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9.23 04:59
수정 : 2019.09.23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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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코와 비슷한 외환파생상품인 ‘탄’으로 피해를 입은 인도 기업인들이 지난 2010년 11월 17일 한국을 방문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스탠다드 차타드, 에이비엔암로, 예스뱅크 등 다국적 은행들이 기업 손실의 60~90%를 부담하는 화해를 했다”고 밝혔다. 키코공동대책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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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코사태 11년, 금융의 존재이유를 묻다
(상)삼각카르텔이 감춘 진실
파생상품 피해 다른 나라는 어떻게
상품구조·홍보방식까지 닮은꼴
“계약서 있다고 설명 의무 줄지 않아”
독일, 이자율 파생상품 고객 손 들어줘
일본선 정부·의회가 적극 화해 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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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코와 비슷한 외환파생상품인 ‘탄’으로 피해를 입은 인도 기업인들이 지난 2010년 11월 17일 한국을 방문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스탠다드 차타드, 에이비엔암로, 예스뱅크 등 다국적 은행들이 기업 손실의 60~90%를 부담하는 화해를 했다”고 밝혔다. 키코공동대책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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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코(KIKO) 사태가 터진 지 올해로 11년이 흘렀다. 많은 수출 중소기업이 부도와 파산, 자산 매각 등의 피해를 보았다. 가까스로 살아남았으나, 여전히 키코 피해에서 벗어나지 못한 기업도 많다. 반면 여러 중소기업을 상대로 키코라는 ‘괴물’을 판매한 은행들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다.
그사이 금융은 시기와 대상을 조금씩 바꿔가며 ‘제2의 키코’ 사태를 여럿 만들어냈다. 1조원대 피해가 예상되는 국외 금리연계 파생결합상품(DLS·DLF) 논란이 대표적이다. 키코의 피해집단이 중소기업이었다면, 이번에는 개인 투자자의 대규모 손실이 예고된다는 점이 거의 유일한 차이다.
은행들이 ‘첨단 금융기법’의 이름으로 중소 제조업을 망가뜨린 과정을 찬찬히 돌아보며 금융의 존재 이유를 묻는 탐사기획 ‘키코 사태, 11년’을 두 차례에 걸쳐 싣는다.
키코와 비슷한 구조의 파생금융상품 분쟁 사건에 대해 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대응했을까. 대부분의 나라가 은행을 사기죄로 처벌하거나 정부와 정치권 등이 나서 화해를 적극적으로 중재했다. 거의 일방적으로 은행 손을 들어주며 수출기업에 책임을 떠넘긴 우리나라와는 전혀 달랐다.
키코와 같은 외환파생상품인 인도의 ‘탄’(TARN)은 판매 시기도 키코와 비슷한 2007~2008년이다. 은행들은 수출기업들이 밀집한 인도 동남쪽 타밀나두주에서 탄을 집중 판매했다. 환율이 내리면 수출기업이 이득을 얻고, 반대로 오르면 손해를 보는 구조도 키코와 같았다. 환율 하락 때 수출기업의 이익은 제한돼 있지만, 환율 상승 때 수출기업이 무제한 책임을 지는 구조라는 점, 상품을 설계할 때 은행이 챙겨가는 중간이윤(마진)을 숨겨 놓고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 ‘제로 코스트’ 상품이라고 선전한 점도 키코와 닮았다.
이에 대해 오리사주 고등법원은 은행들의 사기 혐의를 인정했고, 2011년 인도의 중앙은행인 인도준비은행은 파생상품 관련 지침을 준수하지 않았다며 19개 은행에 많게는 150만루피(우리 돈 약 2500만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이에 따라 은행들은 기업들과 합의를 추진해 적게는 60%에서 많게는 90%까지 피해 기업들의 손실을 떠안았다.
독일과 미국, 이탈리아의 경우 환율이 아닌 이자율을 기초로 한 파생상품이 문제가 됐다. 도이체방크(도이치뱅크)는 2005년 2월 독일 알텐슈타트에 있는 화장지 제조업체 일레 파피어에 앞으로 장단기 금리 간의 차이(스프레드)가 넓어질 것이라며, ‘시엠에스(CMS) 스프레드 래더 스와프’라는 이자율 스와프(교환) 상품을 판매했다. 하지만 금리 스프레드는 오히려 좁혀졌고, 기업은 큰 손실을 봤다. 키코가 풋옵션과 콜옵션을 교환하는 계약이라면, 이 상품은 고정금리와 변동금리를 교환하는 구조로, 교환 대상만 다를 뿐 구조는 같다. 이 사건 소송에서 독일 연방대법원은 도이체방크에 54만1074유로(약 7억3천만원)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은행은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리스크를 의도적으로 구조화했고, 그러한 리스크를 시장에 팔기 위해 비용을 고객에게 부담시켰다”고 밝혔다. 도이체방크는 이익과 비용으로 약 8만유로를 상품 설계에 반영하고 이를 고의로 숨겼다고 대법원은 판단했다.
독일 연방대법원의 울리히 비허스 판사는 불완전판매와 관련해 중요한 메시지를 남겼다. “당신이 시의 단어를 읽을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의 의미를 반드시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이것이 스와프 공식에 똑같이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계약서에 관련 내용이 들어 있다고 해도 은행의 설명 의무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독일 대법원은 영업 비밀이기 때문에 중간이윤(마진)을 공개할 필요가 없다는 은행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칙적으로는 은행들의 말이 맞지만 의도적으로 고객이 손실을 볼 수 있도록 설계한 상품을 판매할 경우에는 이익을 공개해야 한다는 판결이었다.
미국의 경우 비슷한 이자율 스와프 상품 분쟁에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 등이 나서 벌금을 부과했고, 이에 따라 뱅커스트러스트 증권은 기업 손실액의 80% 이상을 배상하는 등 합의를 했다. 이탈리아 밀라노 법원도 밀라노시 정부와 은행들의 이자율 스와프 거래에서 은행들이 1억100만유로(약 1357억원)의 수수료를 숨겼다며 유죄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일본도 은행들이 수출기업을 상대로 환율 파생상품을 불완전판매한 사건이 있었는데 정부와 의회, 은행권이 적극적으로 화해를 중재했다. 기업 손실의 50% 이상을 은행이 부담하도록 한 사례가 많았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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