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7.26 16:08
수정 : 2007.07.26 16:08
[매거진 Esc] 박해미의 오케이클리닉
모질게 선을 그어버리세요
“어지러운 친정, 최선을 다해도 어머니와 동생이 절 괴롭혀요”
Q
30대 초반의 여성입니다. 남편, 아이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지만 친정 문제 때문에 괴롭습니다. 옛날부터 아버지는 심한 의처증으로 툭하면 어머니와 칼까지 드는 격한 싸움을 벌이셨습니다. 어머니의 가출과 이혼, 재결합으로 얼룩진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늘 우리 자매 때문에 산다고 울면서 하소연하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착한 딸이 되려고 노력했어요. 그동안 아버지 말을 들어주려 노력했고 어머니에게는 주부 학교 등록도 해드렸습니다. 밖으로만 돌던 동생이 독립하고 싶다길래 돈도 빌려 줬습니다.
하지만 변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어느 날 격심한 스트레스로 환청이 들리더군요. 다니던 대학원을 그만두고 직장을 잡아 대출까지 얻어 독립했습니다. 아버지는 절 원망했고 어머니도 죽어 버리겠다고 위협했고 동생은 맏딸이 책임감이 없다며 분개했습니다. 시간이 흘렀고, 저는 어렵사리 결혼했고 다행히도 남편은 이해심이 많습니다. 얼마 전 처음으로 친정 문제의 자초지종을 들은 남편은 무척 놀라고 힘들어했습니다. 제가 감당해야 할 일이기에 남편에게는 가급적 부담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친정어머니가 몸까지 아픈데 아버지의 학대가 계속되어, 결국 제가 나서서 아버지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그렇게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계시지요. 문제는, 아버지의 입원 뒤에도 어머니와 동생의 행동이 변함없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젖먹이 앞에서도 아버지와 칼 들고 싸우던 얘기를 하시고, 제가 눈물 흘리며 그만 해달라고 해도 되려 ‘안 들어준다’며 화를 내십니다. 한 살 어린 동생은 돈밖에 모르고, 유부남을 사귀면서도 말리는 언니에게 ‘왜 안 되냐’고 당당합니다.
저로서는 힘들지만 최선을 다해 왔습니다. 그런데 왜 어머니와 동생은 절 비난할까요. 그리고 언제나 감정적 수혜만을 바랄까요. 둘은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남편 만나 잘살면서 뭐가 그리 힘드냐, 잘난 사람이 주고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둘째를 유산해서 누워 있을 때까지 어머니가 절 괴롭혀서, 그날로 연락을 안 한 지 벌써 10개월이 다 되어 갑니다. 얼마 전 동생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천연덕스럽게 풀고 살자고 웃더군요. 싸우고 끊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무척 아픕니다. 어떡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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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미의 오케이클리닉 /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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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더 가깝기 때문에 더 괴로운 게 친정 식구들의 문제입니다. 비슷한 문제로 시댁 식구들이 괴롭힌다면 남편과 상의할 수도 있고 또 그 문제가 심각할 때는 결별이라는 극단적인 대안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피붙이인 친정 식구들은 말로는 의절한다 해도 마음속으로는 끊을 수 없어 더욱 힘들 겁니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한다면 끊기지 않기 때문에 더 단호하고 과감하게 결단 내려야 하는 게 친정 문제이기도 하죠. 쉽게 생각해서 엄마와는 아무리 소리 지르고 싸워도 화해할 수 있지만 시어머니와는 조금만 갈등이 빚어져도 풀기 쉽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예요.
평생 죄책감을 안겼던 어머니의 하소연을 냉정하게 거절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하지만 끔찍했던 옛날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어머니의 삶이 치유되는 것도 결코 아니죠. 또한 식구들에게 ‘잘난 사람’인 님이라고 불행했던 가정사의 피해자가 아닐까요? 님에게 어머니가 하는 하소연은 결국 자신이 받은 학대를 딸에게 전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님이 지속적으로 정신적 상처를 받는다면 자라나는 아이에게는 과연 나쁜 영향이 미치지 않을까요?
어머니에게 오는 연락을 거부할 필요는 없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들다면 무리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도와드려야죠. 하지만 현재에도 미래에도 도움 안 되는 옛날 이야기를 꺼낸다면 단호하게 선을 그으세요. 스스로 모질게 느껴질 만큼 이런 건 도울 수 있다, 저런 건 받아들일 수 없다, 과거의 불행으로 지금의 가정을 망칠 수 없다는 걸 뚜렷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본인도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지 솔직하게 충분하게 털어놓으세요. 물론 어머니께서 섭섭해하고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끈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풀릴 수밖에 없는 게 모녀 관계입니다.
동생에게는 아예 신경을 끄세요. 제 생각에 님의 동생은 언니의 도움으로 뭔가 깨닫거나 변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난 것 같습니다. 유부남과 사귀든, 더 크고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든 본인이 시행착오를 거쳐서 깨달을 겁니다. 님은 언니로서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다고 딱 부러지게 선언을 하세요. 지금부터는 그냥 놔두는 것이 오히려 동생을 인간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기회라는 걸 마음에 새기세요.
오죽 답답했으면 참다 참다 남편에게 하소연을 했을까, 마음이 아프네요. 하지만 남편이 해줄 수 있는 건 잠시의 감정적 다독임뿐입니다. 남편이 정신적 지지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이 또한 환상입니다. 님의 말대로 이 문제는 본인이 감당해야 할 일이지, 남편은 결코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부끄러운 내 집 문제니 숨기자는 게 아닙니다. 어느 집안이나 한두 가지 문제는 끌어안고 있기 마련이고, 남편의 집에도 아마 님이 모르는 곪은 상처가 있을 겁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공유한다고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때로는 가정의 분란을 만들기 쉽죠. 아무리 우리 집이 싫다고 해도 상대방이 우리 집 비난하면 감정 상하게 되잖아요.
마지막으로 불행했던 한 집안의 딸이라는 위치가 지금 한 집안의 어머니라는 위치를 흔들고 있지는 않은지 잘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어머니입니다. 지금 의지할 건 바로 한 아이의 어머니인 본인뿐입니다. 내 아이의 미래를 생각하고 어머니의 처지에서 생각을 크게 펼치다 보면 본인에게서 무한대의 힘이 나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문제를 풀어 간다면 어머니도 동생도, 언젠가는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님에게 반드시 돌아옵니다. 확신을 가지세요. 힘내세요!
배우·뮤지컬 제작자 박해미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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