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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25 21:02 수정 : 2009.03.29 14:13

연애, 디지털이 아니다. 일러스트레이션/ 양시호

[매거진 esc]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Q. 친구도, 동료도, 연인도 아닌 정의불가 이성관계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친한 남자 동기가 있습니다. 전 오래된 남친이 있고, 그 동기에게 소개팅을 시켜준 것도 접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여직원과 대화하면 기분이 나쁘고, 소개팅 잘될까 봐 노심초사합니다. 그도 연애 따로 하면서 제가 남친과 다투면 자기 일처럼 화내며 제 남친을 욕합니다. 남자 동기가 딱히 남자로 보이는 것도 아닌데 제 모습이 이해가 되질 않고, 그렇다고 동기로서 우정은 잃고 싶지 않고. 대체 이 묘한 기류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우린 한 모임에서 만나 같은 직종이라 금방 친해졌고 작업실에서 늦게까지 토론도 하곤 하다 결국 관계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각자 애인이 없지만 그렇다고 서로를 애인으로 삼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서로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주말에만 만나 열띤 직업적 토론을 벌이다 또 관계를 갖습니다. 이런 동료적 관계에 나름 만족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선 과연 이런 만남이 괜찮은 건지, 불안합니다. 이렇게 계속 만나도 되는 걸까요?

A 0. 이런 관계, 의외로, 적지 않다. 그로 인해 당혹해하는 인간들, 부지기수고. 그리고 그런 관계에 대한 시중의 일반 상담, 대략 유사한 결론 낸다. 확실히 하거나, 끝을 내라고. 결국 시간낭비에 감정 낭비라고. 그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늘은, 그 이야기다.


1. 본인, 그런 거, 제목 없는 관계라 부른다. 왜? 제목이 정말, 없으니까. 연인이냐 하면 끄덕이지 못하겠고 친구일 뿐이냐 하면 갸우뚱하는데다 그저 동료냐 하면 그마저 아닌 거라. 자신의 기존 인간관계 디비(DB)에서 해당 카테고리, 도통 찾지를 못하는 거지. 당황할밖에. 그러니 기존 필드에 임의 입력하거나 아예 값을 버리고 마는 게라. 그럼 그거 적절한 대응이냐. 글쎄, 적어도 난, 아니라 본다. 들판의 꽃이, 이름을 모른다고, 꽃이 아니더냐.

2. 컴퓨터의 세계는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이진수 0과 1 사이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디지털이 아니다. 자연의 인간은 그렇게 단속적일 수가 없다. 인간 자체가 유전적 연속성의 산물이다. 0과 1 사이에도, 무수한 관계, 촘촘히 실재한다. 그저 그 사이 존재하는 관계들에 각각의 제목이, 따로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왜? 무서우니까. 내 연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 남다른 관심 주는 자와의 관계, 불확실하다. 그러니 두렵다. 그러다 상처 받으면 어쩌고 나만 손해 보면 어떡해. 그렇게 보호본능에 본전의식으로, 인간들, 0과 1에만 제목 달아뒀다. 제목 달지 않음으로써 그러한 위협 자체를 부정하고, 넉넉한 안전거리를 확보해두자 했다. 그렇게 탄생한 배타적 단어, 연인, 실제 사고 자체를 그리 속박하는 힘, 분명 있다. 모든 애정 관계는 모름지기 연인이거나 연인이 아니거나, 그 확고한 이분의 범주 내에 있는 게 마땅하다 믿게 하는 힘, 그렇게 제목의 유무로부터 시작된다.

문제는 제목을 달지 않았다 해서, 그렇게 외면해버린다 해서, 그런 속성의 관계까지 자동 소멸해버리는 건 아니라는 데서 비롯된다. 따로 정해진 항목이 없어 대략 0.64짜리 연인이라 해야 할 관계, 세상에 실재한단 말이지. 서로 아끼고 때론 섹스 하지만 1짜리 연인은 딱히 아닌 관계, 혹은 섹스는 없되 연인 이상 소통 연대하는, 결코 0이 아닌 관계, 존재한단 말이지. 실재하는데, 이거 대체 어쩔 거냐고.

3. 기실 이거, 단순한 연애의 문제, 아니다. 삶의 불확실성 앞에 나를 얼마나 열어둘 것인가, 그 위험 앞에서 나를 얼마나 잠글 것인가. 그렇게 삶의 공포와 대면하는 근본적인 삶의 태도 문제인 게다. 그리고 그 태도에는, 옳고 그름 따윈 없는 거다. 0과 1로만 한정해도, 틀렸다 말할 권리, 누구에게도 없다. 그 리스크를 누가 대신 감당해 줄 건가. 그리고 바로 같은 이유로 해서 0.64도, 스스로 그 비용을 감당해 가는 한, 그저 제목 없단 이유만으로, 틀렸다 말할 권리, 누구에게도 없는 거다. 그 관계로 향유할 수 있었던 환희와 탄식, 기쁨과 절망, 그 삶의 풍성함은 누가 보상해줄 건가.

하여, 두 사례에 대한 내 생각은 그렇다. 그 관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관계가 제 나름의 생명력으로 자라가는 데까지, 한번 따라가 보라고. 제목이 없단 건, 사람들에게 그 관계를 설명할 방도, 찾기 어렵단 소리다. 있는 제목에 욱여넣으란 사회 압력도 작용한다. 쉽지 않단 말이다. 허나 익숙하지 않을 뿐, 0.64도 그 나름의 엄연한 관계규범 가진, 1짜리만큼이나 온전한, 하나의 관계다. 애초부터 출발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1짜리로 시작해 결혼으로 끝맺는 게 유일하게 유의미한, 관계의 방정식 아니라고. 누구 맘대로 그걸 정하나.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그러니 그 불안, 누구에게도 떠넘기지 않고 스스로 감당할 요량이라면, 가 보는 거다. 그렇게 가다 보면, 어느 순간 0과 1 사이 어딘가에서, 듣도 보도 못한 관계의 궤도를, 둘이서만 돌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 그 관계는 나름의 내적 완성 이룬 거다. 그리고 그로 인한 즐거움은, 1짜리에, 뒤지지 않는다. 당연하다. 이름을 모른다고, 꽃이 절로 못생겨지더냐.

PS - 관계의 끝, 결혼 아니다. 모든 관계는 제 나름의 생명이 있을 뿐. 그러니 정작 문제는 시작이 아니라 끝이다. 그리고 끝의 원칙은 하나다. 더 이상 행복하지 않거든, 거기가 어디든, 끝이다. 1이든 0.64든,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김어준 딴지 종신총수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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