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장차 연행 해프닝 속에 ‘시국발언’도 왕성하게 쏟아내는 대중음악평론가 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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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Esc]도대체 누구야?
닭장차 연행 해프닝 속에 ‘시국발언’도 왕성하게 쏟아내는 대중음악평론가 김작가 여기 또 한 명의 달인이 있다. 30년 넘게 홍대 인근을 떠돌고 계시는 ‘마포’ 김작가 선생님, 한달에 300장 넘는 외고를 쓰기도 하시는 ‘필자’ 김작가 선생님, 술 하나로 가히 보험왕 수준의 인맥을 갖고 계시는 ‘마당발’ 김작가 선생님이 바로 그분이다. 최근 달인 목록에 호를 하나 추가하셨다. 촛불집회에서 연행돼 외고 필자가 아닌, 전공인 대중음악과 전혀 상관없는 취재원으로 한겨레 1면을 장식하신 ‘시민’ 김작가 선생님이다. 김 작가님이면 김 작가님이지 김작가 선생님이 뭐냐고 묻지는 마시라. 필명이 김작가니까. 김작가라는 범상치 않은 필명으로 익숙한 대중음악 평론가 김성민(33)씨다. 구성작가 과정 듣다가 ‘노브레인’에 접근 어린이 김작가는 기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신문과 소설 읽기에 여념이 없던 문학소년이었다. 이문세·조용필·구창모 등 국민가요를 들으며 해맑게, 라기보다 어둡지는 않게 자라왔던 어린이 김작가의 가슴에 ‘록’이라는 불씨를 떨어뜨린 것은 로커 지망생 사촌형도, 동네 누나도 아니었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1987년에 <스튜디오 에이>라는 프로그램을 봤어요. 일요일 저녁에 방송했던 음악 프로그램이었는데 당시 잘나가던 디제이가 나와서 전자드럼을 ‘두구두구’ 치고 그 다음에 온갖 헤비메탈 밴드가 나와서 연주를 했죠. 그 헤비메탈 사운드가 묘하게 좋았어요. 그때부터 시나위며 백두산이며 국내 록밴드의 음악을 찾아 들었어요.” 당연한 순서로 중학교 3학년 때 할로윈과 메탈리카의 세계를 알게 되면서 음악 오타쿠로서 인생역정을 시작했다. 청소년 김작가는 반에 한두 명쯤 꼭 있던 ‘메탈파’ 남학생이었다. 주말이 되면 청계천으로 달려가 엘피 음반을 사들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엘피 음반의 알싸한 플라스틱 냄새에 취해 행복한 미소를 짓고, 교내신문반에서 메탈리카에 대한 원고를 50장이나 쓰고 흐뭇해하는 그런 남학생 말이다. “대학에 가서 밴드를 해보고 싶어서 베이스도 샀지만 연주를 포기했어요. 마음은 이미 세계적인 베이시스트인데 손은 초보였으니까요. 음악을 하는 것보다 소개하는 게 더 재미있더라구요.” 학교 밴드 대신 음악 감상 동아리에 가입했고, 음악을 녹음한 테이프와 직접 쓴 해설지를 들고 빈 강의실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음악을 들려주곤 했다.청년 김작가는 군대를 갔고, 그가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마포구를 잠시 비운 사이, 홍대 앞이 기타 소리와 함께 변하기 시작했다. “1996년쯤 휴가를 나왔어요. 막 홍대 앞에 생긴 클럽에서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을 봤어요. 충격적이었죠. 우리나라에도 이런 음악을 하는 밴드가 있구나.” 청년 김작가는 ‘아워네이션’ 1집과 ‘언니네 이발관’ 1집을 듣고 또 들었다. 제대를 하고 아이엠에프 정국에서 마땅히 할 일이 없었던 그는 한 방송아카데미 구성작가 과정에 들어갔다. 졸업작품 과제로 ‘노브레인’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어 그들에게 ‘접근’했다. 몇 번의 설득 끝에 그들의 다큐멘터리를 찍으면서 홍대 앞에서 음악을 하는 친구들과 급격하게 친해졌다. 물론 매개는 술이었다. “당시 밴드하는 친구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런데 마땅히 저를 소개할 단어가 없었죠. 주변에서 방송작가 과정을 듣고 있다고 해서 김 작가라고 불렀어요. 그 때 불렸던 김 작가를 지금까지 필명으로 쓰고 있어요.” 청년 김작가는 1999년부터 인디밴드 공연 기획을 하며 홍대 앞에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식 생활을 시작했다. 매일 술 마시고 음악을 들었다. 잠시 인터넷방송국을 거쳐 ‘문화사기단’이라는 인디레이블에서 일을 했다. 음악과 관련된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2002년부터는 음악잡지 <엠디엠(MDM)>에서 기자로 일했다. 1년 동안 10번이 발행됐는데 월급은 달이 지나갈수록 줄었다. “그때가 제 인생의 아홉수였던 것 같아요. 모래내 자취방 월세가 밀렸고 차비가 없어 몇 시간이고 걸어다녔죠.” <엠디엠>이 문을 닫고 청년 김작가 인생에 암흑기가 찾아왔다. 친구 자취방에서 기생하며 라면 값이 없어서 굶는 날도 많았다. “우울하지는 않았어요. 인생이 시트콤처럼 느껴졌죠. 워낙 고민이 없는 성격이거든요.” 그러다가 작은 꼭지를 연재해 왔던 <필름 2.0>에서 기자 제의가 들어왔고, 1년 반 정도 기자로 일하며 인생에 빛이 들었다. 그러나 2004년 일본 도쿄로 떠났던 휴가에서 느닷없이 ‘나의 길은 음악이다’라는 깨우침을 얻고 회사를 그만뒀다. 그런데 그 다음달부터 신기하게도 원고 청탁이 밀려왔다. “2004년 말부터 원고가 ‘폭주’하더군요. 그 전까지는 음악 수필가, 음악 만담가로 글을 썼는데 점점 더 원고 청탁이 많아지고 여기저기 기사에 이름이 등장하면서 제가 하는 일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대중음악 평론가로 일하게 됐어요.” 촛불집회는 더없이 재미있는 현장 지금 김작가는 한달에 8~10개 정도의 매체에 글을 쓴다. 많은 매체에서 ‘음악’ 하면 필자로 김작가를 떠올리는 이유는 그의 글에서는 쫄깃한 맛이 나기 때문 아닐까. 그의 글은 불량식품 같기도 하고, 계량기로 정확하게 맞춰 만든 잘 빠진 음식 같기도 하다. “저는 음악을 통역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1번 트랙부터 연주를 뜯어가며 얘기하기보다는 그 음악의 전체적인 느낌을 글로 통역한다고 할 수 있죠. 또 현상에 관심이 많아요. 음반 리뷰나 음악에 관련된 글이라고 오직 음악에 대해서만 얘기하기보다는, 지금을 담아내는 음악을 통해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얘기하고 싶어요.” 김작가에게 최근 직업이 또 하나 생겼다. ‘시민’이다. 촛불집회에 참여했다가 연행되기도 했고, 그 이후 <한겨레21>과 <오마이뉴스> 등 여러 매체에서 촛불집회 관련 발언을 하고 있다. “제가 성격이 다혈질이에요. 욱하는 성격이 있죠. 지금 사태를 보면서 짜증이 났어요. 그래서 달려갔죠. 지금 촛불집회 현장은 문화를 다루는 저에게는 더없이 재미있는 현장이고 흥미로운 나날이에요.” 글을 쓰는 것과 음악에 관련된 글을 쓰는 것과 음악을 듣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좋으냐고 물었다. “음악에 대한 구라를 푸는 거요. 술 마시면서 음악 얘기 하는 게 가장 재밌어요.” 참고로 다음달께 나올 예정인 그의 첫번째 책 제목은 <음악구라집>이다. 글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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