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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7.11 17:47 수정 : 2007.07.13 14:28

일러스트레이션 최수연

[매거진 Esc] 박해미의 오케이클리닉
고마움 커녕 맨날 욱하고 막 대한다니 진정성 의심
‘70년대 변졀 신파극’ 우려…자신한테 시간 주세요

“갈수록 무책임한 40대 고시생 남편과 계속 살아야 할까요”

Q 20대 주부 대학원생입니다. 대인관계가 서툴러서 외로움을 느끼며 살다가 2년 전 지금의 남편을 만났어요. 명문대 법대 출신으로 사법고시를 공부하는 사람이었죠. 마흔 살로 나이는 많지만 학식과 경험도 풍부하고 자상해서 사귀다가 덜컥 임신을 했어요. 고민이 됐지만 애인의 인간성을 믿고 결혼하기로 작정했어요. 애인은 수입이 없고 노모가 간신히 뒷바라지하고 있었죠. 지방에 계신 부모님은 말리셨지만 저는 부모님과 의절하고 동거를 시작해서 지난해 겨울 아이를 낳았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부모님께서 제 생활비와 학비를 계속 보내 주셔서 근근이 지내왔습니다. 지난 1년은 아이 기르랴. 대학원 다니랴, 남편 공부 뒷바라지하랴, 아르바이트하랴 정신없이 보냈죠.

그런데 같이 살면서 애기 아빠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됐어요. 마음이 나쁜 사람은 아닌데 현실 생활에서는 대책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가장으로 책임감은 느끼지 못하고 저에게 끊임없는 지지와 봉사, 희생을 요구했어요. 시어머니께서도 충실히 내조해서 남편 출세시키는 게 저의 최선의 의무라고 누차 강조하셨어요. 남편은 화를 잘 내고 함부로 말을 했어요. 몇 번 헤어지자는 말도 하긴 했지만 눈물을 머금고 참으면서 지냈어요. 남편이 성실한 모습을 보이면 무슨 일이든지 하며 당분간 가정 경제를 책임질 생각도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저는 남편과 시어머니를 위해 돈 버는 기계 노릇만 강요받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분노가 치밀고 자꾸 우울해져요. 이 결혼 생활 계속할 의미가 있을까요? 그럴 수 없다면 우리 아이는 어떻게 하지요? 너무 캄캄해요.

박해미/배우·뮤지컬 제작자
A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꽉 막힌 상태의 님은 지금 일생일대의 힘들고도 중요한 고비에 서 있는 듯합니다. 결혼 전엔 본인만 잘하면 아무 문제 없었겠지만 지금은 님뿐 아니라 공부하는 남편 뒷바라지에, 육아까지 전보다 열 배 이상의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할 텐데 거기에 경제적인 부담까지 가중되니 안팎으로 님이 느꼈을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내 마음도 짓누르는 듯하네요.

비록 인간성을 믿고 결혼했다고 하나 연애 기간이 짧았던 관계로 상대방을 충분히 파악하기 힘들었을 테고, 님이나 남편 역시 만반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아이가 생기자 얼떨결에 동거와 결혼에까지 이르는 등, 일련의 일들이 자신들의 계획과는 무관하게 급박히 이뤄져 두 분 다 이 상황이 아주 힘들 거란 생각입니다. 그러니 자상하기만 할 것 같던 그가 화도 잘 내고 말도 막 했던 것이 아닌가 싶네요. 그러나 사실 진정으로 격렬한 변화를 겪은 사람은 바로 님입니다. 한 남자를 믿고 친정 부모님과 의절까지 하며 결혼하여 그와 아이까지 탄생시켰는데 한 집안의 배려받는 가족 구성원이 아니라 돈 버는 기계라는 느낌을 갖게 만들었다면 이처럼 절망스러운 경우도 없겠죠.


우선 본질적인 부분부터 접근해 보도록 하죠. 명문대 출신이건, 고시 공부를 하건, 지금 경제력이 있건 말건, 남편을 님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남편 역시 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겁니다. 여기에 확신과 진정성이 있다면 대화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솔직히 저는 남편의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네요. 지금 상황은 누가 봐도 님께서 200% 이상의 헌신을 하고 있는 건데, 그것에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요구만 한다는 건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시어머니야 옛날 분이니까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고를 하고 있다 하더라고, 그 시어머니의 압박을 막아 주는 것 역시 남편의 몫인데 그런 부분에서도 님의 남편은 아무 역할을 하고 있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 아내를 이해하지 못하고 고맙게 여기지 못하는 남편이라면 과연 그가 성공하고 자리를 잡았을 때 님의 고된 뒷바라지를 기억이나 해 줄까요? 부부 간의 사랑과 믿음은 편하게 살 때보나 어려울 때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이 난관을 아내 혼자 감내해야 한다면 여유가 생겼을 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정말이지 님의 이야기가 70년대의 신파극으로 흐르지 않을까-왜 힘들 때 남자 뒷바라지하다가 남자가 성공하면 끝나 버리는 관계 있잖아요-몹시 걱정스럽네요.

한번 지금 부부의 상황을 냉정하게 돌아보세요. 남편이 이런저런 힘든 상황으로 욱하는 짜증을 내지만 깊이 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가장의 책임은 등한시한 채 님을 아내가 아닌, 자신을 부양해 줄 또 다른 어머니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면, 이는 두 번 고려할 가치도 없습니다. 엄마가 불행을 느끼면 아이도 온몸으로 그 불행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아이를 위해서 불행한 결혼을 억지로 참고 살았다는 건 남에게 보이기 위한 핑계일 뿐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 길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엄마가 행복하고 건강해야 아이도 행복하고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피폐해진 자신에게 시간을 주세요.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아이는 할머니께 잠시 맡기고 모든 복잡함을 뒤로 한 채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 보세요. 한 발짝만 물러서서 차분히 지금 상황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생각보다 너무나 간단해 보일 수도 있거든요. 님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은 님 혼자만이 아니랍니다. 의절을 하고도 자식 걱정을 하는 부모님은 님 못지 않게 님과 아이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이와 둘만 남겨질 것같은 두려움이 있겠지만 주위를 살펴보면 당신을 지지하고 지원해줄 아군은 많습니다. 힘을 내서 무엇이 진짜 나와 아이를 위한 행복인지 생각해보세요. 파이팅!

배우·뮤지컬 제작자 박해미

고민 상담은 go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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