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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3.05 17:27 수정 : 2008.03.05 17:27

실비아 플라스의 삶을 영화로 옮긴 〈실비아〉(2005).

[매거진 Esc] 김연수의 여자 여자 여자

지덕체를 연마하던 청소년 시절, 내 영혼과 육체의 발달을 책임진 두 명의 실비아가 있었으니 하나는 실비아 크리스탈이고 하나는 실비아 플라스다. 개인 과외가 금지된 제5공화국 초기, 실비아 크리스탈 덕분에 나는 개인 교습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요즘 나오는 야동이 제 아무리 야하다고 해도 중학교 1학년 가을 소풍을 마치고 김천극장에서 본 <개인교수>를 능가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긴 해도 실비아 크리스탈의 대표작은 <엠마누엘 부인>일 것이다. 내가 이 칼럼의 첫 회를 말탈래 부인 엠마 보바리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 영화에 나온 실비아 크리스탈의 이미지 덕분이었다. 실비아 크리스탈은 외로운 부인들은 말을 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내 전두엽에 각인시켜 놓았다. 왜? 도대체 왜? 이 질문은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뒤인 어느 날, 이 칼럼의 첫 회를 쓸 때까지 이어졌다.

1980년대는 성적으로 소통이 불가능했던 시절이었음에 틀림없다. 실비아 크리스탈이 한번 말을 타자, 그게 문학적으로는 100년도 더 전에 유행했던 스포츠였음에도 한국 영화의 부인들도 저마다 말을 타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여자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이 영문도 모르고 남자들에게 팔리고 있었다. 다들 기억하겠지만, 그건 도올 김용옥의 책이었다. 그때만 해도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그 책을 실용서로 보는 남자들이 수두룩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자란 무엇인가>와 <사랑의 기술>을 아무리 읽어도 왜 부인들은 외로울 때 말을 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건 단순히 말이 가진 어떤 동물성 때문일까? 바야흐로 체는 갖추었으되 지덕은 상당히 부족한 까닭에 아무리 생각해도 그걸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다가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여자를 한 명 발견했으니 그게 바로 실비아 플라스다. 실비아 플라스라는 이름도 상당히 에로적으로 들리겠지만, 이 사람은 시인이다.

실비아 플라스의 시 중에 ‘아빠’라는 게 있다. 이 시를 처음 읽고 나는 좋아서 미치는 줄 알았다. 열세 살에 본 <개인교수>보다 훨씬 더 좋았고,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이 시에서 실비아 크리스탈과 더불어 얘기해볼 만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어떤 여자든 파시스트를 숭배한답니다,/ 얼굴을 짓밟는 장화, 이 짐승,/ 아빠 같은 짐승의 야수 같은 마음을.” 이 구절을 읽고 “아, 그렇구나. 여자란 본디 그런 존재들이구나. 사랑의 기술이나 연마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수준이 1980년대 초반 에로영화의 이미지를 생산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가학과 피학, 살인과 피살의 오랜 역사의 결말을 실비아 플라스는 시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하니까. “아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혔어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조금도 아빠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춤추면서 아빠를 짓밟고 있어요./ 그들은 그것이 아빠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어요./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젠 끝났어.” 이 시를 다 읽고 나서야 나는 얼굴을 짓밟는 장화가 그리워서 부인들이 말을 타는 게 아니라는 걸 확신하게 됐다.


김연수의 여자 여자 여자
지난 1년 가까이 계속된 나의 여자 공부는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젠 끝났어”에서 비롯했다. 이제 이 칼럼도 종착역에 도착했다. 찬바람이 불고 비바람이 치지만, 이제는 작별을 고할 때가 찾아왔다. 이제까지 내가 쓴 글들은 다 잊어버리더라도 이 구절만은 평생 잊지 말기를.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젠 끝났어.” 그럼 다들 안녕.


김연수 소설가

※ ‘김연수의 여자여자여자’는 이번 회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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