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12.04 19:03
수정 : 2015.12.04 19:03
대학 강의를 시작한 지 올해로 만 21년째다. 시간강사로 12년, 교수로 9년. 관동대학교 국어작문 강의를 맡은 걸 시작으로, 강릉과 원주, 인천, 부천, 그리고 서울 시내 어지간한 대학들까지, 강사 시절엔 참 여기저기 쏘다녔다. 궁색하고 불편하긴 했지만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처지가 아니라 절박하진 않았다. 고작해야 열두 시간 강의였고 좀 지나선 그나마 줄였다. 살림을 책임져야 하는 선배들은 근 30학점씩, 강원도와 충청도는 물론 더 멀리까지 강의를 ‘뛴다’는 소문이었다.
강의는 즐거웠다. 고약한 건 공강 시간이었다. 강사휴게실은 편치 못해서, 오랫동안 깨작거리며 밥을 먹거나 비디오방에서 영화 한 편을 해치우곤 했다. 학생들과 잘 어울렸지만 한 학기면 그뿐, 강사의 수명은 재천이라, 수업도 수입도 불안정했다. 처음 교수가 됐을 때는 그래서 놀라웠다. 하는 일은 별반 바뀌지 않았는데 방도 주고 월급도 주다니. 은행에서부터 대우도 단번 달라졌다.
전공별 차이가 있지만 대학에 들어와 박사학위를 받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10년을 훌쩍 넘는다. 여러 해 동안의 유학 생활을 버텨야 하는 경우도 많다. 교수라는 직업이 괜찮아 봬서 대학원에 진학했노라는 사람도 가끔 봤지만, 대부분은 앞뒤 재기 전 공부가 좋아져버린 이들이다. 힘들게 과정을 마치면 대략 30대 중반, 강의하고 논문 쓰며 몇 해 보내고 나면 어느덧 마흔이다. 이들 시간강사 수는 줄여잡아도 5만~6만명에 이른다.
한두 학기 강의 없이 지내본 적이 있다. 자의반 타의반이었는데 도서관 출입이며 소속 표시가 골칫거리였다. 강의가 끊기면 온라인에서 자료를 열람할 권리까지 닫힌다. 나랏돈으로 벌이는 인문학 지원사업에 응모하기도 힘들어진다. 요즘 뭐 하냐고 물어올 때 대답이 궁해지고 내가 필요한 존재이긴 한 건지 불안해진다. 비트겐슈타인은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막대한 유산을 물리쳤다는데. <논리철학논고>를 쓴 뒤 한동안 학계를 떠나 시골 초등학교 교사며 수도원 정원사로 살았다던데.
그러나 저마다 비트겐슈타인이 될 수 있다면 무슨 문제랴. 비트겐슈타인을 낳기 위해서라도 사회적 안전망은 필요하다. 벌써 3년이나 유예된 강사법이 입법됐던 데는 그런 문제의식이 작용했을 게다. 9학점 이상에 1년 이상 계약, 채용 및 해고 과정의 공식화. 그러나 3년 동안 되풀이 성토됐듯, 현재대로의 강사법은 시간강사를 그나마 대학에서 쫓아내고 저임금 노동착취를 늘리는 결과를 낳을 게 분명하다.
지난 10여년 새 대학에는 초빙교수 같은 비정년 교원이 대폭 늘어났다. 그중엔 연봉이 2천만원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적잖다. 이들은 교수보다 더 많이 강의하고, 더 격무에 시달리고,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해고 위협에 쫓긴다. 한국 비정규직의 현주소 그대로다. 강의전담교수 회의실에서 복사기와 정수기마저 치워버렸다는 학교가 있고, 산학협력교수에게 경영 손해분을 전가시켜 수천만원씩을 요구했다는 학교도 있다. 강사법은 기껏 이런 존재를 늘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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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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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내 또 한번 유예가 결정되거나 대체 법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2016년 1월1일부터 강사법이 발효되리라 한다. 대학은 온통 난리다. 시간강사 숫자를 유지하면서 지위를 개선한다는 미담은 어디서도 듣지 못했다. 재정도 미래도 불안정한 한국 대학이 그럴 리 없다. 대신 강의 숫자를 줄이고 전임교원에게 초과 강의를 요구하느라 전국이 시끄럽다. 악머구리 끓듯 끓는다. 이 시절에 철밥통 교수인 걸 고마워해야 할지, 부끄러워해야 할지.
권보드래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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