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4.01 18:59
수정 : 2016.04.01 19:28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에서 잊히지 않는 사례가 있다. 알제리 초등학생 셋이서 프랑스인 급우를 살해했던 사건이다. ‘뒷산으로 유인, 칼로 살해했다’ 정도로 요약할 만한 개요였다. 정신과 의사였던 파농은 이 소년들에게 사건의 동기를 묻는다. “프랑스인들이 알제리인들을 죽였으니까요.” “하지만 그 아이는 친한 친구가 아니었니? 왜 그런 거니?” “우리를 믿고 따라올 프랑스인이 걔밖에 없었으니까요.”
그 아이들이 어찌됐을는지 모르겠다. 알제리가 독립할 때까지 무사히 살아남았을까. 어른이 된 후엔 어린 시절의 범죄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자식을 잃은 프랑스인 부모와 만난 적이 혹 있었을까. 살해당한 소년은 프랑스인 사이에서 따돌림이라도 당한 걸까. 착한 성품이었겠지. 그러니 다들 멀리하는 알제리 소년들과 어울렸을 테지. 남은 세월 그 부모를 가장 괴롭힌 건 무슨 생각이었을까.
친구가 된다는 건 그런 일이 아닐까. 능력을 나눠갖고 감정을 함께하지만, 문제 또한 공유케 되는 일. 무척이나 멋진 일이지만 크든 작든 부담도 감수하는 일. “저희 애는 문제없는데 친구를 잘못 만나 그래요.” 어릴 적부터 싫도록 들어온 이 말에도 일말의 진실은 있을 게다. 부담스러우면, 위험해 뵈면 가까이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위험이란 절반은 상상의 산물, 어디 뚜렷한 경계가 있던가. 주춤주춤 물러나다간 골방에 갇혀 살기 십상이다. 가끔은 날씨가 이토록 좋은데 말이다.
이슬람국가(IS) 소식이 들릴 때마다 아랍 지역의 역사를 떠올리려 노력한다. 한때 지중해 연안과 이베리아 반도까지 지배했던 오스만튀르크제국의 위력과, 그 통치하에서 상당한 자율권을 누렸던 북아프리카 지역의 내력과, 유럽이 강성해지면서 엉뚱한 경계로 나뉘어 식민지화됐다는 그 근대사를 기억해본다. 이스라엘 창설을 위해 살던 땅에서 쫓겨나야 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왜곡된 반세기 남짓의 굴곡을 상기해본다.
그러나 테러리즘이 마지막 선택이라니. 다시 1950~60년대의 알제리를, 영화 <알제리 전투>를 연상한다. 알제리 여인들이 나르던 폭발물, 그것이 산산조각낸 카페의 풍경을. 햇살 가득한 날씨, 나지막이 흥겨운 음악. 젊은 프랑스인 남녀는 가볍게 춤을 추고, 사람들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돌은 넘겼을까 어린아이가 눈을 둥글게 뜨고 아이스크림을 핥는다. 그러곤 폭발. 암전.
이 폭력의 역사 속에 얼마를 더 머물러 있을 텐가. 폭력의 뿌리가 한쪽에만 있을 리는 없다. 1차대전 당시, 일본의 가미카제보다 훨씬 먼저 영국 공군의 자살공격이 있었고, 아랍인들의 테러에 앞서 젊은 시온주의자들 사이에 테러리즘이 싹트기도 했다. 이 폭력의 연쇄 속에 태어난 대응 폭력은 더 필사적이고 종종 더 무자비하다. 갑남을녀는 물론 아이마저 가리지 않는다. 돌이켜보니 김선일씨의 참수가 충격을 안겨줬던 것도 벌써 10여년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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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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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에드워드 사이드를 기억한다. 팔레스타인인이면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존중 또한 주장했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두 민족 한 국가’로서 새로운 인류사적 모델을 구성할 것을 희망했던 그의 지치지 않는 꿈을.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을 향해야 한다던 그의 굳센 목소리를. 사이드가 살아 있었다면, 이슬람국가의 무시무시한 얼굴도 똑바로 봐내야 한다고 말해 줬을까. 두려움 때문에 적을 늘리는 대신 한 명 더 낯선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고 일러 줬을까. 어땠을까.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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