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11.12 18:15 수정 : 2019.11.13 02:37

11월13일은 전태일이 서울의 평화시장에서 자기 몸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붙여 세상의 빛이 된 날이다. 그 후 이 빛은 꺼진 적이 없다. 하지만 그 영원한 빛의 뜻이 무엇인지는 아직도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세상은 그를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 다시 세상에 왔는데, 세상은 그를 또다시 거부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신성한 존재의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으니, 그는 지금도 끊임없이 이 세계로부터 박해받고 추방됨으로써 다시 이 세계의 한가운데로 돌아오는 것이다.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나타난 것만 보자면 초등학교 졸업장조차 받지 못한 청년의 삶의 태반은 거지와 노숙자의 삶이었다. 그가 남긴 수기와 일기에 따르면 그는 “그늘과 그늘로 옮겨 다니면서 자라온”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생활은 “거칠고, 애통한” 생활, “부(유)한 환경에서 거부당한 생활”이었다. 가난과 절망밖에 아무것도 없는 집을 떠나 남동생을 데리고 가출했다 어디서도 머물 곳을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가, 아버지의 매질을 피해 이번에는 막내 여동생을 업고 가출했다가 그 동생을 끝까지 돌보지 못하고 보육원에 맡기고 마는 열여섯살 소년의 무력하고 비참한 삶에서 우리는 세상의 빛에 어울리는 어떠한 위엄도 발견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비참하고 배고픈 삶이었을 뿐. “나는 왜 이렇게 언제나 배가 고파야 하고 마음이 항상 괴로워야 할까?” 오죽하면 그가 분신 후 숨을 거둘 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배가 고프다”는 것이었을까.

그러나 그의 배고픔은 육신의 배고픔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육신의 배고픔 이상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배고픔이요, 괴로움이었다. 그 순결한 영혼이 타락한 세상에서 겪어야 했던 절망적인 괴로움을 생각할 때마다, 나도 반역의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보에티우스처럼 묻고 싶어진다. 신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죄 없는 어린 소년을 그렇게도 비참한 고통 속에 빠뜨릴 수 있는가? 하지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가난한 소년의 마음속에 기적처럼 뿌리내린 그 무한한 사랑의 씨앗은 또 어디에서 왔는가? 그 측량할 수 없는 존재의 신비를 나는 모른다. 까닭이 무엇이든, 신은 자기의 아들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세상의 빛으로 밝히기 위해 17년 동안 그를 고통과 절망의 용광로 속에서 정화시켰다. 그리고 때가 찼을 때, 하늘의 아버지는 땅의 아들을 동대문 평화시장으로 인도했다. 그의 나이 열일곱이 되던 해 가을이었다.

그렇게 들어간 평화시장에서 그가 본 것은 자기보다 어린 소녀들이 겪는 고통이었다. 당시 평화시장은 “2만여명을 넘는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연령 18세의 여성”이었다. 대부분 남성인 재단사들을 제외하면 미싱사와 미싱보조 그리고 시다들이 모두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2만여명 중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연령 15세의 어린이들”이었다. 그런 어린 소녀들이 하루에 짜장면 한 그릇 값이 될까 말까 한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1일 16시간의 작업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그런 현실 앞에서 그는 이렇게 결심한다.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인간적인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주목하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누구도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않았다. “총칼이 되기보다는 사랑을”! 이것이 그의 신조였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모든 유무형의 (존재들 가운데) 으뜸”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 결심으로 그의 운명도 결정되었다. 불의한 세계에서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으리라 결심한 영혼에게 박해와 추방 외에 어떤 다른 운명이 허락될 수 있었겠는가. 성실하게 노동하여 시다에서 금세 미싱사가 되었던 그는 종업원들 가운데서는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재단사가 되어 어린 소녀들을 보호하겠다는 일념으로 월급이 절반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감수하고 재단사 보조로 재취업해 들어갔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집에 갈 차비로 배고픈 소녀들에게 붕어빵을 사 먹인 뒤에 청계천에서 도봉산 기슭까지 서너 시간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가다가 통금에 걸리면 미아리 파출소에서 자고 갔다. 감히 흉내 내기 어려운 끔찍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했다. 全泰一: 전체와 크게 하나인 자. 그러나 이 겸손한 기독 청년은 전체와 하나인 자는 오직 “하나님”뿐임을 깨닫고 자신의 이름의 마지막 자인 하나 일(一) 자를 “합칠 일(壹) 자”로 스스로 고쳤다. 하늘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그 자체로 하나이면서 전체이다. 그러나 땅 위의 아들은 분열된 현실 속에서 오직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랑 때문에 그는 미움과 폭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조금씩 밀려났다. 처음에는 어린 여공들에게 너무 부드럽게 대한다는 이유 때문에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다시 찾아들어간 곳에서는 생각 없이 착취당하고 사는 동료 노동자들을 깨우친 죄로 또 해고되었다. 그렇게 어디에도 갈 곳이 없게 되었을 때, 그는 삼각산 기도원의 교회 공사장 인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마지막으로 기도했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산에서 내려온 지 몇달 뒤, 무고한 생명을 위해 그가 다시 한번 쏟았던 모든 노력이 좌절된 뒤에 그는 자기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꺼지지 않는 영원한 불꽃이 되었다.

그렇게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타인의 고통에 응답함으로써 그는 우리가 땅 위에서 이루어야 할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 보였다. 그리고 그 이후 한국의 현대사는 그가 열어 보인 길을 따라 걸어온 길이었다. 하지만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는 예수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가 밝힌 빛을 애써 멀리해온 곳이 대구였다. 박정희 귀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박정희가 아니라 전태일이야말로 친가와 외가가 모두 대구였던 토종 대구사람이다. 1948년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난 그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열다섯 되던 해 대구에서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 고향에서 그는 죽어서도 버림받았던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역사의 신비여, 그런 대구에서 올봄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이 창립되어, 청옥고등공민학교 시절 전태일이 세 들어 살던 집을 매입하여 기념관으로 만들자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죽었던 대구가 부활한 것이다! 대구에서 우리에게 도래한 빛이 지금까지 우리의 앞길을 밝혔듯이, 다시 대구에서 부활한 그 빛이 세상을 더 따뜻하게 비추어 주리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후원계좌: 대구은행, 504-10-351220-9,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

김상봉 ㅣ 전남대 철학과 교수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김상봉, 씨알의 철학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