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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25 17:00 수정 : 2019.10.17 16:28

김병익
문학평론가

사회학과생의 “학우들이여, 우리 친구들이 광화문에서 당하고 있다. 나가자!”란 외침을 앞세우고 일군의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뛰쳐나간 뒤, 라일락이 화사하게 꽃을 피운 교정은 차라리 교교했다. 멀찍이 맞은편 벤치에는 여학생 두어명이 조용히 소곤거리고 있었고 나는 무겁고 우울한 기분에 젖어 멀거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59년 전의 4월19일 오전 10시 즈음. 드디어 나는 버스를 버리고 걸어 돈암동 숙소로 돌아와 몸과 마음이 혼곤에 빠졌고 저녁 라디오에서 중1 때 내 앞줄에 앉았던 사범대생 친구가 총탄에 숨졌다는 뉴스를 들었다.(발표 50년 만에 비로소 단행본으로 출간된 정영현의 <꽃과 제물>은 이 시위 장면들을 실감나게 중계해준다) 5년 뒤 신문사 입사시험에서 ‘그날 왜 데모에 참여하지 않았느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나는 동숭동 캠퍼스로 가는 중 혜화동 로터리에서 시위에 참여하고 돌아오는 동성고 학생들이 한바탕 놀이를 치른 듯 희룽거리던 장면을 회상하고, 혁명이란 이렇게 우스개처럼이 아니라 좀 더 엄숙하게 정색하고 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대답했다.

그 뒤의 나는 거대한 역사란 그처럼 장엄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절뚝거리며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프랑스대혁명이 바스티유 감옥을 깨트렸을 때 죄수는 불과 일곱명이었다는 것, 샌프란시스코의 길바닥에서 노숙자로 뒹굴던 히피들이 68혁명의 전조가 되었음을 알았던 것이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은 그렇게 올 것이었다. 내가 ‘대중문화의 우상’들을 내세워 1970년대의 청년문화론을 편 것은 그 깨우침에서였고, 데모에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를 당당한 ‘4·19세대’로 자부한 것도 그래서였다. 실제로 우리는 자기 세대의 정체성을 자부해도 좋을 첫 세대였고, 김현(문학평론가)의 말대로 일본어로 먼저 말하고 우리말로 번역해 쓰던 선배들과 달리 “우리말로 공부하고 우리글로 읽고 쓰는”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는 언어생활을 한 최초의 모국어 세대였다.

더구나 그들은 경제개발의 주역이 되면서 한국의 근대화와 산업화의 주축 세력이 되었다. 5·16은 일본어 세대가 일으켰지만 그들이 내세운 성장과 공업화의 실제는 60년대에 입사한 한글세대가 그 역군이 되었다. 유학과 취업으로, 파병과 이민으로 미국과 독일로, 월남과 중동으로, 섬과 같은 반도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를 향했고 근면과 열정으로 후진의 농업경제를 벗어나 이론과 기술을 연마하고 자본을 축적해 공업화를 추진하며 우리 사회의 근대화를 주도했다. 이 경제성장에 힘입어 중산층이 형성되고 4·19의 기치였던 자유민주주의의 주축이 될 시민계층이 성숙했다. 5·18과 6·29를 밟고 마침내 1990년대의 문민정부가 수립되면서 사상의 강압 통제는 해제되고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성장을 이루며 4·19세대는 ‘조국 근대화’의 주력이 되었다.

우리 또래는 이렇게 해서 ‘한글-민주화-산업화’의 3중의 과제를 실천한 ‘4·19세대’라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화려한 시호를 얻는다. 미완의 학생혁명을 통해 이 세대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심리적 진화도 이루었다. 미래와 세계에 대한 자신감 획득이었다. 이전의 우리 역사는 동학농민혁명 다음에는 주권 상실,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분단과 전쟁 등 미증유의 비극을 당함으로써 큰 사태 뒤 더 큰 비극을 맞는다는 시대변화의 불행감에 짓눌려왔다. 그러나 4·19세대는 자신들의 행동으로 구세대의 정권을 쓰러트리는 데 성공하고 그 자신감으로 낙관적이고 성취 지향의 역동적인 전망을 얻어냈다. 미지의 미래와 불안의 세계에 대해 비로소 자신감을 일굴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 세대는 한국전쟁이 요구한 희생을 피할 수 있었고 운동권 세대들의 수난을 비켜 갈 수 있는 행운까지 가졌다. 고백한 바 있지만, 나는 부모 세대들의 노고로 대학교육을 받았고 후배들의 열정 덕분에 사유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이 한글-민주화-산업화 세대의 행운과 자부심은 그러나 그들이 은퇴해야 할 1990년대로 들면서 시효가 다하고 있었다. 반세기 동안의 역사 발전 속에서 압축성장을 통해 100달러를 밑돌던 국민소득이 3만달러를 넘어섰고 마이카족의 아파트문화가 대세를 이루었다. 가난한 후진국으로 자학하던 우리는 아득한 마음으로 부러워하던 선진국들과 어느새 어깨를 겨누며 반도체와 중공업, 정보력과 스마트화를 진작시켰다. 대학로 시궁창 냇물을 센강으로 부르던 가난한 감성은 ‘한류’ 붐을 타고 드라마, 영화, 패션, 스포츠, 음식 등 대중문화를 넘어 고급 예술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이제 한국은 경제, 문화, 생활에 이르기까지 선진 사회에 꿀릴 것 없는 세계 10위권의 대국이 되었다.

풍요의 사회에 이르면서 기성의 인식과 전망, 기존의 태도와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소통은 문자로부터 이미지로, 문화는 아날로그 시스템에서 디지털 문명으로, 사회는 다양하고 탈위계적으로, 세계는 가상현실로 대체되고 있다. 젊은 시절의 뜨겁던 민족주의는 세계화로, 자랑스러운 단일민족은 다민족 포용으로, 인문주의는 과학주의로, 3차 산업은 6차 산업을 이끌 4차 산업혁명으로 새 경지를 일구며 옮겨가고 있다. 소련의 해체, 독일의 통일과 함께 우리의 완고한 반공주의도 한반도 평화 체제 지향으로 진전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대를 인류의 낭만시대로 여기던 세계는 이제 근본부터 변한, 달리 인식하고 이해하고 수용해야 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뀐 것이다. 밀레니엄 세대 청년들의 모습은 산업세대와 달리, <더 나은 미래는 쉽게 오지 않는다>의 예르겐 라네르스가 말하듯 “더 많은 소통,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의제들에 대한 더 많은 지지, 더 많은 유연성, 공동체 중시, 더 영적인 성향”으로 변하고 있다.

이에 이르러 스스로 자부해오던 ‘4·19세대의 시효’가 다하고 있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자식에게 컴퓨터를 배우고 손자로부터 스마트폰 용법을 익혀야 하는,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교육의 역류를 경험하면서 과거의 성취를 내세워 호령하는 내 또래들의 ‘세월 모르는’ 완매함이 불편해진다. 60년 전의 자부심 높던 세대가 자존심을 앞세워 반성 없이 여전한 주역으로 착각하고 전날의 반공주의와 성장주의에 물려 여전히 그 위세를 휘두르며 21세기 젊은이들에게 호령하려 든다면 빈 수레의 헛소리로 그 시끄러움만 크게 울릴 것이다. 4·19세대로 자부해오던 나도 이제 아들 세대에게 귀 기울이고 손자 세대에게 손 내밀어 그 새 세대들의 새로운 도전을 돕고 그 후견 노릇으로 자족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아니, 이제 나부터 물러나 입 다물고, 달라진 세계를 다시 바라봐야 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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