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4.29 19:28
수정 : 2016.04.29 21:20
강의가 뜻 같지 않다. 강단에 선 지 20여년, 순조롭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지만 이번은 유난하다. 전 같으면 즐거웠을 주제도 시들하고 책을 들춰도 이걸 가르쳐 어디에 쓰나 싶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말이 늘어난다. 웬일인가, 나이 탓인가 공부에 게을렀던 탓인가 생각하다가, 문득, 내가 어지간히 위축돼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공부의 전성 시대’에 대학을 다녔다. 졸업정원제로 대학생이 뻥튀기된 시절이었으니 질적 하락을 걱정한 사람은 많았겠다. 출석 한두 번으로 넘겨버린 수업이 부지기수니 공부 운운하기 민망하기도 하다. 크나큰 명분 앞에 잘못된 체제의 사소한 윤리야 가볍기 한이 없어 대리출석에 대리시험이 빈번했고, 그 크나큰 명분으로 짓눌리거나 비뚤어진 개성도 흔했다.
최인호 소설의 표현마따나 자기 정당성을 과신한 ‘무서운 복수(複數)’의 일원이었나 싶을 때도 있다. 제 머리로 제대로 공부하기 어려운 출발점이다. 다만 강의실 밖에서 분주하게 읽고 토론하긴 했다. ‘의식화’라는 말이 상징하듯 새로운 앎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굳건했나 보다. 드물게 학술행사가 열리면 강당 빼곡하게 청중이 들어찼다.
‘인문학의 위기’마저 옛 가락이 된 지금은 딴판이다. 당신이 하는 일은 값없다, 쓸모없다, 무의미하다. 이런 신호를 끊임없이 받다 보면 귀 얇은 영혼은 짜부라진다. 가진 것도 누리는 것도 많은데도 그렇다. 짜부라져 올려다보니 요즘 젊은이들이 대단해 보인다. 취직도 연애도 결혼도 힘들다는 협박 속에서도 푸른 잎새 다 지지 않고 청청하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니 작아져라, 작아져, 주문 속에서도 꿋꿋하다.
아이엠에프(IMF) 체제를 한국 사회의 전환기로 본다면 그것도 곧 20년째다. 각종 위기설도 구조조정도 몇 번이나 요란하게 지나갔다. 서류가 늘고 회의가 많아졌다. 개혁을 원조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한다며 수십억, 수백억 단위 세금이 뭉텅뭉텅 쓰였다. 마음을 1㎝, 제도를 1㎜ 옮겨놓기 위해 이렇게까지 돈을 많이 써야 하나. 겁내고 허둥지둥하고 실속 없이 바쁘게 하면 과연 개혁이 이루어지나.
집 앞 초등학교는 몇 년 전 수억 들여 인조잔디에 폴리우레탄 트랙을 깔더니 작년에는 유해물질이 검출된다며 원상복구하느라 법석이었다. 수십개 학교에서 그랬다고 한다. 좀 더 멀리, 차분하게 생각했으면 막을 수 있었을 낭비다. 왜 달라져야 하고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위협하는 대신 지혜를 모았다면 피할 수도 있었을 소모다.
산업과 경제 환경이 달라진 만큼 고용과 노동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이 사실을 무작정 부정할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근 20년간 돈 퍼붓고 으름장으로 일관한 효용은 딱 여기서 멈춘다. 그야말로 고비용 저효율 아닌가. 이 길 말고 다른 길은 없었을까. 굳이 짓밟고 자존을 망가뜨려야 변화를 도모할 수 있었을까.
그야, 차지한 건 내놓기 싫고 불리한 변화는 받아들이기 싫다. 사람은 잘 움직이지 않는다. 무너뜨리고 벌레로 만들어야 순종적으로 바뀐다. 그러나 그 부메랑 효과는 어떻게 감당하나. <변신>의 그레고리 잠자야 벌레인 채 살다 갔지만 생활 속 평범한 인간은 그럴 수 없다. 망가진 자존은 보상을 필요로 하고 구제를 갈망한다. 혐오에서 파시즘까지, 벌레의 회로야말로 위험하다. 공멸을 여는 회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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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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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처럼 꾹꾹 눌러, 벌레가 되지 말자고 다짐한다. 자존을 지키자고 새겨본다. 바뀌고 있으며, 바뀌어야 하겠지만, 겁먹은 벌레로 살지 않기를. 속은 겁먹은 벌레인 채 위세 떨진 더더구나 말기를.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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