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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1.08 11:09 수정 : 2007.11.12 00:59

너 어제 그거 봤어?

[매거진 Esc] 너 어제 그거 봤어?
복잡한 추리에서 전통적 순애보까지
도포자락 휘날리는 사극 골라먹기

월화(<왕과 나> <이산>), 수목(<태왕사신기>), 토일(<대조영> <별순검>) 사극의 향연 속에서 살다보니 코트 대신 두루마기를 입고 출근을 해보고 싶은 충동까지 생긴다. 지겹다는 푸념도 쏟아진다. 하지만 도포자락 휘날리며 ‘하오체’와 ‘하소서체’를 연발한다고 다 같은 사극이 아니다. 〈매거진t〉의 백은하 편집장(사진 오른쪽)과 차우진 기자가 사극 골라먹는 법을 따져봤다. 이들이 꼽은 사극 최고의 메뉴는 ‘시에스아이 조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엠비시에브리원의 <별순검>이다.

차우진 한국방송의 <사육신>이 마음 아플 정도로 처참한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남북합작 등 여러 낯선 요인도 있긴 했지만 이제 사람들은 <조선왕조 5백년>류의, 역사를 정공으로 다루는 진지한 사극은 안 보는 것 같다.

백은하 <이산>이 <왕과 나>의 시청률을 따라잡으면서 본격적인 각축전이 시작된 것 같다. 그런데 <이산>의 이병훈 감독과 <왕과 나>의 김재형 감독의 스타일이 달라서 시청률 싸움을 한다기보다는 공평하게 나누는 느낌도 든다. <대장금>처럼 이병훈 사극이 멜로 라인과 함께 주인공의 성장담을 담은 휴먼 스토리 중심이라면 김재형 사극은 누가 누구와 담합해서 어떻게 권력을 창출하냐 같은 정치적 스토리에 치중하면서 나이 든 시청자들의 카타르시스를 자극한다.

대선을 앞두고 모두 궁중으로 들어왔나

옛날에는 야사라거나 저잣거리 이야기도 꽤 많았는데, 요즘 사극들은 모두 궁중으로 들어왔고, 또 왕이 주요 역할을 하며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라는 게 핵심이 된 것 같다.


아무래도 대선을 앞둔 한국 사회가 그 어느 때보다 관심을 가질 만한 이야기니까. 특히 여름에 했던 <한성별곡>을 비롯해 <이산>, 10일부터 방영하는 홈시지브이의 <8일>까지 정조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들이 많아진 게 흥미롭다. 정조의 고민이 2007년 이곳에 던져진 고민과 궤를 같이하면서 사극이 사극으로 안 보이게 되는 거다.

〈이산〉문화방송 제공
사실 정조는 문민정부 이후 발견, 또는 재해석된 왕이지 않나. 그런데 한국이 이상한 게 민주주의네 정당정치네 해도 정치의 원형을 왕조에서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많다. 정치인들은 대통령을 임금으로 비유하고. 정조가 추진력 강하고 유능하면서도 어느 정도 민주적 절차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이런 점들이 요즘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것 같다.

사극이 기본적으로 캐릭터 쇼이긴 하지만 <이산>에서 정조는 <한성별곡> 때의 정조와 많이 다르다. 정조를 연기하는 이서진이 보여주는 애틋함에 여성 시청자들이 몰입하는 듯하다.

사실 이서진이 정조로 출연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안 어울린다, 어쩌려고, 이런 반응이 많았다. 지금 보면 <연인>에서 조폭으로 나왔던 그 느낌과도 비슷한데 겉으로는 강하면서도 어느 순간 약해 보이는 모습이, 은근히 모성애를 자극하는 면이 있다. 기대고 싶은 남자 느낌도 나고. 난처한 입장의 왕을 그리는 데 비교적 어울려 보인다.

등불 대신 전기로 감전시켜 죽이다니

문화방송과 에스비에스가 이처럼 각각의 브랜드화된 사극을 밀어붙인다면, 한국방송은 완전 정공인 <사육신>이 참패했지만 <한성별곡>처럼 새로운 시도도 했다. 그런 점에서 방송사별 특징도 보이는 것 같은데 사극 가운데 장르적 재미를 가장 많이 주는 건 작년에 문화방송에서 조기종영됐다가 케이블 채널에서 부활한 <별순검>이다.

〈왕과 나〉에스비에스 제공

‘조선판 시에스아이’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은 전문드라마다. 최근 한국 드라마가 장르화되면서 한국형 시에스아이를 표방하는 드라마가 생겼는데, 예를 들어 <히트>처럼. 그때는 좀 아니다, 미숙하다 했던 것들이 배경을 과거로 옮기니까 오히려 거슬리지 않고 심지어 과학적으로 보인다.

<시에스아이 과학수사대>에서 하도 많이 나와서 초등학생까지 알 만한 과학 용어들이 현대극에서 나오면 따라한다는 느낌이 들 텐데 ‘강한 식초가 핏자국을 드러나게 합니다’라는 대사는 신선한 거지. 게다가 이 드라마의 배경은 조선 말기 고종 때다. 격변하는 역사적 시기에 한국적 정서를 녹여낸 방식도 참신하다.

한복 입고, 갓 쓴 사람들이 안경을 썼다든지, 시계가 나온다든지 하는 장면들도 그렇고 이제 막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문물이나 서구식 과학을 한국식 사건에 적용하는 게 재미있다.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 가운데 한 나이 든 궁녀가 자신이 남자와 정을 통하는 모습을 본 것으로 오해한 어린 궁녀를 죽이게 되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살인도구가 외국에서 들어온 전기다. 등불 대신 궁을 밝히게 된 전기로 감전사를 시키는 근대적 살인을 전통의 궁중 안에서 벌이는 거다. 정말 대한민국에서만 만들 드라마인 거지.

그러니까 외국에도 팔리고.

이병훈이나 김재형 또는 <대조영>이 각자의 방식으로 시청자들에게 어필하는 가운데 생긴 사각지대를 <별순검>이 유효적절하게 찾아내 좋은 상품을 만들어냈다.

사극이라면 왕이나 무사, 포졸, 궁녀, 보부상 등 직업도 고정됐는데 새로운 직업을 발견했다는 것도 좋다. 아쉬운 건 시대도 계급사회이고 별순검 안에도 계급이 있을 텐데 그런 것에 대한 언급이 부족하고 그냥 정의로운 공권력으로만 드러난다. 계급을 중심으로 한 내부 사람들 이야기가 들어가면 더 입체적이 될 것 같다.

나는 배우 디렉팅 부분에서 아쉽다. 스토리와 연출이 다 좋은데 연륜 있는 배우들 나올 때는 편하게 보다가 젊은 배우들이 나오면 어색해진다. 그런데 류승룡은 진짜 멋지지 않나? 한국의 중년 남자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시크한 매력을 한껏 보여준다.

〈이산〉(맨위)과 〈왕과 나〉(가운데)는 브랜드화된 사극으로, 〈별순검〉은 차별화된 장르물로 시청자들에게 호소한다. 엠비시에브리원 제공

자료의 부족이 더 많은 자유 주기도

그리섬 반장이라니까.(웃음) 무엇보다 한국의 범죄 드라마가 왜 죽였나, 누가 죽였나에만 치우쳐 과정을 제대로 보여준 게 별로 없는데 <별순검>은 그 과정을 재구성하는 데 탁월하다.

그게 바로 <별순검>이 <시에스아이>에서 뭘 가져와야 하는지 정확히 파악한 똑똑한 드라마인 이유다. 궁녀들이 쓰는 비밀의 말이 있고 이걸로 추리를 이끌어낸다든가 하는 식의. 또 이렇게 복잡한 추리와 해결의 과정을 통해 전통적인 순애보를 펼치기도 하는데 이런 식의 러브스토리도 기존의 수사극에서는 볼 수 없었던 거잖아.

현대물이면 리얼리티가 중요하기 때문에 짜증날 이야기도 사극이니까 거슬리지 않는다. 사극이라는 조건 아래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더 많아지는 것이다. 또 <별순검>이 탄생된 계기를 들었는데 본래 다른 걸 준비하던 제작진이 자료에서 부검에 대한 이야기를 몇 줄 보면서 구상됐다고 한다. 사극에서 자료의 부족은 창작자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기도 한다.

결국 사극은 리얼리티가 아니라 해석의 문제다. 어떤 눈으로 시대를 바라보고 이야기하는가에 따라 같은 시대에도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는 거다. <별순검>의 약진을 통해 옛날이야기를 전보다 훨씬 재밌고 새롭게 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날 거다. 그렇게 새로운 고려 이야기, 신라 이야기, 고조선 이야기도 보고 싶다.

정리 김은형 기자


■ 극중 최고의 신분상승

조폭(<연인>) 넘버투에서 임금(<이산>)으로 수직상승한 이서진

“사랑하는 여자 하나만 챙기던 분이 이제 나라 걱정에, 쳐다보는 여자들까지 늘어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으니 과로하시지나 않을까 사료되옵니다”(백은하)

“다른 옷을 입었지만 두 캐릭터 사이에 배우로서의 감수성이나 기질이 관통한다. 그런 점에서 이서진은 배역을 잘 찾아가는 배우다.”(차우진)

■ 극중 최하의 신분하락

임금(<한성별곡>)에서 말단 공무원(<별순검>)으로 수직하강한 안내상

“좋은 옷 입고 좋은 음식 먹으며, 암살 위협에 시달리던 시절보다 속 편하게 서민들과 함께 숨쉬며 뒹굴게 된 요즘이 더 즐겁지 않으신가요?”(차우진)

“<한성별곡>에서 카리스마를 불 뿜으며 정극적 연기의 정점을 보여줬다면 <별순검>에서는 안내상이 지닌 끼를 유감없이 발휘해서 좋다”(백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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