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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2.12 18:47 수정 : 2007.12.15 11:19

제발 육영수 여사는 잊어버려라

[매거진 Esc] 너 어제 그거 봤어?

후보 부인들의 유세장 연출한 아침 티브이
개성 없는 현모양처들의 쇼가 지루했다오

대통령 선거가 일주일도 안 남았다.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들이 대선 후보들의 분주한 발걸음을 따라가는 동안 아침 프로그램들은 영부인 후보들이 주인공인 또 하나의 유세장을 연출한다. 누가 누가 잘하나? 다 똑같아서 판단 불가라는 게 방송 칼럼니스트 정석희(오른쪽)씨와 드라마 <소울메이트>의 작가 조진국씨의 안타까운 판정이다.

정석희 문화방송의 <생방송 오늘 아침>에서 한국방송 <아침마당>, 에스비에스의 <김승현 정은아의 좋은 아침>까지 방송 3사가 차례로 돌아가면서 대통령 후보 부인들을 출연시켰다. 그런데 나와서 하는 이야기가 똑같아서 재방, 삼방을 보는 것 같았다.ㅠㅠ

조진국 모두 입을 맞춘 듯 진솔함을 강조하시던데 내 성격이 꼬인 걸까. 출연 전에 캠프에서 분명히 콘셉트를 회의하고 시나리오를 짰을 텐데, 문제는 그 콘셉트가 하필 ‘진솔함’으로 다 똑같이 겹친 거지.(웃음)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부인상은 딱 하나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모두 똑같은 모습을 보이는 거 아니겠나.


왜 다들 남편의 그림자 같기만 한가

육영수 여사가 아직도 롤 모델인 거다. 머리 스타일부터 행동거지까지 그 이미지를 벗어나면 욕 먹는다고 생각하는 거지. 이게 노태우 대통령 영부인인 김옥숙씨 때부터 시작됐다. 육 여사와 반대 이미지인 이순자씨가 엄청 욕을 먹으면서부터 매뉴얼이 만들어진 것 같다.

수수한 것도 좋지만 이제는 한국에도 재클린 케네디나 에바 페론처럼 세련되고 개성 강한 퍼스트 레이디가 나올 때도 되지 않았나.

맞다. 여성 시이오(CEO)가 증가한다는 기사도 나오고 여성 노동인구도 증가했는데, 영부인 후보들은 모두 직업도 없고 남편의 그림자 같기만 하다. ‘나’는 없고 남편이 어떻다는 이야기만 하니 남편 학력이 곧 자기 학력이 되고, 남편 직업이 곧 내 직업인 중년 주부들과 별다를 게 없더라.

보는 사람의 이중잣대도 있는 것 같다. 영부인 힐러리의 적극성에는 호의적이면서 우리 사회로 돌아오면 아내로서의 여자는 참하고 조신하기만 바라는 거다. 그러니까 후보들의 정치적 색깔은 각양각색인데도 부인들은 현모양처형으로 획일적이다.

사실 어쩌면 박근혜씨가 대통령 후보가 될 수도 있었고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은 세련된 패션감각과 건강한 여성성과 발랄함으로 인기를 끌지 않았나.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 대통령 부인에게 기대하는 이미지는 여전히 크게 상충된다.

영부인이 되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질문의 답도 여성, 환경 등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교과서적인지.

남편인 대통령이 뭔가 잘못된 일을 할 때 어떤 식으로 그런 걸 막겠다, 이런 이야기들이 나왔으면 차별성도 드러나고 재미있었을 텐데.

그리고 왜 다들 엘리트 출신에 중산층 이상인데 그렇게 어려웠던 과거 이야기만 하는 거지? 또 밥상은 왜 그렇게 소박해? 드라마에 보면 기업 중역이나 정치가 같은 사람들 집은 화려하고 밥상도 진수성찬이던데 그게 가짜였던 말인가?(웃음)

얼마 전에 이명박 후보 부인이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있는 게 사진에 찍혀서 롱샴 가방을 들고 있는 문국현 후보 부인 사진과 비교하는 기사가 나왔다. 나는 그런 기사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몇백억원 재산가가 시장 바구니만 들고 다닌다면 그게 더 거짓말처럼 보이지 않을까.

돈 있는 사람이 돈을 쓰지 않으면 누가 쓰나. 차라리 부인이 나와서 내가 다른 것보다 정말 예쁜 구두 욕심은 많은데 이제 그런 걸 자제해야 하니 개인적으로 좀 속상하기도 하다, 이런 말을 했으면 더 진솔하게 느껴질 것 같은데 말이다. 앞으로는 레드카펫의 배우들을 보는 것처럼 후보들이나 부인들의 패션감각을 밝고 재미있게 논하는 분위기가 됐으면 좋겠다. 지금은 스타일에 대해서 이야기할 거리도 없지만.

명품 가방 쓴다고 비난하는 것도 문제


제발 육영수 여사는 잊어버려라
주부로서 지켜보면 분명히 남편한테 플러스가 되는 사람도 있고, 마이너스가 되는 사람도 있긴 하더라. 보면서 나는 어떤 아내인가라는 반성도 되고(웃음). 그런데 좀 안됐기도 하다. 요새 연예인 부부 보면서 쇼윈도 부부라고 하는데 정치인 만큼 쇼윈도 부부가 있을까. 이혼하고 싶어도 참아야 하고 전날 싸워도 다음날이면 아무렇지도 않게 또 내조형 현모양처로 변신해야 하지 않나.

맞다. 연민이 느껴지기도 하더라. 텔레비전에서 모두 그렇게 똑같은 모습으로 나온 것도 결국 자기 본래 성격을 자제하고 유권자가 원하는 캐릭터로 세팅을 한 것 아닌가. 그 역시 쉬운 일은 아닐 게다.

주말 밤에 한 문화방송 특별 다큐 <텔레비전을 좋아하세요?>는 꽤 참신한 프로그램이었다. 텔레비전은 흔히 바보상자라고 불리지 않나. 특히 배운 사람들일수록 텔레비전은 안 본다고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고. 그런데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텔레비전은 기득권층이 아니라 노인처럼 소외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매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 못한다고 하지만 외로움이야말로 나라도 구제 못하는 것 아닌가.

많이 배운 사람들은 대체로 경제력도 있고 놀 거리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지 않나. 그러니 텔레비전을 하찮게 볼 수 있는 것 같다.

나도 20대 때는 바쁘고 친구들도 만나고 연애하고 이러느라 텔레비전을 거의 안 봤던 것 같다. 지금은 텔레비전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잘났어, 정말!”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온다.(웃음)

그런데 나 역시 주말에 약속 없고 한가할 때 몇 시간씩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이게 뭐 하는 건가 싶고, 내가 바보가 돼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심지어 나는 텔레비전으로 먹고사는 사람인데도 말이다!(웃음) 텔레비전은 바보상자라는 주입을 너무 많이 받아서 그런 죄책감이 생기는 것 같다.

거기 보면 단수보다 정전이 더 무섭다고 말하는 어떤 할머니 이야기가 나온다. 티브이를 못 보니까 말이다. 사실 티브이를 보다가 대화하듯이 혼자서 자문자답하는 경우도 많지 않나. 그리고 텔레비전 때문에 가족 간의 대화가 단절된다고도 하는데 막상 실험해보면 식구들이 밥 먹고 각자 방으로 흩어져서, 텔레비전 보면서 하던 짧은 대화마저 사라진다는 게 실험결과라지 않나.(웃음)

텔레비전을 좋아하세요?


너 어제 그거 봤어?
근데 요새는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두 대 이상 되니까 또 취향 따라 각방 들어가서 본다. 사실 티브이의 유용성, 무용성을 논하는 건 이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만큼이나 무의미한 이야기다. 뭐라 뭐라 해도 텔레비전만큼 영향력이 큰 매체는 없지 않나.

나 같은 주부한테 텔레비전은 다른 세상을 만나는 유일한 통로다. 사실 주변에 만나는 사람도 뻔하고 그 사람들의 성향도, 지지하는 대통령 후보도 비슷한데 텔레비전을 통해 다른 세계 사람들, 다른 생각을 만난다. 예를 들어 <환상의 짝꿍>을 보면서 우리 애들 어렸을 때와 너무 다른 요즘 꼬마들을 알게 되고, 또 <시골에서 자자>를 보니까 시골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정리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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