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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1.31 14:56 수정 : 2008.02.09 14:37

징징대지 말고 여행을 다녀봐봐봐

[매거진 Esc]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Q 열등감 때문에 여친에게 쏟아낸 거짓말을 더는 숨길 수 없어요

올해 23살 대학 2학년생입니다. 삼수했고 좋은 대학 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창피하게 생각하는 형은 지방 전문대 나와 아르바이트하고 있고, 아버지는 15년 넘게 구두닦이, 어머니는 식당 찬모 하고 계십니다.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200일 사귄 여친이 있습니다. 그녀의 이전 남친들이 의대생, 명문대 수석합격생, 부잣집 자식들이라-여친도 꽤 잘 삽니다-저는 열등감에 삼수했단 사실부터 많은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무역회사에 다니고 어머니는 집안일, 쪽팔린 형은 있지도 않은 것처럼 꾸몄습니다. 전 온갖 욕을 다 먹어도 싼 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자친구랑 관계가 깊어져 더는 숨길 수가 없다는 겁니다. 모든 걸 털어놓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우리 관계에도 진전이 있을 것 같고요. 여친은 저희 집에 오고 싶어합니다. 그냥 집에는 안 데려 오고 계속 만날까요? 아니면 모든 사실을 털어 놓아야 할까요. 사랑하는 여친이 저한테 환멸을 느껴 떠날까봐 겁이 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A 0. 연인에게 한 거짓말, 어쩌면 좋아요. 하, 이거 참 재밌는 주제다. 수컷들, 연인 앞에서 크고 작은 유세와 허풍, 많이들 떤다. 특히 구애과정서 펼쳐대는 구라의 대향연, 유니버설하다. 왜들 그러냐. 오늘은 이 이야기 좀 해보자.

1-1. 구애과정서 수컷들이 쳐대는 온갖 수위의 구라는 윤리적 관점이 아니라 유전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판독이 가능하다. 이건 단순히 개인품성 문제가 아니라, 장구한 디엔에이(DNA) 히스토리를 지닌 수컷들의 집단습성이라고. 이 습성, 종을 초월한다. 수컷 공작은 암컷들에게 자신이 더 우수한 유전자 캐리어라는 걸 과시하고자 포식자에게 발각될 위험까지 감수해가며, 꼬랑지 치장에 엄청난 에너지를 할당했다. 하지만 실제 먹고사는 데는 하등 도움 안 된다는 점에서 이 꼬리, 본질적으로 구라요, 사기술책이다.

1-2. 수컷의 서바이벌 로직이 원래 그리 생겨 먹었다. 통하기만 한다면 그래서 내 유전자를 존속시킬 가능성이 높아지기만 한다면, 어떤 진화적 수작도 마다지 않는다. 인간, 다를 거 없다. 당장의 입증책임 없는, 초반 구애과정에서의 경쟁력 카무플라주, 일명 캄푸라치는 수위 차이만 있을 뿐 너나없이 구사할 만큼, 수컷에겐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이다. 당신도 그랬던 게다. 스펙에서 밀리는 거, 일단 구라로 저지한 거지. 공작은 꼬리에 달렸던 게 당신에겐 혀에 달렸을 뿐이었던 거라. 다만 당신은 공작이 아니라서 이제 그 입증책임에 직면한 거고.


2-1.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왜 애초부터 솔직하지 못했냐고 흔히 탓한다. 마치 그게 결심만 하면 되는 일 인 양. 큰 착각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무방비로 노출한다는 건 결심의 문제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다. 누구나 결심만 하면 박지성 되나. 액면가의 자신과 마주하고 그 모습을 고스란히 노출하는 데엔 대단한 분량의 성찰과 용기가 필요하다. 기회를 박탈당하고 도태될지도 모를 리스크를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거고 그 결과를 억울함이나 한탄 없이 고스란히 수용하겠다는 거다. 본능과 습성에 반하는 거라고. 그럴 수 있다는 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능력이다. 해서 당신 탓할 생각은 없다. 당신은 그저 딱 수컷 평균만큼만 보잘 것 없었을 뿐이니까.

2-2. 그러니 어쩌란 말이냐. 당신 구라는 유효기간이 없다. 가족과 절연치 않는 한 무마가 안 된다고. 그러니 고백해야지. 불쌍한 척 하든 말든 그 드라마야 당신이 직접 고안하고. 그럼 여친, 떠나지 않는단 보장 있나. 그런 거 없다. 있길 바라면, 그때부터 진짜 도둑놈이지. 하지만 당신이 정말 걱정해야 할 건 그게 아니다. 스물셋이면 아직 만나야 할 연인, 한 타스다. 진정 걱정해야 할 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그 수준으로다가, 보잘 것 없을 것인가 하는 거다. 너무, 초라, 하잖냐. 씨바.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3. 세상엔 두 종류의 자신감이 있다. 내가 쟤보다 키 커서, 돈 많아서, 잘 생겨서, 그런 비교우위 통해 획득하는 자신감. 이건 나보나 키 크거나, 돈 많거나 잘 생긴 상대 앞에서 바로 죽는다. 상대적 자신감. 반면, 상대가 돈 많거나 잘 생긴 게 내가 보유한 자신감의 총량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유형이 있다. 왕자병과 차이는 상대가 키 크고 돈 많고 잘생겼단 자체는 인정한다는 거. 하지만 그게 그래서 난 못났다, 로 연결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부족분을 스스로 농담거리로 만든다는 거.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산을 만족스럽게 긍정한다는 거지. 이거, 절대적 자신감. 그렇게 스스로의 취약점과 하자에 개의치 않는 건, 결국, 섹시하기까지 하다. 다 섹시하자고, 이 지랄들인데 말이다.

덧붙임 - 그 자양분은 지성이다. 지성의 출발점은 자기객관화고. 자기객관화에 도달하는 아주 유용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밖에서 보기’. 그리하여 이 질문에 대한 최종 답변은 뜬금없게도, 그만 징징거리고, 여행, 가능한 한, 많이 하란 거. 이상.

김어준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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