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9.09.30 21:26 수정 : 2009.10.01 09:06

무식하거나 미쳤거나/ 일러스트레이션 양시호

[매거진 esc]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국정원이 박원순 변호사 고소했잖아요. 국가가 국민 상대 명예훼손 소송 가능한가요?

Q 국정원이 정치사찰을 주장하는 박원순 변호사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서 소송의 원고를 대한민국으로 했잖아요. 그런데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하는 거, 이게 과연 가능한 건가요?

A 1. 그려 재미는 좀 없겠다만 그럼에도 이 사건은 꼭 다뤄두는 게 좋겠어. 왜냐. 이 사건, 현 정권의 대뇌를 사뿐하게 정밀 엠아르아이(MRI)하고 있거든. 자, 보자고.

우선 법으로 치고 나왔으니 법 이야기부터. 왜 법 이야기를 알아둬야 하느냐. 분명 열은 훅, 받아. 근데 그게 왜 열 받아 마땅한 사안인지 간지 나게 설명을 못해. 그럼 모냥 빠지잖니. 하지만 동시에 우린 또 각자 공사다망한 인간들이니까 너무 깊이 알 필요는 없어요. 해당 직군 종사자들 따로 있는데 뭐. 그러니 어디 가서 기죽지 않고 회심의 승부구 요긴하게 날릴 수 있을 만큼, 딱 그만큼만 알자고. 어차피 이 사안의 법리적 판단은 나 같은 야매도 한 줄이면 충분하단 거 알 만큼 간단하거든. 다음 문장 하나면 족해.

‘국가나 국가기관은 기본권의 수범자이지 주체가 될 수 없다.’

이거 십 년도 전에 대한민국 헌법재판소가 벌-써 읊어 둔 문구라고. 뭔 소리냐.
국가나 국가기관은 자신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법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는 말이라고. 오히려 그런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거지. 명예에 관한 기본 권리도 마찬가지지. 국가나 국가기관은 국민의 명예를 법적으로 보호할 책임과 의무를 진 존재지, 자기 자신을 위해 그 법을 행사할 수는 없다는 소리가 되는 거지. 어때. 졸라 심플하지.

2. 그런데도 국정원, 더 정확하게는 이명박 정권은 이걸 해 버렸네. 어머, 대체 왜. 여기서 우린 세 가지 가설을 생각해볼 수가 있겠어요.

첫째, 금붕어아이큐설. 현 정권의 지적 능력이 잉어목 잉어과의 민물어류, 금붕어의 그것에 필적한다는 거지. 에이 설마 대통령까지 되신 분과 그 수하들이 그 정도이랴 싶은 이들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 어마어마한 돈을 강바닥 긁는 데 올인하는 걸 보면 이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나 싶어. 이 경우라면 현 정권은 무시무시하게 무식하다, 할 수 있겠지.

둘째, 합죽이작전설. 정권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 하면 이리 된단 본때를 보여주는 거. 그러니 닥치고 합죽이 되란 거. 최근 유사 사례가 하도 많아 금방 감이 올 게야. 그렇지만 이번 소송에서 실제 이길 수는 없는 거 아니냐.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이야. 중요한 건 박원순에게 승소가 아니라 나머지 국민들에게 협박인데. 그리고 실제 그 협박이 먹히고 있는데.

‘chilling effect’라는 표현이 있어요. 이미 50년대 미국 법정에서 등장한 용어인데, 뉘앙스가 이런 거야. 옷에 찼던 땀이 식어 피부에 닿으면 으슬으슬하잖아, 딱 그런 느낌처럼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기도 전에 괜히 서늘해지는 거지. 그렇게 쫄아서 혹시 내 발언이 어떤 불이익으로 되돌아오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자기검열하게 되고 결국 웬만하면 그냥 닥치게 되는 효과지. 뭐 어깨 위에 걸치고 다니는 게 머리가 맞기만 하다면 누구나 유추할 수 있는 설이라 봐야지. 그런 의도라면, 현 정권은 야비하다고 할 수 있을 게야.

자, 그럼 나머지 하나는 뭐냐. 요게 참 재밌어. 보자고. 국정원이 제소했는데 원고가 국정원이나 국정원장이 아니라 대한민국이야. 일개 국가기관 따위가 스스로를 대한민국으로 참칭했다고. 그럴 순 없는 거라고 다른 국가기관들이, 예를 들어 법무부나 검찰이, 우르르 나서서 말렸느냐. 아니란 말이지. 그러니까 지금 국민으로부터 국가기관의 운영을 5년간 한정 위임받은 이명박 정권은, 자신들을 무려 대한민국과 동일시하고 있는 집단이란 뜻이 된단 말이지. 겨우 선출직 공무원 몇 명과 그들이 선임한 임명직 관료 몇 명이 모여서 말이야. 대체 이 황당한 건방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김어준
게다가 이들은 정권을 국가와 동일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국가에 자신들 마음대로 인격까지 부여해 명예훼손을 운운하고 있다고. 이렇게 권력자 혹은 권력집단과 국가의 일체화 그리고 그들에 의한 국가의 인격화를 특징으로 하는 정치체제가 역사 속에 존재하긴 했지. 짐이 곧 국가니라 했던 절대왕정이 그랬고, 모든 권력이 제사장의 인격 안에 결합되어 있는 신정일치의 체제가 또한 그러했으며, 스스로를 아리안의 국가 그 자체와 동일시했던 나치 히틀러가 그러했지.

하지만 인류는 이미 진즉에 인민 주권의 국민국가를 근대에 발명해 두었단 말이지. 더구나 이제는 여러 한계 있는 국민국가의 기획을 넘어 유럽연합(EU)처럼 정치·경제적 복합국가체를 구성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이런 시대에, 국민들에게 그 권한을 잠시 위임받은 공무원들 따위가, 자신들을 국가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거, 이건 뭐 그냥 미쳤다고 말하는 것 이외엔 달리 표현 방도가 없는 정신상태지. 하여 셋째 가설은 정권광인설, 되겠어.

3. 자, 일단 주요 가설은 이렇게 셋. 그 외 연구해볼 만한 신종 가설, 절찬 접수중. 졸라.

김어준 딴지 종신총수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esc :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