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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7.30 22:08 수정 : 2008.08.01 16:36

일러스트레이션 양시호

[매거진 esc]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Q 질식사 직전에 비명을 지르는 당신의 인격… 꼭 남편과 함께 전문가 상담 받으시라

결혼 13년차 40대 초반의 전업주붑니다. 평생 부모님 거역해본 적 없는 순종적인 장녀이자 공부 잘한 모범생으로 결혼도 부모님이 맺어준 지방 유지의 장남이랑 해 아이 셋을 두고 있습니다. 겉으론 문제없습니다. 하지만 제겐 비밀이 있습니다. 결혼과 함께 회사 그만두고 평생 내조만 하라는 시어머님 명령과 곧 이은 임신, 종가집의 엄격함, 끝없는 집안행사에 난생 처음 격한 반발심과 심각한 우울증으로 앓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부모님 한 번 거역해본 적 없는 남편의 간곡한 설득으로 결국 마음 다잡고 지금껏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완벽한 맏며느리, 아내, 엄마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10년 전 시작한 음악동호회에선 전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미혼의 활달한 30대 초반 독신주의자 커리어우먼으로 성격은 물론 표정, 어투, 패션도 달라지고 걸음걸이, 목소리, 입맛까지 변합니다. 심지어는 기억력도 달라지는지 각종 전문지식을 줄줄 읊습니다. 인간관계도 철저하게 둘로 나뉘어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그러다 며칠 전 갑자기 부들부들 떨며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전 어릴 때부터 거짓말 한 번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거짓말 한단 의식조차 없이, 아무 갈등도 없이, 10년째 제 주위 모두를 완벽하게 속이는 이중생활을 해왔다는 걸 깨달았던 겁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소름이 끼칩니다. 어쩌면 좋나요...

A 0. 아, 진짜로, 마음 아프다. 당신은 대체 어쩌다 그 지경에 이르렀나. 거기서부터 시작하자.

1. 사람의 인격이란 게 대단히 방어적이다. 한 번 인격이 형성되면 잘 바뀌지가 않는데 그도 그럴 것이 외부로부터 충격이 가해지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인격의 동일성 보호를 위한 심리적 방어체계가 작동한다. 예를 들어 어떤 상황에서 거짓말을 했다면, 거짓말은 나쁘다고 하는 도덕률과의 충돌을 피하고 자신이 거짓말쟁이란 사실과 직면하지 않기 위해, 그 거짓은 모두를 위한 거였다고 합리화를 하거나 혹은 거짓말 잘하는 부모의 탓이라고 투사를 하는 따위의 방식으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대다수가 그렇게 방어기제에 의지해 자신 인격의 동일성을 유지한다. 이것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날 것의 자신과 항상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데 그런 통상적인 심리적 방벽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정도의 억압이나 충격과 마주해, 단일인격만으론 도저히 그 스트레스를 온전히 프로세스 할 수 없게 되면, 어느 순간 차라리 별도의 인격이 각성하여 현실을 대신하게 된다.


당신 경우 부모에겐 착한 딸, 시댁엔 종가집 맏며느리, 남편에겐 좋은 아내, 자식에겐 헌신적 엄마로, 평생을 그렇게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삶을 살다 그 의무와 율법과 규범의 하중이 임계점에 이르자 당신 인격의 셀프디펜스시스템이 비상작동을 하게 된 게다. 질식사 직전의 당신 인격이 비명을 지르며 탈출구를 찾아 변장을 한 거라고. 통상 그 지경에 이르기 전에 삶에서의 자기 지분을 요구하며 투쟁하게 마련이건만 당신은 그러지를 못했다. 당신은 남의 행복을 위해 당신 인생 전체를 쓰다 결국 당신 자신이 아프게 된 거란 말이다.

2. 내 보기에 당신이 겪은 건 그렇게 일종의 해리현상이다. 이 말은 나 같은 돌팔이 모든문제연구소장이 아니라 진짜 전문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당신 혼자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은 더더욱 아니다. 구조요청이 필요하다. 남편과 함께 가시라. 사실 일이 그 지경이 된 데는 남편 책임도 막중하다. 당신이 분노와 우울로 브레이크다운 됐을 때, 그렇게 아내가 절박한 코너에 몰렸을 때, 그는 전적으로 당신 편이 되었어야 했다. 당신을 달랬던 간곡한 태도로 오히려 자신의 부모를 설득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부모와 맞서는 대신 아내를 주저 앉혔다. 착한 아들 역을 한 치도 포기하지 못했던 게다. 그는, 유죄다. 그러니 남편과 함께 가시라. 그렇게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착한 딸, 맏며느리, 현모양처의 일부를 털어내고 당신만의 공간을 마련해 스스로의 욕망을 살피는 데 삶을 할애해야 한다. 그렇게 실제 타고난 본연의 당신에게 귀를 기울어야 한다. 지금처럼 살다간 큰 일 난다.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3. 사람들이 결혼생활에서 겪는 문제의 대부분은 가족이 예의를 지키지 않아 발생한다. 존재에 대한 예의란 게 친절하고 상냥하다고 지켜지는 게 아니다. 아무리 무뚝뚝하고 불친절해도 각자에겐 고유한 삶에 대한 배타적 권리가 있으며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그 경로를 최종 선택하는 것이란 걸 온전히 존중하는 것, 그게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다. 가족의 간섭과 제재는, 아니 사실은 애정까지도, 그 선을 넘어선 안 되는 법이다. 그 어떤 자격도 그 선을 넘을 권리는 없다. 가족 사이엔 아예 선이 없단 착각은 그래서 그 자체로 폭력이다. 당신 문제의 본질 역시 마찬가지다. 당신 가족은 당신에게, 무례했다. 당신은 역할만을 요구받았다. 당신은 존재이지 역할이 아닌 데 말이다.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존재를 질식케 하는 그 어떤 윤리도 비윤리적이다.

PS - 진심으로 당신의 회복을 기원한다.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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