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인이 되거나 사탄이 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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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결혼을 앞둔 여친이 기독교를 강요하는데 어찌해야 되나요?
Q 1년 된 여친과 결혼을 생각중인 30대 초반입니다. 견해 차이, 성격 차이가 존재하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다 여겼는데 얼마 전 결혼 이야기 나오면서부터 벽에 부닥쳤습니다. 모태신앙인 여친은 부모님이 제가 교인인 줄 알고 있으니 결혼하면 강남에 있는 부모님 교회를 굳이 같이 가야 한다는 겁니다. 애초 제가 교인이라고 해서 교제를 허락하셨다고 하네요. 저는 불자 집안이지만 사랑을 위해서라면 주말 교회 한 번 나가는 정도는 할 수 있다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장손이니 넌 대신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하자 펄쩍 뜁니다. 절대 안 된다고. 거기서 그치지 않더군요. 결혼식은 당연히 부모님 교회에서 해야 하고 십일조도 반드시 해야 물질적 축복을 주신다느니 하며 여러모로 저를 몰아붙이네요. 이런 게 문제가 될 거라곤 상상을 못 했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종교 때문에 헤어진다는 게 말이 될까요.
A 어릴 적 쭉 신자였다 대가리 여물 즈음 사탄의 유혹에 빠져 독실한 집안 유일의 무신론자가 된 탕자로서, 이 주제에 대해선 직접 부대낀 경험 적지 않다. 하여 언제나 까다로운 종교문제다만 개인사 셈 치고 함 나대 보자.
1. 묻는 건 두 가지. 그녀 태도가 이해 가지 않는다, 과연 결혼해도 좋은가. 보자. 먼저 불가해한 그녀 태도부터. 왜 차례는 안 되는가. 왜 교회예식 고집하나. 왜 물질축복 언급하나.
먼저 제사. 한국 개신교는 제사를 선대에 감사하는 풍습의 일환이 아니라 죽은 귀신과 소통을 시도하는 하나의 제의로 본다. 그러니까 지방 쓰고 향 피우고 절하는 행위 일체를 찬송하고 율동하고 기도하는 예배와 동격의 종교행위로 간주한다고. 한마디로 귀신 예배란 소리다. 그런 제례를 통해 마땅히 하나님에게만 배타적으로 귀속되어야 할 감사와 영광이 구천을 배회하는 혼령 따위에게 배달되는 걸 용납할 수 없다는 거다. 그런 논리.
그럼 교회예식 고집은. 물론 성당과 사찰서도 예식 한다. 허나 한국 개신교의 경우는 신앙 차원으로만 접근해선 온전한 이해가 불가하다. 한국 교회는 ‘마실’을 대체했다. 급격한 도시화로 지역공동체가 해체되는 과정서 발생한 커뮤니티 공백을, 도심의 교회가 심방, 경조사 예배, 집단 부조 등을 통해 메웠다. 이제 교회는 종교판 향약, 두레에다 부조금 계모임 역할까지 한다. 하여 예배당은, 안면 체면 연줄 인맥 따위의 한국적 관계지향의 일상정치가 고스란히 작동하는 공간이다. 이명박의 소망교회나 교포들의 현지 교회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이를 방증한다. 교회예식은 그 맥락에서 커뮤니티 내에서 면 세우기, 부조금 회수하기, 충성심 입증하기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거다. 그녀는 그런 습속과 그에 익숙한 부모에게 복종하고 있는 중인 게고.
물질적 부와 축복은 또 무슨 상관이냐. 초간단 버전은 이렇다. 기독교 교리와 물질적 부는 애초 긴장관계에 있었다. 부자 천국행은 낙타 바늘귀 패스보다 난이도 높다 한 게 성경이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출현으로 시대는 세속적 욕망의 종교적 승인을 요구한다. 이걸 해결한 게 칼뱅. 그가 발명한 노동윤리는 영리활동을 소명으로, 취득한 부는 신의 응답으로 갈음할 길을 열었다. 자본주의와 기독교의 합방은 그리 가능해졌다. 한국 개신교는 여기 기복신앙을 더한다. 그리하여 부는 곧 하나님의 은사가 된다. 그녀가 당당히 신앙과 부를 연결하는 건 그래서다.
2. 이제 결혼 이야기. 사실 관혼상제에 대한 견해차나 물질에 대한 입장차 따위는 결정적 문제가 아니다. 결혼한다는 건 아니 삶의 파트너가 된다는 건, 상대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주는 게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어 주는 거다. 하는 게 아니라 되는 거라고. 이때 누군가의 그 존재 양식을 결정하는 건 결국 세계관이다. 우주의 작동과 그 인과를 해석하고 그에 대응하는 총체적 삶의 태도, 세계관. 음, 뭔가 심오해, 씨바. 하여튼.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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