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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8.21 20:20 수정 : 2019.08.21 20:38

김보통의 해 봤습니다

사람들과 잘 교류하지 않습니다. 같이 일하는 직원이나 가족 외에 얼굴을 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손에 꼽습니다. 특별히 인간관계를 싫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원하지 않는 쪽에 가깝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고, 실제 그 사회 한복판에 살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고립감을 느낍니다. 이상한 얘기지만, 그 고립감을 좋아합니다. 거리를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이 나와 연관이 없다는 사실이 저를 평안하게 합니다.

그런 평화로운 어느 날 저녁, 문자가 왔습니다. “다음 주쯤 저녁 모임을 할까 하는데, 참석 가능하실까요?” 대개의 경우 핑계를 대며 거절합니다. 그러나 발신인이 작업실 건물주였습니다. 저는 답문을 보냈습니다. “기대되네요. 오늘부터 굶겠습니다.”

약속한 날이 되어 작업실 건물 4층에 있는 건축사무소에 7명의 사람이 모였습니다. 반지하에 있는 와인바 ‘에스엠엘’(S,M,L)의 공동 운영자 세 명(키 순서대로 ‘스몰, 미디엄, 라지’인가 싶었습니다)과 1층에 있는 서점인 ‘번역가의 서재’의 번역가, 2층에 있는 저, 그리고 3, 4층을 사용하는 건축가 둘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다들 서로 친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장 마지막에 입주한 탓도 있겠으나, 한 달 넘게 생활하면서도 오가며 인사만 할 뿐 자기 구멍 속에 틀어박혀 사는 맛조개처럼 작업실에만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에스엠엘은 무슨 뜻인가요?”

뭐라도 떠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다급히 물었습니다. “유명한 건축가가 쓴 책의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셋 중 ‘라지’일 거라고 짐작했던 분이 답했습니다. “작가님은 왜 ‘김보통’인가요?” 그가 물었습니다. “사실 별 이유는 없는데, 물어보는 사람이 많아서 지어내다 보니 한 열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라고 답하니 다들 “하하하” 웃었습니다. 번역가 분은 원래 동시 통역사였다고 했습니다. “동시통역이라는 게 순발력도 필요하지만, 목을 많이 쓰는 거라 힘들었어요. 그래서 번역을 하게 되었고, 이렇게 서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잠시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얼마나 맛깔나게 음식을 묘사하는가에 관해 이야기를 했으나 그의 책을 마지막으로 읽은 게 이십년 전이라 할 말이 없어 잠자코 앉아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인테리어 쪽에서 일을 시작했었는데, 에이전시가 40%나 떼어간다는 걸 알고 독립했습니다. 그런데 사업자로 등록하고 나니 세금이 40%더라고요.” 활짝 웃으며 말하는 건축가의 말엔 같은 자영업자로서 눈시울이 시큰해졌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네 병의 와인을 따 세 병 정도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이런 자리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누군가 말했습니다. 저마다 좋다고 답했습니다. 나쁘지 않다고 저도 생각했지만,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너무나 오랜 기간 저만의 구멍 속에서 살아온 탓일 겁니다. 앞으로도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 성향이 바뀌고 말고를 떠나 다들 사는 것이 바빠 ‘이런 자리’를 다시 갖기는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요. 그리하여 내일도 우리는 오가며 인사를 하는 것이 고작인 날들을 보내겠지만 적어도 서로가 누구인지는 알 게 되었으니 조금씩은 저마다의 건투를 빌 수는 있겠지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생각할 수 있으나,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스치건만 안부를 물을 이 하나 없던 어제와는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글·그림 김보통(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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