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20 18:34
수정 : 2019.08.20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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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_김승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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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독립, 상생 협력이 답이다]
③ 일 생태계는 무엇이 달랐나
일 반도체 등 경쟁력 잃었지만
소재·부품·장비 중소기업들은
대기업과 상호협력하며 기술 혁신
히타치 화성, 산요와 사전구매 확약
TOK·JSR은 삼성·SK·인텔과 거래
산업구조도 수직형→그물형으로
한국은 20년간 전략 수정에 실패
국산화 저조·대기업 전속거래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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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_김승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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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1990년대 중반부터 경제 활력이 대폭 낮아지는 ‘잃어버린 20년’을 보냈다. 1980년대 들어 미국 기업들을 제치고 세계 시장을 재편한 반도체 대기업들도 불과 10년 만에 한국 기업들에 뒤처졌다. 그러나 후방 산업에 속하는 소재·부품·장비 분야 중소기업들은 경쟁력을 잃지 않고 살아남아 기술 혁신을 이어왔다. 이런 일본 중소기업들이 일본 경제가 저점을 지나 침체를 탈출하는 데 핵심 동력이 되고 있다는 평가도 많다. 대기업 한곳이 무너지면 전후방 중소기업과 이들을 품은 지역 경제마저 주저앉는 한국과 대조적이다. 일본은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흔히 일본 경제를 ‘모노즈쿠리 경제’라고 부른다. 모노즈쿠리란 ‘물건을 만들다’라는 뜻의 일본어다. 일본 사회 특유의 장인 정신을 상징하는 단어이자, 기술 수준을 세계적으로 높임으로써 성장해온 일본 경제·산업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으로도 쓰인다. 다용도 소재인 ‘등방성 흑연’의 선두주자인 일본 기업 ‘도요탄소’가 스스로를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초하이테크 도예가 집단”으로 자랑스럽게 정의한 데서 볼 수 있듯, 일본 경제는 기술에 천착했다. 도레이가 2010년대 초반 보잉 비행기 구조재에 채택된 탄소섬유를 개발하는 데 쏟은 시간만 40년에 가깝다. 탄소섬유는 최근 한국에 대해 수출규제를 강화한 일본이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다음 ‘타깃’으로 삼을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소재다.
일본 산업의 이런 특성은 양면성을 지닌다. 전문가들은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며 일본의 가전, 휴대폰, 반도체 대기업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잃은 이유 중 하나로 ‘고사양 기술에 대한 집착’을 짚는다. 세계 정보통신기술(ICT) 시장이 빠른 속도로 ‘글로벌 분업 체계’를 갖추며 제품을 표준화하고 있는데도, 일본 기업들은 독자적인 최고급 제품을 만들어내는 데 치중하다 선두주자 자리를 빼앗겼다는 설명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2011년 일본 제조업 실태를 분석한 보고서에서 “인텔은 1990년대 들어 대만 기업들을 편입시킨 국제적 수평 분업체제를 완성했지만 일본 기업들은 이런 국제분업 질서에 편승하지 못한 채 전통적인 사업모델인 폐쇄적 수직통합형 비즈니스 모델을 고수했다”고 지적했다.
한편으로 모노즈쿠리 경제 속에서 대기업과 함께 기술 수준을 키운 일본의 소재·부품·장비 분야 중소기업들은 살아남아 지금도 글로벌 분업 체계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는 비록 산업구조의 형식은 수직적이고 폐쇄적이었을지언정, 대-중소기업 간 관계의 실질은 비교적 수평적이고 상호 협력적이었기 때문이란 설명이 많다. 김규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선진경제실장은 “일본의 전자산업도 수직계열화돼 있었지만 현재 우리와 같은 형태는 아니었다. 자본 관계에서 수직화되어 있었던 것이고, 기업활동 측면을 보면 수평적인 협력이 이뤄진 점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주요 소재·부품·장비 분야 기업들의 실제 활동 양식을 봐도 차이점이 나타난다. 일본의 히타치화성의 경우 수요 기업인 산요와 기술개발 협력과 사전 구매 확약을 체결한 덕에 이차전지 음극재 분야 선두업체로 부상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많다. 일본의 반도체 소재 선두기업 티오케이(TOK)와 제이에스아르(JSR), 신에쓰화학 등은 일본전기주식회사(NEC)는 물론이고 한국의 삼성전자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 인텔 등 글로벌 고객 전반과 거래한다. 한국의 소재 기업들이 특정 회사와 계약을 맺으면 정해진 기간 전속거래를 요구받아 거래처를 늘리지 못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반도체 장비 분야의 한 중소기업 임원은 “한국 대기업들이 일본 공급사를 상대로는 단가 깎기, 전속거래 요구 등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 업계의 공공연한 상식”이라며 “국내에서도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기술투자 여력이 늘어나긴 어렵다”고 말했다.
일본의 수요-공급 기업 간 자유롭고 긴밀한 협력은 일찌감치 자리잡은 부품·소재·가공산업 클러스터들에서 더 활발히 이뤄졌다. 규슈지방의 ‘실리콘 아일랜드’, 나가노·야마나시 지역의 정밀가공산업 클러스터, 미에의 ‘크리스털 밸리’ 등이 대표적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2004년 내놓은 ‘신성장 창조전략’을 보면, 일본의 최종 조립 기업들이 경쟁력을 잃자 부품·소재·장비 기업들은 한국·대만 등 국외 기업들과 거래 관계를 경쟁적으로 확대했다. 이에 따라 조립 대기업과 하청 중소기업의 거래는 다면적으로 바뀌었고 산업구조 역시 기존 수직통합형 계열에서 복잡한 네트워크를 갖춘 ‘그물형’으로 변화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이런 생태계 혁신에 리스크가 크더라도 연구개발을 꾸준히 정책적으로 지원하는 기존의 ‘모노즈쿠리’식 지원을 덧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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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본 산업 생태계 혁신과 경제 정책은 과거에도 이미 여러 차례 한국에 ‘배울 거리’로 전해졌다. 산업연구원은 2008년 낸 ‘일본의 경기회복을 뒷받침하는 소재부문의 경쟁력 요인과 시사점’ 보고서에서 “한국에서도 오래전부터 대-중소기업 간 상생·협력 사업을 정부 주도로 추진하고 있지만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본과 같이 신소재 개발 단계에서부터 수요자인 조립 대기업이 참여하여 공동으로 개발하지 않는 데 큰 원인이 있다. 개발 단계부터 대기업이 참여하고, 생산된 제품을 수요 기업이 안정적으로 구입하는 ‘수요 기업 지향형’ 분업 시스템 도입이 필요하다”고 짚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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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지난 20년간 ‘전략 수정’에 실패했다. 현재 반도체 분야 소재 등 자체조달률은 27%, 디스플레이는 45%에 그친다.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이 2017년 낸 ‘반도체 미세화를 위한 반도체 공정장비 기술’ 보고서를 보면, 웨이퍼에 회로 모양을 그리는 노광장비는 국내 기술 수준이 미국·유럽·일본 대비 10%이고 국산화율은 0%다. 불순물을 침투시켜 소자 특성을 만드는 이온주입 장비도 국내 기술 수준은 20%, 국산화율은 0%다. 중소기업 자체 생존력 향상의 ‘장애물’로 지목되는 전속거래 관행도 그대로다. 김 실장은 “수요 기업이 기술개발 초기부터 공급 기업과 긴밀하고 수평적인 협력 관계를 맺는 점을 일본에서 배워야 한다”고 했다.
최하얀 신다은 기자
ch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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