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2.23 20:16
수정 : 2019.12.24 14:10
연재ㅣ왕용샘의 ‘학교도서관에서 생긴 일’
독서토론 수업은 학생, 교사 모두에게 어렵습니다. 깊이 있는 이야기는커녕 모든 학생이 한 번씩 입을 열고 의견을 표현하는 일조차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딜레마 상황을 연구하고 반전을 주는 자료를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딜레마 상황은 많은 학생이 말을 꺼내기가 쉬워지기 때문에 효과가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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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토론 수업에서 딜레마 상황은 많은 학생이 말 꺼내기가 쉬워지기 때문에 효과가 좋다. 이번 수업에서는 학생들에게 ‘죽음과 실패’라는 두려운 결정 상황을 제시한 셈이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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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업에는 모든 학생이 의견을 입말로 표현했고, 토론을 마무리하자는 시그널 후에도 거침없이 생각을 말하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정재승 교수의 <열두 발자국> 중 ‘결정장애’ 부분을 읽고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결정장애’라는 단어는 책의 표현을 그대로 옮긴 것임을 밝힙니다.)
수능시험 당일이다. 1교시가 시작되기 전 핸드폰을 제출해야 한다. 핸드폰을 제출하기 전 문자를 본다. 엄마의 문자였다. “딸, 이 문자를 보는 건 시험이 다 끝났을 때겠지? 방금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시길 아버지는 오전을 넘기긴 어려울 것 같다는구나. 시험 끝나면 바로 병원으로 오렴. 사랑하는 우리 딸.” 몇 주 전, 공사장에서 일하시던 아버지가 추락하여 머리와 다리를 크게 다치셨다. 수술이 잘 끝났고 경과를 지켜보자고 하셨다.
# 질문 1. 위와 같은 상황이 내게 벌어진다면, 나의 선택은? (단, 내가 진학 예정인 대학은 수능 최저 2등급이 2과목 이상인 소위 말하는 상위권 대학임.)
# 질문 2. 모둠원과 토론하여 4명이 하나의 선택을 한다면?
상황이 다소 유치해 보이지만, 학생들은 이 상황에 진지하게 임했습니다. <열두 발자국>에서는 한국인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로 사회적 안전망의 부족,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 등 여러 원인을 제시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죽음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상황을 제시한 셈이지요.
학생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3:1 정도로 더 많은 학생이 아빠가 계시는 병원에 가는 선택을 했습니다. 아빠와의 마지막 시간이라는 점, 시험에 집중하기도 어렵다는 점, 시험은 또 볼 수 있다는 이유를 제시했습니다. 반대편에서는 내가 시험을 보는 게 아빠 마음의 짐을 덜어드린다는 점, 재수를 선택했을 때 엄마의 경제적인 부담이 큰 점 등의 근거를 들었지요.
토론이 끝나기 전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이 아빠라면 어떤 선택을 응원할까요?” 학생들은 처음과는 반대인 1:3 비율로 더 많은 학생이 시험 치르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사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저는 학생들이 수능시험을 택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무릎딱지>라는 그림책을 읽어주려고 했지요. 그림책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합니다. 엄마를 잃고 엄마 냄새를 잃지 않게 노력하는, 상처가 나면 엄마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엄마 목소리를 듣고 싶어 상처를 계속 만드는 어린아이가 등장합니다. 갈수록 커지는 그리움, 할머니의 등장으로 가슴 깊숙한 곳에 엄마와 함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편안하게 잠을 자는 모습으로 끝나는 그림책입니다. 계획과는 달랐지만 그림책을 읽어주었습니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읽어준다면 감정을 배출하기 딱 좋은 책입니다. 실제 학생들도 많은 생각을 했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학생들이 수능시험을 선택하고 나면 죽음이 주는 아픔, 공허함, 슬픔, 슬픔을 견디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그림책으로 인사이트를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재승 교수가 말하듯 ‘죽음’은 결정의 무게와 판단을 올바르고 빠르게 도울 수 있음을 이 토론이 증명하였습니다.
“정말 소중한 일들에 집중하게 되고, 주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고, 선택의 무게도 훨씬 가벼워집니다. ‘내가 눈 감을 때 무슨 후회가 들까’를 생각해보면 절실함 혹은 진정성이 커질 테고요. 그런 면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절대 불길하거나 우울한 것이 아니에요. 결국 삶을 살아내는 데 도움이 되지요.” (<열두 발자국> 중에서)
황왕용 광양백운고 사서 교사, <학교도서관 활용 수업: 중·고등> 공저자
※ 왕용샘의 ‘학교도서관에서 생긴 일’ 연재를 마칩니다. 황왕용 선생님과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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