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남 통영시 광도면 성동조선해양은 2년이 넘도록 휴업 상태다. 협력업체 직원들이 쓰던 수백개의 컨테이너 사무실도 비어있다. 통영/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
키코사태 11년, 금융의 존재이유를 묻다
15곳중 12곳, 키코로 파산 혹은 매각
중형 선박시장은 일본·중국에 넘어가
성동조선 “무급휴직까지 하며 버텨”
새 주인 못찾아 30일 공개매각 돌입
빅3 조선소 ‘수주량 1위’와 양극화
조선소 재기 기회조차 은행이 ‘발목’
|
경남 통영시 광도면 성동조선해양은 2년이 넘도록 휴업 상태다. 협력업체 직원들이 쓰던 수백개의 컨테이너 사무실도 비어있다. 통영/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
키코(KIKO) 사태가 터진 지 올해로 11년이 흘렀다. 많은 수출 중소기업이 부도와 파산, 자산 매각 등의 피해를 보았다. 가까스로 살아남았으나, 여전히 키코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업도 많다. 반면 여러 중소기업을 상대로 키코라는 ‘괴물’을 판매한 은행들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사이 금융은 시기와 대상을 조금씩 바꿔가며 ‘제2의 키코’ 사태를 여럿 만들어냈다. 1조원대 피해가 예상되는 국외 금리연계 파생결합상품(DLS·DLF) 논란이 대표적이다. 키코의 피해집단이 중소기업이었다면, 이번에는 개인 투자자의 대규모 손실이 예고된다는 점이 거의 유일한 차이다.
은행들이 ‘첨단 금융기법’의 이름으로 중소 제조업을 망가뜨린 과정을 찬찬히 돌아보며 금융의 존재 이유를 묻는 탐사기획 ‘키코 사태, 11년’을 두 차례에 걸쳐 싣는다.
“중형 조선업계의 몰락으로 가장 안타까운 건 이들이 60%를 장악했던 1만~2만톤급 화학제품운반선(케미컬 탱커) 시장이 일본과 중국으로 완전히 넘어가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원래 한국의 21세기조선과 삼호조선, 세광조선, 녹봉조선 등이 주도해온 시장이었거든요.”(양종서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
양 선임연구원이 언급한 21세기조선 등은 지금 모두 문을 닫았다. 5만톤급 화학제품운반선 시장을 지배했던 신아에스비(SB)와 에스피피(SPP)조선도 마찬가지다. 화학제품운반선, 곧 탱커란 알코올과 에틸 등 여러 화학제품 운반에 맞게 설계된 선박을 말한다. 조선업계에서는 1만톤급 이상의 탱커와 벌크선(화물전용선)을 중형으로 분류한다. 1000티이유(TEU) 이상의 컨테이너선과 함께 이들 세 종류의 선박을 3대 중형 선박으로 묶기도 한다. 빼어난 기술 경쟁력을 앞세워 세계 중형 선박 시장을 이끌어온 국내 조선소가 2008년 이후 거의 대부분 몰락했다.
그해 국내 중형 조선업계는 도처에서 찬바람을 맞았다. 위기는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2000년대 초반 조선업의 호황기를 맞아 국내 일부 조선소는 과감한 시설투자와 저가 수주 경쟁에 뛰어들었다. 경남 통영시와 고성군에 여러 중형 조선소가 들어선 시기가 그때다. 이런 경영 방식은 미국발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세계 조선업계가 ‘일감 절벽’에 맞닥뜨렸다. 국내 중형 조선소는 신규 자금의 유입 없이 과거 계약을 맺은 적정가 이하의 선박을 꾸역꾸역 만들 수밖에 없었다. 자금 사정 악화가 뒤따랐다.
국내 조선업계는 여기에 또 하나의 카운터펀치를 맞았다. 바로 키코(KIKO) 사태다. 키코는 2007년부터 국내 은행이 수출 위주의 중소기업을 상대로 판매한 파생상품의 하나다. 원-달러 환율 하락으로 수출 기업의 환차손이 발생할 때를 대비해 국내 은행이 도입·판매했는데, 미국발 금융위기로 환율이 치솟자 외려 이 상품으로 인한 기업 피해가 급증했다.
조선업계에서는 수출 비중이 높아 달러가 많고, 환 헤지나 파생상품에 관한 이해수준은 높지 않았던 중형 조선소가 금융권의 주된 표적이 됐다. 한순흥 카이스트 해양시스템대학원 교수는 “조선업계에는 수주계약에 앞서 금융사의 선수금환급보증(RG·Refund Guarantee)을 받아야 하는데, 이들 조선소가 은행으로부터 아르지를 받으려고 키코에 반강제로 가입하는 일이 많았다”며 “조선소 중 현대중공업이나 삼성중공업 등 대기업 계열사와 달리 수출형 중형 조선소가 주로 키코 피해를 본 것도 이런 관행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아르지란 선주가 조선소에 선수금을 지급할 때, 조선소 부도에 대비해 은행으로부터 받아두는 보증서를 말한다.
<한겨레>가 키코에 가입했던 15개 주요 중형 조선소의 현황을 직접 살피니, 12곳이 이미 파산하거나 매각된 것으로 나타났다. 21세기조선 등 상당수 조선소는 파산했고, 목포조선공업을 비롯한 일부는 법정관리 상태에서 다른 기업에 팔렸다. 9월 기준으로 영업실적을 내고 있는 조선소는 대한조선과 대선조선 두 곳뿐이다. 물론 이 두 곳의 수주량도 2000년대 조선업 호황기와 비교하면 크게 줄었다.
|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15개 중형 조선소가 입은 키코(재무제표에는 파생상품으로 표기) 손실은 막대하다. 키코 피해가 본격적으로 기업 회계에 반영되기 시작한 2008년 이후 3년간 이들 15개 조선소에서 발생한 키코 누적손실은 6조6696억원에 이른다. 금융감독원은 2010년 전체 키코 가입 기업 738곳(이후 919곳으로 증가)의 손실이 3조원 남짓이라고 발표했는데, 중형 조선소 15곳에서만 그 두 배가 넘는 손실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다. 금감원 조사에는 그만큼 빈 구석이 많았다.
성동조선해양은 키코의 직격탄을 맞은 대표적인 중형 조선소다. 2008년까지만 해도 성동조선은 세계 8위(수주잔량 기준)의 조선소로 꼽혔다. 협력업체를 포함해 모두 1만2000명의 노동자가 성동조선에서 일했다.
2000년대 초반 세계 중형 조선업계를 이끌었던 성동조선의 몰락도 키코 사태에서 시작됐다. 금감원 전자공시시스템을 통해 살펴본 성동조선의 키코 손실(2008~2010년)은 약 2조원에 이른다. 성동조선은 연 매출 2조원을 처음 넘긴 2009년까지 3년 연속 두 배 남짓 성장(매출액 기준)을 거듭했으나, 키코 손실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성동조선은 2010년 수출입은행 등 채권단과 자율협약 형태의 워크아웃을 결정한 뒤에도 끝내 정상화의 길로 돌아오지 못했다. 30일 조선업계의 설명을 종합하면, 성동조선은 이날부터 공개 매각 절차에 돌입했다. 벌써 네번째 매각 시도다. 만약 연말까지 새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현재 법정관리 상태인 성동조선은 끝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강기성 금속노조 성동조선지회장은 “현재 500여명의 조합원이 무급휴직까지 하면서 버티고 있는데, 이번에도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남은 조합원 전부가 일자리를 잃게 된다”며 “성동조선의 새 주인만 나타난다면 임금 조건 등 모든 것을 열어놓고 협상할 준비가 돼 있는 만큼 정부와 경남도가 적극적으로 나서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에스피피조선도 마찬가지다. 2002년 설립된 에스피피는 2008년까지 에스피피해양조선과 에스피피해운 등 9개 계열사 및 관계사를 거느릴 만큼 확장을 거듭했다. 2008년 한 해에만 2조원 가까운 매출액(그룹사 연결 매출액 기준)을 기록했다. 전세계 5만톤급 미디엄 레인지(MR) 탱커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하며 세계 10위 조선소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에스피피 역시 조선업 불황과 맞물린 무리한 투자의 대가를 치렀다. 물론 2008년부터 3년에 걸쳐 닥쳐온 2조원대의 키코 손실(에스피피해양조선 포함)이 없었다면 폐업이라는 막다른 선택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
성동조선해양이 2년이 넘도록 조선소를 제대로 가동하지 못하자, 인근 상가도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했다. 통영/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
성동조선 등과 함께 경남 통영에 자리했던 신아에스비와 21세기조선, 삼호조선 등 중형 조선업계의 ‘숨은 강자’도 키코 사태 직후 모두 무너졌다. 적게는 930억여원에서 많게는 약 3800억원의 키코 피해를 본 곳들이다. 21세기와 신아는 각각 2013년과 2015년 파산 절차를 밟았고, 삼호는 2013년 한국야나세라는 업체에 매각됐다. 이들 조선소가 차례로 무너지며 통영 경제까지 휘청거렸다.
이밖에도 세계 중형 탱커 시장의 강자로 군림했던 울산의 세광중공업은 2012년 파산 절차를 밟았다. 전남 목포의 몇몇 중형 조선소도 차례로 문을 닫았다. 씨앤(C&)중공업과 세광조선, 목포조선공업 등이 2009~2017년 파산하거나 다른 기업에 팔렸다.
키코 피해 조선소의 몰락은 국내 중형 조선업계의 침체로 그대로 이어졌다. 한국수출입은행 통계를 보니, 지난해 세계 중형선박 시장에서 국내 중형 조선사가 차지한 점유율(CGT·표준화물 환산톤수 기준)은 4%에 그쳤다. 이는 키코 사태 이전인 2007년(17.7%)에 견줘 4분의 1 수준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중형 조선사의 수주액도 같은 기간 262억1000만달러(2007년)에서 12억1000만달러(2018년)로 급감했다.
국내 전체 조선업 대비 중형 조선업 비중도 크게 줄었다. 지난해 중형 조선소의 수주액은 전체 조선업의 4.5%에 그쳤다. 그 비중이 약 30% 수준(27.5%)까지 올라갔던 2007년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한국의 빅3 조선소가 세계 선박시장에서 지난해 다시 수주량 1위를 기록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조선업에서도 양극화가 뚜렷해진 것이다.
국내 중형 조선산업의 붕괴 덕분에 반사이익을 얻은 곳은 세계 조선시장에서 한국과 경쟁구도를 형성해온 중국과 일본의 조선업계였다. 중국은 정부 차원의 강력한 금융지원을 바탕으로, 일본은 아베 정부 출범 이후 엔저 정책을 무기로 한국의 빈자리를 빠르게 채웠다.
지난해 12월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이 낸 ‘중소 조선산업의 중요성과 발전방안’ 보고서에서는 중형 조선산업이 중요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중형 조선산업은 지역경제를 넘어 기자재산업, 산업 생태계 문제 등 우리나라 조선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좌우할 만큼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한국이 이를 포기하면 (중국과 일본 등) 경쟁국은 중형 시장 장악에 그치지 않고 여기서 획득한 수익을 재투자해 고부가 대형 시장에 끊임없이 도전할 것이며 이미 그런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중형 조선산업을 재건하려면 키코 피해로 무너진 일부 조선소의 재창업 뒷받침이나 경영 안정화가 절실하다. 여기서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또다시 금융이다. 2007~2008년 아르지 발급을 미끼로 많은 조선소에 키코를 판매했던 시중은행이 금융위기 이후에는 아르지 시장에서 아예 철수했기 때문이다. 맑을 때 우산 빌려주고 비올 때 빼앗는 약탈적 금융의 전형적인 행태라는 비판이 나온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키코 피해로 문 닫은 일부 중형 조선소가 간신히 다시 일어서려고 해도 그런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는 것이 금융의 또 다른 문제”라며 “거의 모든 은행이 키코 사태에 관한 ‘원죄’가 있는 만큼, 경쟁력을 갖춘 조선소가 다시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아르지 발급과 금융지원 등으로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또 김 대표는 “정부도 은행이 무원칙하게, 혹은 지나치게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워 아르지 발급을 거절하지 못하도록 조선소 금융지원에 관한 적절한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