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27 04:59
수정 : 2019.09.0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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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학원가에서 여름방학을 보내는 학생들이 이용하는 고시텔(레지던스) 모습.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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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여름이면 5천여명씩 몰려
아이들 머무는 숙소 천차만별
“원룸 월세 방학 때 2∼3배 치솟아”
기숙학사에서는 10분 단위 통제
“못버티고 나가는 아이들 많아”
호텔에서 강사진이 함께 숙식
1600만원짜리 고액캠프도 열려
“호텔이 감옥처럼 느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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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학원가에서 여름방학을 보내는 학생들이 이용하는 고시텔(레지던스) 모습.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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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여름이 되면 유난히 앳된 얼굴의 자취생들이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를 배회한다. 국외 조기유학을 떠났다가 방학 특강을 듣기 위해 잠시 한국을 찾은 학생들이다. 이런 학생들을 대치동에서는 ‘리터니’ 또는 ‘일시귀국생’이라고 부른다. 이들의 최종 진학 목표는 국외 대학이 아니라 한국 대학의 재외국민 전형이다. 국외 체류 3년 이상이면 자격이 생기는 이 전형에서는 에스에이티(SAT·미국 대학입학자격시험) 점수가 등락을 좌우한다. 이들을 위한 단기 속성과정이 생긴 것은 2010년 무렵이라고 학원가에선 말한다.
<한겨레>는 지난 두 달 동안 리터니들을 직접 만나 일상을 따라가 봤다. 형편에 따라 어떤 중학생은 고시원에, 어떤 초등학생은 호텔에서 생활한다. 편의점에서 홀로 끼니를 때우고 어두운 자취방으로 귀가하는 이들의 모습은 이곳에서 흔한 풍경이다. 변질한 입시제도와 불법 사교육 시장, 학부모의 욕망이라는 트라이앵글이 리터니를 양산하는 엔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3회에 걸쳐 그 실태를 파헤친다.
“방학만 되면 전세계에서 몰려와요. 아르헨티나부터 아이슬란드까지. 초등학생도 와요.”
지난 6월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만난 한 기숙학사 실장 ㄱ씨는 이렇게 말하며 수첩을 펼쳐 들었다. ‘입사 대기자 목록’이라는 제목 아래에는 세계 각국 국제학교 학생들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ㄱ씨는 “처음에는 학부모들이 애를 값싼 고시원에 보낸다. 그런데 에어컨도 잘 틀어주지 않고 방음도 안 되니까 애들이 한두달 살아보고 진절머리를 낸다”며 “그때부터는 돈을 더 주더라도 학사로 보내거나 아예 호텔에서 장기 투숙을 시킨다”고 설명했다. 이곳 학사의 월세는 120만원인데 주변 원룸에 비하면 싼 편이라고 한다. 실장은 “입사 경쟁률이 30~40 대 1 수준”이라고 했다.
매년 리터니 5천명 이상 온다
사교육 업계는 매해 여름 최소 5천여명의 리터니가 대치동을 중심으로 한 강남 학원가를 찾는다고 추정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국내 대학들의 재외국민·외국인 전형 모집 인원도 5천명쯤 된다. 대치동의 한 학원 원장은 “‘사교육만큼은 한국이 최고’라는 믿음은 단 8주짜리 특강을 듣기 위해 바다도 건너게 한다. 선릉역 부근 학원에만 2천~3천명의 학생이 온다”고 말했다. 외국으로 떠났던 조기유학생들이 여름 동안 한국으로 ‘재유학’을 오는 역설적인 현상이다.
‘리터니’(Returnee·돌아온 사람)라는 이름에는 외국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국내 대학으로 돌아온다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여름을 앞둔 리터니들의 최대 관심사는 방학 동안 다닐 에스에이티(SAT) 학원이다. 국내 주요 대학들이 재외국민 전형에서 에스에이티 점수를 주요 평가 요소로 삼기 때문이다. 대치동과 압구정동에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에스에이티 전문 학원들이 포진해 있다.
리터니들이 대치동에서 보내는 여름은 언뜻 드라마 <스카이캐슬>을 연상하게 한다. 에스에이티 학원의 8주 수강료는 900만~1300만원 선이다. 사립대 한 학기 등록금 수준인데 해마다 오르는 추세다. 학원들은 “하버드·엠아이티(MIT) 출신 선생님이 강의한다” “이 학원에서는 누구나 에스에이티 고득점을 할 수 있다”고 경쟁적으로 홍보한다. 지난해까지 자녀를 에스에이티 학원에 보낸 한 학부모는 “선생님들 스펙을 보고 있으면 마치 외국 명문 사립학교를 대치동에 옮겨다 놓은 것 같은 착각마저 들더라”고 말했다.
대치동 버전의 ‘지옥고’
학원 밖에서는 이질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기업이나 정부기관 국외 주재원의 자녀들인 리터니들은 한국에 부모와 거처가 없다. 그래서 대부분 대치동 가까이에서 2개월간 살 곳을 얻는다. 고시원부터 호텔, 기숙학사와 하숙까지, 리터니들의 숙소는 형편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특히 적지 않은 학생들이 반지하 월세방이나 고시원 같은 열악한 주거 환경으로 내몰린다. 부동산업자들은 이를 두고 대치동 버전의 ‘지옥고’(지하방·옥탑방·고시원)라고 부른다. 그렇지 않아도 비싼 이곳의 부동산 시세는 여름방학 특수를 맞아 갑절 이상 치솟는다. 원룸 월세는 100만원대에서 시작하고, 좀 더 깔끔한 곳은 200만원 이상으로 오르기도 한다. 대치동의 한 부동산 공인중개사는 “단기 계약이라는 이유로 원래 시세보다 2~3배 더 높게 받는 것인데 그마저도 경쟁이 치열해서 공실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여름에 대치동에서 월세가 50만원 이하인 곳은 ‘레지던스’뿐이다. 이곳에서 레지던스는 흔히 떠올리는 호텔식 숙박시설이 아니다. 낡고 좁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3평짜리 방들이 마주 보고 있는 레지던스 내부 풍경은 영락없는 고시원이다. 구청에도 고시원으로 신고돼 있다. 레지던스를 운영하는 ㄴ씨는 “엄마들이 애를 ‘고시원’에 맡긴다고 하면 아무래도 거부감이 있다 보니까 이름을 보통 그렇게 한다”고 설명했다.
반지하나 하숙집에 가는 학생들도 있다. 중학생 때 반지하 월세방에 살았던 한 학생은 “어두운 방에 혼자 들어가는 게 싫어서 밤늦게까지 편의점이나 피시방에 있다가 갔다. 방에서 거미랑 지네도 나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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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에이티 학원들의 추천 숙소 목록에 올라와 있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기숙학사 외부 전경.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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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나팔 울리는 ‘군대식’ 기숙학사
리터니들이 고시원보다 더 꺼리는 곳이 있다. 바로 기숙학사다. 대치동의 학사들은 새벽부터 취침 때까지 학생들의 24시간을 통제한다. “군대나 다를 바 없다”는 말도 나온다.
ㄷ학사는 새벽 6시30분에 각방 스피커를 통해 군대 기상나팔 소리를 내보낸다. 이곳에선 이를 ‘아침 점호’라고 부른다. 일일이 인원수를 점검하는 건 아니지만 이때부터 학생들의 시간은 10분 단위로 관리된다. 6시40분에는 아침 식사 안내 방송이, 50분에는 국민체조 방송이 울려 퍼진다. 7시40분까지는 모두 아침 식사를 마쳐야 한다. 밥을 먹으러 나오지 않으면 실장이 직접 방으로 찾아간다.
시간 관리는 잠잘 때까지 이어진다. 현관에 출입카드를 찍으면 부모에게 문자메시지가 전송된다. 하루라도 학원에 지각하거나 귀가가 늦으면 부모들이 바로 알 수 있는 구조다. 밤 11시부터는 출입이 통제되고, 와이파이도 끊긴다. 11시30분 조용한 음악이 취침 시각을 알리면 고단한 하루가 끝난다. 시간을 막론하고 방이나 복도에서는 하품도 크게 하면 안 된다. 학사는 부모와 통화할 때도 계단에서 하도록 안내한다.
이런 통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엇나가는 리터니도 적지 않다. 이곳 실장은 “한 학생은 일주일 만에 못하겠다고 나가더라. 10명 중 8명은 차라리 고시원에 가겠다고 말한다”고 했다.
3~4성급 호텔에서 ‘기숙학원’ 차리기도
호텔에서 장기 투숙하는 리터니들도 있다. 일부 에스에이티 학원은 재원생들에게 특정 호텔의 제휴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원장이 같은 호텔에서 숙식하면서 저녁 시간 자습을 지도하거나 과외를 해주기도 한다.
아예 기숙학원의 형태를 띠는 경우도 있다. 3~4성급 호텔에서 강사진과 학생이 함께 숙식하고 등하원도 같이 하는 방식이다. ㄹ학원은 이번에 서초동의 한 호텔에서 ‘여름방학 생활관리형 캠프’를 열었다. 일주일에 약 200만원씩, 8주 과정에 1600만원짜리 고액 캠프다. 아침 7시부터 밤 11시까지 하루 전체가 1시간 단위로 통제된다는 점에서는 학사와 다를 바 없다. 홍보 자료에는 “학생 개개인을 24시간 실시간 모니터링한다”는 문구도 등장한다. 이런 기숙캠프에 참가한 경험이 있다는 한 학생은 “처음에는 호텔이라고 해서 좋았는데 나중에는 다른 데보다 더 힘들었다. 호텔이 감옥처럼 느껴지더라”고 말했다.
이재연 기자
ja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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