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나요? / 일러스트레이션 양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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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Q 4개월째 연애중인 20대 중반입니다. 4살 연상으로 다정다감 잘 해주고 다 좋은데, 이 남자가 술만 먹었다 하면 첫사랑 이야기를 합니다. 때론 한숨 쉬며 허공을 한참 응시하기도 하고 어떨 때 보면 눈물까지 글썽이는 것도 같은데, 처음에는 그냥 많이 사랑했나 보다 했는데 지금은 짜증도 나고 한편으로는 기가 죽기도 합니다. 20대 초반 5년간 서로 깊이 사랑했지만 가정 형편과 집안 반대로 헤어졌다는데, 5년이란 세월도 그렇고 저완 결혼한다 해도 집안에서 반대할 조건도 아니거든요. 정말 미인이었다고 하던데 그 여자가 저보다 여러모로 훨씬 나았나 싶어서 의기소침해집니다. 남자들은 첫사랑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하던데, 그가 첫사랑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요. 연민전술과 허풍본능의 결합일 뿐, 반응하면 할수록 상태는 악화될 게야 A 0. 파하하. 허공을 한참 응시했다고라. 잘못 자서 모가지가 삐었나보지. 아님 만성 경추디스크든가. 이 웃음은 당신 스토리 들으며 몰래 남세스러워하고 있을, 상당수 세상 남정네들을 대신해 웃어주는, ‘대표 계면쩍어’ 웃음 되시겠다. 자, 오늘은 이걸 파 보자. 1. 남자들은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가. 그런 소리들 한다. 남자 가슴엔 방이 여러 개라느니. 웃기고들 있다. 간혹 첫사랑이 질곡이 되어 그 시절 무한 반추하는 남자, 있긴 하다. 그러나 그런 여자들도 있는 거다. 그건 남녀차가 아니라 개인차라고. 그런데 왜 남자들은 첫사랑을 못 잊는다는 흰소리가 무림 정설로 파급되어 이렇게 강호의 도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냐. 그건 남자의 첫사랑이 유난히 더 애틋하거나 애절해서가 아니라 - 그럴 리 있나. 그들을 첫사랑으로 상대한 여자들은 그럼 모조리 각별히 아둔하고 냉정해서 첫사랑 운운 안 한다는 건가. 말이 안 되지 - 남자들은 자신의 첫사랑을 연애술법의 일환으로 끊임없이 재소환하기 때문이다. 뭔 소리냐.2. 남자들 첫사랑 타령의 첫째 이유는, 첫사랑 그 자체를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그만한 여자에게 그만한 사랑을 받았던 남자라는 서사를 통해 상대를 압박하기 위해서다. 여자들은 제 첫사랑 이야기가 연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나 않을까 저어할 때, 남자들은 그걸 상대에 대한 협박카드로 활용한다고. 나는, 날 그 정도로 사랑해준 여자가 있었던 남자라는 거지. 그러니 긴장하란 거지. 그 첫사랑이 하나같이 연예인 뺨치는 미인이거나, 뭔가 있는 집안 처자로 둔갑하는 건 그래서다. 기 좀 죽으란 거니까. 그게 사실이냐. 당근 아니지. 거기서 8할은 접어야지. 그게 다 사실이려면 지가 재벌 방계쯤 되게. 그럼 왜 그러는 거냐. 관계의 상대 우위에 서기 위해. 관계는 언제나 권력의 문제니까. 본능적으로 권력에 민감한 남자들, 그렇게 상대 제압해 관계주도권 행사하려는 기제가, 첫 순간부터 작동하는 게다. 그러니까 그 여자를 잊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 정도 미녀가 그 정도로 자신을 원했었다는 스토리가, 필요했을 뿐인 게다. 첫사랑을 못 잊는 게 아니라, 첫사랑을 팔아먹는 거라고. 아류 변종으로, 첫사랑과 닮았단 멘트가 있다. 두 번째. 무용담이다. 남자들에게 과거의 연인이란, 남성성의 훈장과도 같은 거다. 트로피를 진열하는 왕년의 운동선수처럼, 군대 이야기 그치지 않는 예비역처럼, 그 전과를 과시하는 게다. 스스로 흐뭇해하며. 일종의 유세지. 이때 드라마틱한 장치로 비극의 가족사 제조공법이나 허공 응시술, 눈물 압착술 등등이 동원되기도 한다. 그럼 극적 효과가 배가될 뿐 아니라 상대의 모성 본능도 자극하고 심지어 낭만성까지 획득할 수 있거든. 연민전술과 허풍본능의 결합인데. 남자들이란, 여자들에게 통하기만 한다면, 화강암도 뻥튀기할 종자거든. 남자의 구라는 여자의 화장인 게지. 학계에서 머지않아 남자의 과장 유전자를 발견할 날이 오고 만다는 데, 오백 원 건다. 또다른 흔한 이유론 무방비 상태가 되어 몰입했던 어릴 적 첫사랑의 아련함, 그 자궁 속 아기와 같았던 안락함을 갈구하는 거다. 어른이 될수록 그게 잘 안되거든. 물론 그 과정에서 기억은 끊임없이 윤색되기 마련이고. 첫사랑 타령의 대부분은, 그렇게 알고 보면 참 시시하고 가련하며 때로 퇴행적이기까지 한, 수컷의 연애 수작일 뿐이다. 3. 당신 케이스라고 다를 거 없다. 20대 초반 첫사랑 언급하며 안구로 허공을 지르고, 가정 형편과 집안 반대 들이대며 눈물 비쳤다고. 아주, 전형이네. 요즘 20대 초에 누가 결혼 말하나. 혹여 했다고 누가 흔쾌히 승낙하나. 그리고 5년이면 집안 반대고 나발이고 충분히 길다. 그냥 헤어질 세월이라고. 게다가 그렇게나 못 잊는데 당신은 왜 만나고 앉았나. 또 목 꺾어 허공 보면, 이렇게 응하시라. 왜, 경추 3번이 아려?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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