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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0.29 05:00 수정 : 2019.10.29 11:24

서울교통공사에서 ‘구의역 김군’처럼 스크린도어 관련 업무를 하는 임선재(오른쪽)씨와 염광메디텍고등학교 3학년 박지수 학생이 지난 24일 저녁 서울 마포구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조국, 그 이후] ②다시 문제는 불평등이다
논문1저자·인턴 등 딴 세상 얘기
상위 20%가 1% 특혜 비판할 때
80% “우리 분노는 차 소음 취급”

서울교통공사에서 ‘구의역 김군’처럼 스크린도어 관련 업무를 하는 임선재(오른쪽)씨와 염광메디텍고등학교 3학년 박지수 학생이 지난 24일 저녁 서울 마포구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화가 난다기보다는 의아했다. ‘고등학생이 논문 제1저자가 될 수 있다고?’ 곧 그것이 ‘부모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둘 다 고졸인 ‘나의 부모’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우유 판매 대리점에서 사무관리를 하고, 어머니는 요양보호사로 일한다. 그들도 40~50년 동안 열심히 살았는데, 삶은 여전히 빠듯하다. 18살 박지수가 특성화고 진학을 선택했을 때, 부모는 “우리 지수가 집에 돈이 없어서 대학 진학을 포기했나”라고 말하며 마음 아파했다. 딱히 그런 까닭이 아니었는데, ‘우리 부모님이 뭘 잘못한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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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배우고 잘 사는 이들의 분노’만 조명받나”

불공정함에 대한 분노는 ‘조국 딸 특혜 논란을 두고 왜 많이 배우고 잘 사는 이들의 분노만 조명을 받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일었다. 서울대와 고려대 학생들의 집회를 보고 난 뒤였다. 그들이 “우리도 나름 비겁한 입시 제도에 맞춰 살아서 부끄러웠다. 그래서 행동한다”는 식으로 말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1% 엘리트의 길을 밟는 사람이 있고, 그 아래 20% 정도의 중상류층이 있고, 나머지 80%의 삶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20%에 속하는 이들이 1%를 바라보면서 ‘한 끗 차이인데 우리는 왜 학위도 못 받고, 논문 등재도 못 하나’라며 화를 내고 있더라고요. 그런 건 최저임금도 못 받아서 허덕이고 가정이나 사회에서 꿈을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80%의 문제인데, 우리 문제는 다뤄지지 않으니까 화가 나죠. 우리는 여기에서 그저 ‘차 소음’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이제까지 불평등 담론은 주로 최상위 1%를 대상으로 나머지 99%가 연대해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권력과 결탁한 재벌의 불법·편법 승계에서 탈세나 투기, 폭행이나 마약 같은 문제까지, 1%는 웬만해선 처벌받지 않았다. 만에 하나 처벌받더라도 전관들이 참여한 호화 변호인단 뒤에 숨어 금세 사회적 지위를 회복했다. 그런데 상위 20%에 속하면서 정치적 올바름과 진보적 세계관에 바탕해 1%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도 있었다. ‘강남좌파’라고 불렸던 그들을 보며 그 아래 80% 어디쯤에 속하는 대중은 ‘같은 배를 탔다’고 믿었다.

‘조국 사태’는 그 믿음을 무너뜨렸다. ‘상위 20%’는 이번 사태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무슨 불법을 저질렀느냐”고 말하거나 “격려 차원에서 (조 전 장관 딸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고 해명하면서 실은 80%와 전혀 다른 배를 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폭로했다. 이는 “정의와 공정성을 문제 삼는 그 세력들 역시 한국 사회와 정치에서 오랫동안 정의와 공정성을 파괴한 적폐의 장본인 아니냐는 지적”(신진욱 중앙대 교수)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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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성 말하지만, 내가 낄 자리는 없어”

36살 임선재도 그런 지적을 하는 사람 중 하나다. 그는 ‘조국 사태’를 지켜보면서 사람들이 말하는 공정성의 개념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됐다. 임선재는 ‘구의역 김군’이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열차에 치여 숨지고 석달여가 지난 2016년 9월, 모자라는 인력을 채우는 ‘무기직 공채’에 응해 서울교통공사에 입사했다. 기존 정규직들은 사내 게시판에서 이들을 ‘무기충’이라고 부르며 ‘구걸해서 들어오니까 좋으냐’ ‘지하철역에 노숙자가 많은데 그 사람들도 떼쓰면 다 정규직 해주는 거냐’라고 비아냥댔다. 이런 기억을 지닌 ‘구의역 김군’들은 ‘조국 사태’를 보면서 ‘화목한 집에서 인문계고를 나오고, 과외를 받고, 공기업 취업 준비를 한 사람과 우리가 정말 출발선이 같은가’ 생각했다고 한다. “시험을 치렀느냐 여부로 공정성을 얘기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던 일은 원래 정규직 업무인데 민영화 정책으로 비정규직이 된 거잖아요. 그렇다면 이걸 원상복구시키는 게 공정한 것 아닐까요. 조국 사태와 공정성 얘기를 보면서 나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재미없는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논문 제1저자’나 ‘인턴’ 이런 건 남의 세상 얘기 같으니까요.”

박지수와 임선재의 지적은 미국의 80%에게 이미 보편화한 현상이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충격적인 대선 승리 이후 미국에서도 ‘1% 대 99%’ 담론에 대한 참회록이 나왔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인 리처드 리브스의 <20 VS 80의 사회>와 정치철학자 매슈 스튜어트의 <부당세습>은 이런 참회의 산물이다. 리브스는 <20 VS 80의 사회>에서 동문 자녀 우대와 같은 불공정한 대학 입학 사정 절차와 알음알음 이뤄지는 인턴 자리 분배 등과 같은 ‘기회 사재기’를 고발한다. 20% 중상류층인 “기자, 학자, 기술자, 경영자, 관료들, 이름에 박사(PhD), 의사(Dr)와 같은 알파벳이 붙는 사람들”이 ‘석박사 학위’를 “세대 간 지위 전승의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삼아 “상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시장에서 인정받는 능력을 통해 계급을 재생산”한 뒤 “자신이 공명정대하게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리브스는 “하지만 노동 시장에서 성공하는 데 필요한 재능과 기술, 즉 ‘능력’을 발달시킬 기회는 나고 자란 환경에 따라 매우 불평등하게 주어진다”며 능력주의에 기반한 중상류층의 ‘공명정대한 승리’가 얼마나 불공정하고 위선적인지 꼬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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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주의 지배하는 사회의 이중성

스튜어트도 <부당세습>에서 상위 10%에서 슈퍼 부자 0.1%를 제외한 9.9%를 리브스의 ‘중상류층 20%’와 같은 개념으로 두고 “변호사, 의사, 치과의사, 중급 투자은행가, 엠비에이(MBA) 출신, 전문직 종사자” 등과 같은 이들을 “다른 사람들의 자녀를 희생양으로 삼아 부를 축적하고 특권을 대물림하는 새로운 귀족 계층인 능력자 계층”이라고 칭했다. 그는 이 9.9% 계층을 “안전한 이웃들과 살며, 더 좋은 학교에 다니고, 통근 거리가 짧으며, 양질의 건강 관리를 받고… (중략) …우리 아이들에게 좋은 인턴 자리를 마련해줄 친구들을 가진” 이들이라고 설명한다. 스튜어트 역시 자신의 성취를 “대학에 입학하기 전부터 이미 우리가 갖고 있던 우수한 두뇌에 대한 보상”이라고 여기는 ‘뿌리 깊은 능력주의 신화’가 ‘능력자 계층’의 특징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를 바탕으로 스튜어트는 “교육 수준이 높고 뛰어난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 자기들의 집단 이익을 위해 함께 행동하면, 이는 공공의 이익에 복무하는 일로 인식되는 반면 노동자 계급 사람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똑같은 일을 하면, 자유 시장의 신성한 원칙을 위반하는, 폭력적이고 반근대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회의 이중성을 지적한다. 이상헌 국제노동기구 고용정책국장은 이 책의 해제에서 “9.9%는 세상이 왜 변하지 않는지 한탄하고 비판하지만, 사실 그들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세상의 ‘주요 공범자’”라며 “9.9%는 다양한 정치적 견해에 열려 있으며 사회적 소수자에게도 크게 공감한다. 하지만 그들은 최상위 0.1%와 달리 오로지 자신의 탁월한 능력과 근면성에만 의지했다면서 ‘나는 이런 걸 누릴 자격이 있어. 왜냐하면 오로지 내 힘으로만 이룬 것이니까’라는 능력주의를 정당화 논리”로 쓴다고 지적했다.

리브스와 스튜어트의 분석은 ‘조국 사태’에 그대로 적용해도 어긋남이 없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에는 참가했지만 ‘검찰개혁’과 ‘조국 수호’를 외친 서초동 촛불에는 참가하지 않은 이들 역시 리브스나 스튜어트와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 취업준비생 고아무개(29)씨는 “조 전 장관 딸의 ‘품앗이 인턴’에 가장 큰 박탈감을 느꼈다. 한영외고 학생들에게는 서울대 법대나 단국대 의대 인턴 등의 경험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일반 고등학생에게는 해당 학교 인턴에 대한 정보 자체가 없다”며 “이번 사태를 통해 특정 정보의 유무에 따라 기득권 카르텔과 일반 계급이 나뉘는 사회 구조적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취업준비생 권아무개(24)씨도 “주변 친구들도 조 전 장관 딸이 한 디테일한 행동보다는 기득권이 스펙 쌓기가 더 쉽다는 그 현상에 분노했다”고 말했다. 대학생 박주아(25)씨는 “서울대나 고려대 학생들과 그 시위를 응원하는 그 대학의 교수들을 보면 본인들의 카르텔이 무너질까봐 전전긍긍하는 느낌이 들었다”며 “그들은 공정성에 대한 분노보다는 자신들이 특권을 쟁취했다는 자부심이 있는데, 조 전 장관 딸은 그걸 너무 쉽게 얻었다는 것에 화를 내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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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민주주의’ 벗어나야

그렇다면 ‘조국 사태’ 이후 한국 사회에 남은 숙제는 ‘상위 10~20%의 민주주의’를 ‘80~90%를 위한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것 아닐까. 정주식 <직썰> 편집장은 “불공정과 정의, 평등의 문제를 바탕으로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이번에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다”며 “그건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현실 정치 세력이 실종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는 “이번 사태로 보수 세력뿐만 아니라 진보 세력을 자처했던 이들마저 상위 10% 과두제 민주주의의 수혜자들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 홍콩이나 칠레의 대규모 민중 시위에서 보듯 불평등에 대한 저항과 대중의 분노는 지금 세계 곳곳에서 출현하고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라며 “기득권을 향한 분노가 생산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새로운 진보의 의제를 발굴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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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반대한 가장 큰 요인은 공정성보다 ‘상대적 박탈감’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임명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는 ‘공정성’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보다 ‘상대적 박탈감’이 더 유의미한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나왔다.

정한울 한국리서치 전문위원이 지난 25일 서울글로벌센터에서 열린 ‘한국 사회의 세대문제: 불평등과 갈등’ 세미나에서 발표한 ‘조국 이슈로 본 한국 사회의 공정성 인식 격차’ 보고서를 보면, 법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나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나 조 전 장관에 대해 ‘부적절한 인사’라고 생각하는 비율이 각각 52%와 49%로 큰 차이가 없었다. 보고서는 이를 “법 집행의 공정성과 관련한 불신이 전사회적이고 전계층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조 전 장관 임명에 대한 태도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고 분석했다.

반면 상대적 박탈감이 클수록 조 전 장관 임명에 부정적 반응을 보인 것으로 조사됐다. 상대적 박탈감 지수가 ‘높음’(14 이상)인 이들은 조 전 장관 임명에 부정적인 평가가 57.2%에 이른 반면, ‘낮음’(11 이하)인 이들은 부정 평가가 44.9%에 그쳤다. 박탈감 지수는 ‘대학 재학 이상’(12.4)보다는 ‘고졸 이하’(13.1) 계층에서, 월 가구소득이 700만원 이상인 최상층(12.0)이나 600만~700만원인 중상층(12.2)보다는 200만원 미만인 저소득층(13.4)이나 200만~300만원인 중하층(13.1)에서 더 컸다. 정 위원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내가 받아야 할 가치나 대접을 못 받게 하는 특권층이나 기득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박탈감의 주요 요인인데, 조 장관이 그쪽에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위원은 이어 “조 전 장관 이슈는 세대나 이념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분열과 학력이나 계층, 소득의 박탈감 이슈가 합쳐진 현상”이라며 “어느 세대의 문제라고 쉽게 진단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재훈 오연서 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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