그 시간에 정확히 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10분 전부터 나가 있게 되는데 아침에는 아이와 집 앞 불국중학교의 담벼락을 따라 거닐고 보리밭으로 돌아온다. 오후에는 혼자 보리밭 옆을 서성이다 멀리 버스가 보이면 손을 흔들 준비를 한다. 사실 그게 내가 하는 일 중 가장 가치있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을 건너 <포레스트 검프>의 그 장면을 공감하게 되었나 보다. 여기 살다 보니 길을 기억하는 방법이 달라졌다. 아, 그 카페는 황룡사터 박물관 근처에 있지, 그 헌책방은 오릉에서 조금 올라가면 있었지 하면서. 사는 곳을 설명하는 방식도 다르다. 어디 살아요? 라는 질문에 ‘불국사 밑이요. 첨성대 근처요. 대릉원 뒤쪽이요. 천마총 옆이요. 김유신 장군 묘 건너편이요’라고 사람들은 대답한다. 유치원에서 날씨가 좋은 날에는 학교 앞 원성왕릉(괘릉)에 가서 뛰어놀고 불국사 앞마당으로 놀러 간다. 자주 부르는 이름들이 다들 오래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곳을 다르게 설명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집은 월성 핵발전소로 찾아오면 됩니다. 거기는 방폐장(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쪽으로 가면 됩니다. 이 아파트는 토함산 바로 앞자락에 위치한 (그래서 토함산의 빼어난 경관을 해치는) ○○위브입니다.’ 불국사 바로 앞, 경주에 올 때면 늘 탄성을 자아내게 했던 불국사로 올라가는 길, 토함산 앞에는 아파트 10개 동이 들어서고 있다. 거기에다 새로운, 하지만 위험한 이름들을 더 끌어들이려 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원자력해체센터’ ‘제2원자력연구소’도 이 동네 바닷가에 유치하고 싶어한다는데, 그들은 누굴까.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아이가 잠이 들면 나도 그냥 집 앞에 차를 세워 등받이를 조금 젖힌 후 한숨 눈을 붙인다. 토함산에서 내려오는 바람 소리, 간간이 들리는 사람들 소리, 차 소리도 반갑다. 여기는 집 앞 보리밭. 건너편 산 너머에는 핵발전소. 이번 투표가 끝나면 반가운 소식을 들을 수 있겠지.
칼럼 |
[삶의 창] 집 앞 보리밭 / 피터 김용진 |
월간 <싱클레어> 편집장, 뮤지션 아이가 카시트에서 잠이 들면 나도 그냥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등받이를 조금 젖힌 후 한숨 눈을 붙인다. 토함산에서 내려오는 바람, 간간이 들리는 사람들 소리, 차 소리도 반갑다. 여기는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동. 오래전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포레스트 검프>. 본의 아니게 역사적 사건들에 자취를 남긴 포레스트 검프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랑하는 사람이 남긴 아이를 키운다. 밀밭을 걸어서 아이를 학교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그 자리에서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 밀밭과 하늘을 번갈아 보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을 하는 듯. 시간은 느리지만 지루하지 않게 흘러간다. 아이의 유치원 버스는 집 앞 보리밭에 선다. 그 덕에 이곳으로 오고 나서 생전 처음 보리가 자라는 것을 하루하루 관찰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소먹이로 키우는 보리라고. 집 앞 80평 정도의 삼각형 모양 땅은 주인장의 어떤 고집인지 모르겠으나 불국동의 빌라 건축 바람을 이기고 당당히 낮은 땅으로 남아 있다. 아침저녁으로 아이가 버스를 타고 내리는 자리여서 매일 그곳을 서성이며 바람에 흔들리는 보리밭을 바라본다. 보리밭은 내 방 창문에서도 보이는데 4층에서 내려다보는 보리밭은 또 다른 모양이다. 시간은 느리지만 지루하지 않게 흘러간다. 유치원 버스가 오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그 시간에 정확히 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10분 전부터 나가 있게 되는데 아침에는 아이와 집 앞 불국중학교의 담벼락을 따라 거닐고 보리밭으로 돌아온다. 오후에는 혼자 보리밭 옆을 서성이다 멀리 버스가 보이면 손을 흔들 준비를 한다. 사실 그게 내가 하는 일 중 가장 가치있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오랜 시간을 건너 <포레스트 검프>의 그 장면을 공감하게 되었나 보다. 여기 살다 보니 길을 기억하는 방법이 달라졌다. 아, 그 카페는 황룡사터 박물관 근처에 있지, 그 헌책방은 오릉에서 조금 올라가면 있었지 하면서. 사는 곳을 설명하는 방식도 다르다. 어디 살아요? 라는 질문에 ‘불국사 밑이요. 첨성대 근처요. 대릉원 뒤쪽이요. 천마총 옆이요. 김유신 장군 묘 건너편이요’라고 사람들은 대답한다. 유치원에서 날씨가 좋은 날에는 학교 앞 원성왕릉(괘릉)에 가서 뛰어놀고 불국사 앞마당으로 놀러 간다. 자주 부르는 이름들이 다들 오래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곳을 다르게 설명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집은 월성 핵발전소로 찾아오면 됩니다. 거기는 방폐장(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쪽으로 가면 됩니다. 이 아파트는 토함산 바로 앞자락에 위치한 (그래서 토함산의 빼어난 경관을 해치는) ○○위브입니다.’ 불국사 바로 앞, 경주에 올 때면 늘 탄성을 자아내게 했던 불국사로 올라가는 길, 토함산 앞에는 아파트 10개 동이 들어서고 있다. 거기에다 새로운, 하지만 위험한 이름들을 더 끌어들이려 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원자력해체센터’ ‘제2원자력연구소’도 이 동네 바닷가에 유치하고 싶어한다는데, 그들은 누굴까.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에 아이가 잠이 들면 나도 그냥 집 앞에 차를 세워 등받이를 조금 젖힌 후 한숨 눈을 붙인다. 토함산에서 내려오는 바람 소리, 간간이 들리는 사람들 소리, 차 소리도 반갑다. 여기는 집 앞 보리밭. 건너편 산 너머에는 핵발전소. 이번 투표가 끝나면 반가운 소식을 들을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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