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20.01.04 13:48 수정 : 2020.01.05 10:29

보조 출연을 하게 됐습니다. 제 데뷔작 <아만자>가 드라마로 제작되는데 감독에게 부탁해 5초 정도 출연하기로 한 것입니다. 촬영은 강화도의 한 병원에서 진행됐는데, 촬영시간을 착각해 너무 일찍 도착해 버렸습니다. 배가 고파 둘러보니 마침 길 건너 빵집이 있었습니다. 프랜차이즈가 아닌 평범한 빵집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동네에 있던 ‘독일제과’가 떠오르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가, 빵은 수수하다 못해 살짝 촌스러웠습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빵은 은박 접시 위에 가득 담겨있던 덩어리 빵이었습니다. 되는대로 빵 반죽을 퍼 담아 오븐에 구운 듯 전혀 꾸밈이 없는 꼴이었는데, 표면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찹쌀떡이 4개 떡하니 올라가 있었습니다.

“이 빵은 이름이 뭐예요?” 점원에게 물었습니다. 도넛을 포장하고 있던 점원은 힐끗 빵을 본 뒤 “몰라요”라고 답했습니다. 태연한 그 모습에 ‘그렇구나’ 하며 넘어갈 뻔했지만, 그래도 궁금했습니다. “이게 무슨 빵이에요?” 다시 한 번 묻는 저에게 점원은 답했습니다.

“아무렇게나 만든 빵이에요.”

두서없는 한해였습니다.

4권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뭐하나 제대로 팔리지는 않았습니다. 3~4군데에 수필을 연재했지만, 역시나 뭐하나 제대로 읽히진 못했습니다. 다양한 의뢰를 받아 많은 만화를 그렸으나 “작가님 이제 은퇴하셨나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았습니다. 줄기차게 책을 출간해서인지 강연 요청이 많은 해였는데, 어디를 가든 여전히 저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자기소개만 1시간씩 걸렸습니다. 대미를 장식한 것은 며칠 전 한 기관과 진행했던 사업 결과 보고였습니다. 기관장은 “제가 그려도 이거는 그릴 수 있을 것 같거든요?”라는 말을 했습니다. 웃으며 흘려들었으나 참, 가슴이 답답한 순간이었습니다.

바쁘게 1년간 일을 했음에도 점점 더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급기야는 일도 내팽개치고 보조 출연을 하기 위해 이곳에 와서 빵이나 사고 있다니.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무렇게나 만들어 이름도 없다는 빵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저를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나 주세요.” 점원은 일을 멈추고 다가와 빵을 집어 들어 포장했습니다. “잘 팔리나요?” 제가 묻자 “그럭저럭 팔리긴 해요”라고 점원은 말했습니다. “맛이 있나 보죠?” 자꾸만 귀찮게 묻는 저를 보며 점원은 답했습니다. “없지는 않아요.”

가게를 나와 봉지를 열고 빵을 맛봤습니다. 점원의 말대로 아무렇게나 만들었기 때문인지 빵의 식감이 오묘했습니다. 떡 같기도 하고 빵 같기도 하면서 케이크 같기도 했습니다. 맛도 식빵과 파운드 케이크, 소보로빵의 맛이 함께 났습니다. 입안에서는 찹쌀떡과 대추와 팥과 초콜릿이 함께 씹혔습니다. 전날 남은 빵 반죽과 재료를 모두 때려 넣고 만든 것인 듯했습니다.

잠시 후 촬영이 시작되었습니다. 촬영장엔 수십명의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한쪽에 준비된 병상에 환자복을 입은 채 누워있었습니다. 주인공의 옆을 5초 정도 스치는 환자 역할이었기 때문입니다. 드러누워 있기만 하면 된다고, 얼굴도 나오지 않는다고 감독은 말했습니다. 태평하게 누워 눈을 감은 채 아까 먹은 빵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엉망진창이지만 나쁘지 않은 맛이었습니다. 뭐라고 이름 붙이기는 영 애매하지만, 또한 굳이 뭐라고 이름 붙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슛!” 감독은 외쳤습니다. 2020년은 어떻게 될까요?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당장의 연기에 집중해 보는 수밖에요.

김보통(만화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ESC: 김보통의 해 봤습니다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