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8.08 21:40
수정 : 2007.08.08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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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기자 박미향, 와인집을 가다-작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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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맛기자 박미향, 와인집을 가다 / 작은 이야기
“어떤 요리가 필요하십니까?”, “예약하신 날, 비가 온다는 데 파전이나 보쌈이 어떠십니까?”, “연어스테이크가 맛있습니다.”, “얼마 예상하십니까?”, “와인은 어느 등급이 필요하십니까?”, “원하시는 음악을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와인집 주인장과 손님의 대화는 끝이 없다. 방배동 카페 골목에 있는 ‘작은 이야기’는 촌스럽고 특이한 와인집이다. 미리 전화만 하면 어떤 요리도 준비할 만큼 독특하다. 호텔 워커힐에서 요리사로 일했던 주인장, 이기웅(29)씨의 경력 때문이다. 스테이크·보쌈·치킨샐러드·파전·무엇이든지 뚝딱 만든다. 그는 요리들과 궁합이 맞는 와인들도 함께 권한다.
단골이 된 손님들은 굳이 목록을 보지 않고 80가지 종류 중에서 그가 권하는 와인을 마신다. 그는 처음 와인을 만난 이에게는 루마니아·이탈리아 것을, 이미 익숙한 이에게는 아르헨티나·스페인·프랑스 와인을 권하는 편이란다. 이렇게 맺어진 인연은 값지다. 다른 곳에서 와인을 살 때조차 단골들은 그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본다. 무엇보다 이곳은 와인 값이 ‘착해서’ 좋다. 3만원, 4만원대가 많고 비싼 와인도 십만원대가 대부분이다. 더구나 와인만 주문해도 넉넉한 공짜 안주들이 나오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진다. 폭신한 흔들의자는 그 기분을 한층 돋운다. 천으로 만들어진 의자, 그 뒤로 크리스마스 때 볼 수 있는 반짝이는 작은 등, 다방 안에 있을 법한 유리 칸막이 … 곳곳에 묻어있는 촌스러운 느낌이 정겹다. 그 안에 내 자신이 작은 소품이 되어 앉아 있다. 문득 오래 전 그때 그 자리와 닮았다고 생각하면서!
밤새 학우들과 보낸 엠티의 잔해를 온몸에 덕지덕지 묻히고 나간 소개팅 자리, 뜻밖에 너무나 말끔한 남학생을 본 순간 바닥까지 떨어지는 절망감이라니. 이어지는 천근만근 한없이 어색했던 시간들, 때 낀 손톱을 감추려 애쓰면서 커피 잔을 돌렸다. 만일 그때 ‘작은 이야기’의 와인이 있었다면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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