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10.26 10:17
수정 : 2019.10.26 10:18
|
베를린 ‘페미니즘 아카이브’(FFBIZ)가 자리잡은 건물 모습. 1977년 베를린 ‘여성 콘퍼런스’에서 시작된 여성운동사에 대한 인식은 1980년 도서관 건립으로 결실을 맺었고, 2003년 현재의 건물로 이전했다. 채혜원 제공
|
[토요판] 채혜원의 베를린 다이어리 ⑧페미니즘 아카이브(FFBIZ)
|
베를린 ‘페미니즘 아카이브’(FFBIZ)가 자리잡은 건물 모습. 1977년 베를린 ‘여성 콘퍼런스’에서 시작된 여성운동사에 대한 인식은 1980년 도서관 건립으로 결실을 맺었고, 2003년 현재의 건물로 이전했다. 채혜원 제공
|
베를린은 독일 여성 운동사에 있어 특별한 도시다. 여성 임파워먼트 강화를 위한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자치여성센터’와 폭력 피해 여성을 위한 ‘여성의 집’이 최초 설립된 곳이며, 독일 최초 페미니즘 신문이 발행된 도시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 배우는 ‘여름 대학’도 베를린에서 처음 시작됐다.
1970년대 초반부터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베를린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여성 공간’을 짓기 시작했고, 덕분에 지금 베를린에는 다양한 여성 전용 공간과 페미니즘 공간이 있다. 그중 프리드리히스하인이라는 동네에 있는 ‘페미니즘 아카이브’(FFBIZ)는 필자가 정기적으로 들르는 곳 중 하나다.
여성 연구·교육·정보센터인 이곳은 ‘독일 페미니즘 도서관’이나 다름없다. 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독일 여성운동에 관한 모든 자료가 총망라되어 있다. 대개 1960년대부터 모아놓은 여성운동 관련 사진과 자료, 편지, 당시 출판된 신문과 잡지 등이 주제별로 정리되어 있다. 1층에는 주제·시기별로 자료가 정리되어 있고, 2층에는 자료 대출이 되지 않아 당일에 요청한 자료를 읽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페미니즘 아카이브’가 만들어진 역사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7년 베를린에서 열린 ‘여성 콘퍼런스’에 다양한 여성운동 조직과 활동가들이 모였고, 그동안 여성운동사가 독일 역사에서 숨겨져 왔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이로 인해 다양한 여성운동과 관련한 자료 수집과 저장 공간의 중요성이 대두됐다.
활동가들은 정기적으로 ‘여성센터’에 모여 페미니즘 도서관의 필요성과 건립 방법을 논의했고, 베를린 시의회에 도서관 건립을 위한 예산 책정을 요구했다. 그 성과로 페미니즘 도서관 건립이 1979년 시의회 선거의 주요 공약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80년, 베를린 서쪽에 첫 페미니즘 아카이브 공간이 문을 연다.
|
1980년 2월, 처음 문을 연 ‘페미니즘 아카이브’(FFBIZ) 모습. 디지털독일여성아카이브 제공
|
|
여러 자료가 보관되어 있는 ‘페미니즘 아카이브’(FFBIZ)의 자료실. 채혜원 제공
|
현재 페미니즘 아카이브는 단순한 아카이브가 아니다. 여성 활동가 구술 기록과 페미니즘 연구, 여성학 관련 네트워킹을 조직하며 올해에는 지난 50년간 베를린 여성운동사를 다룬 책을 출간했다. 이 아카이브 직원인 다그마어는 “새로운 여성운동사를 지속해서 수집·보관하고 학자, 언론인 등 여성운동사에 관심 있는 이들을 위해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아카이브의 사명이자 과제”라고 말했다. 현재 아카이브가 위치한 건물로는 2003년에 옮겼으며, 베를린 시의회가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이곳에선 베를린에서 내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친구들을 만난다. 브라질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국제여성공간’(IWS) 동료인 데니지는 독일의 이주여성 운동사에 대한 새로운 작품을 준비 중이다. 그는 “독일 이주여성 활동을 문서화하고 보관하는 것은 새로운 세대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라며 “페미니즘 아카이브 덕분에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오는 여성운동 역사로부터 강한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데니지 말대로 내가 일하는 ‘국제여성공간’의 주된 활동 중 하나는 여성 역사, 그중에서도 지워지고 억압된 이주 및 난민 여성에 대한 ‘기록’이다. 동료들은 저널리스트, 다큐멘터리 감독, 엔지니어, 통·번역가 등 직업군이 다양해서 책과 영상을 만들고 유통, 판매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서로 배우고 가르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역사를 쓰는 데 기여하지 않으면 그 역사는 억압되고 숨겨진다는 것을, 그래서 여성의 경험을 기록하고 문서나 영상 등으로 만드는 일을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것을 여성 활동가들은 잘 알고 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반세기 전 여성 활동가들과 그들의 활동을 토대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 지금의 여성 활동가들이 만나는 곳, 페미니즘 아카이브. 나는 이곳에서 그들을 동시에 기록하기 위해 이렇게 쓴다. 쓰고 또 쓴다.
▶채혜원: <여성신문> <우먼타임스> 등에서 취재기자로,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독일 베를린에서 국제 페미니스트 그룹 ‘국제여성공간’(IWS) 멤버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에서 만난 전세계 페미니스트와 여성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chaelee.p@gmail.com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