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사회학과생의 “학우들이여, 우리 친구들이 광화문에서 당하고 있다. 나가자!”란 외침을 앞세우고 일군의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뛰쳐나간 뒤, 라일락이 화사하게 꽃을 피운 교정은 차라리 교교했다. 멀찍이 맞은편 벤치에는 여학생 두어명이 조용히 소곤거리고 있었고 나는 무겁고 우울한 기분에 젖어 멀거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59년 전의 4월19일 오전 10시 즈음. 드디어 나는 버스를 버리고 걸어 돈암동 숙소로 돌아와 몸과 마음이 혼곤에 빠졌고 저녁 라디오에서 중1 때 내 앞줄에 앉았던 사범대생 친구가 총탄에 숨졌다는 뉴스를 들었다.(발표 50년 만에 비로소 단행본으로 출간된 정영현의 <꽃과 제물>은 이 시위 장면들을 실감나게 중계해준다) 5년 뒤 신문사 입사시험에서 ‘그날 왜 데모에 참여하지 않았느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나는 동숭동 캠퍼스로 가는 중 혜화동 로터리에서 시위에 참여하고 돌아오는 동성고 학생들이 한바탕 놀이를 치른 듯 희룽거리던 장면을 회상하고, 혁명이란 이렇게 우스개처럼이 아니라 좀 더 엄숙하게 정색하고 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대답했다. 그 뒤의 나는 거대한 역사란 그처럼 장엄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절뚝거리며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프랑스대혁명이 바스티유 감옥을 깨트렸을 때 죄수는 불과 일곱명이었다는 것, 샌프란시스코의 길바닥에서 노숙자로 뒹굴던 히피들이 68혁명의 전조가 되었음을 알았던 것이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은 그렇게 올 것이었다. 내가 ‘대중문화의 우상’들을 내세워 1970년대의 청년문화론을 편 것은 그 깨우침에서였고, 데모에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를 당당한 ‘4·19세대’로 자부한 것도 그래서였다. 실제로 우리는 자기 세대의 정체성을 자부해도 좋을 첫 세대였고, 김현(문학평론가)의 말대로 일본어로 먼저 말하고 우리말로 번역해 쓰던 선배들과 달리 “우리말로 공부하고 우리글로 읽고 쓰는”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는 언어생활을 한 최초의 모국어 세대였다.
칼럼 |
[김병익 칼럼] 4·19세대의 시효 |
문학평론가 사회학과생의 “학우들이여, 우리 친구들이 광화문에서 당하고 있다. 나가자!”란 외침을 앞세우고 일군의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뛰쳐나간 뒤, 라일락이 화사하게 꽃을 피운 교정은 차라리 교교했다. 멀찍이 맞은편 벤치에는 여학생 두어명이 조용히 소곤거리고 있었고 나는 무겁고 우울한 기분에 젖어 멀거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59년 전의 4월19일 오전 10시 즈음. 드디어 나는 버스를 버리고 걸어 돈암동 숙소로 돌아와 몸과 마음이 혼곤에 빠졌고 저녁 라디오에서 중1 때 내 앞줄에 앉았던 사범대생 친구가 총탄에 숨졌다는 뉴스를 들었다.(발표 50년 만에 비로소 단행본으로 출간된 정영현의 <꽃과 제물>은 이 시위 장면들을 실감나게 중계해준다) 5년 뒤 신문사 입사시험에서 ‘그날 왜 데모에 참여하지 않았느냐’는 면접관의 질문에, 나는 동숭동 캠퍼스로 가는 중 혜화동 로터리에서 시위에 참여하고 돌아오는 동성고 학생들이 한바탕 놀이를 치른 듯 희룽거리던 장면을 회상하고, 혁명이란 이렇게 우스개처럼이 아니라 좀 더 엄숙하게 정색하고 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대답했다. 그 뒤의 나는 거대한 역사란 그처럼 장엄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절뚝거리며 찾아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프랑스대혁명이 바스티유 감옥을 깨트렸을 때 죄수는 불과 일곱명이었다는 것, 샌프란시스코의 길바닥에서 노숙자로 뒹굴던 히피들이 68혁명의 전조가 되었음을 알았던 것이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은 그렇게 올 것이었다. 내가 ‘대중문화의 우상’들을 내세워 1970년대의 청년문화론을 편 것은 그 깨우침에서였고, 데모에 참여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를 당당한 ‘4·19세대’로 자부한 것도 그래서였다. 실제로 우리는 자기 세대의 정체성을 자부해도 좋을 첫 세대였고, 김현(문학평론가)의 말대로 일본어로 먼저 말하고 우리말로 번역해 쓰던 선배들과 달리 “우리말로 공부하고 우리글로 읽고 쓰는” 기표와 기의가 일치하는 언어생활을 한 최초의 모국어 세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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