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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6.28 06:01 수정 : 2019.07.26 11:04

[책과 생각] 황우창의 어디서든, 음악
⑩발트 3국, 오욕과 질곡의 역사에서 음악으로 일어서는 사람들

1989년 8월23일에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을 시작으로 라트비아 리가와 리투아니아 빌뉴스까지, 사람들은 600㎞를 맞잡은 손으로 이어 인간띠를 만들고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맞잡은 손과 노래를 부르는 입은 진압을 위해 투입된 소련의 탱크도 막아냈고, 결국 1990년 3월에 리투아니아를 시작으로 1991년 8월20일 에스토니아, 8월21일에 라트비아의 독립을 이끌어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그리고 리투아니아. 이 세 나라를 일컬어 발트3국이라 부르지만 사실 우리에게 그나마 이름이 알려진 건 1990년대 초반 국제 기사를 통해서였다. 손에 손을 잡고 인간띠를 만들어 옛 소비에트 연방에 저항했던 사람들. 그 인간띠는 노래를 통해 더욱 단단해졌고, 결국 독립을 쟁취했다. 이런 이미지를 생각하면 그들의 삶 속에는 러시아의 이미지가 많이 남아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러시아보다 서방 세계, 즉 서유럽과 더 가깝다. 또한 발트3국 모두 유럽연합에 가입되어 있고 실제로 유통되는 화폐 역시 유로다. 만일 독자들께서 이곳 발트3국을 여행할 기회가 생긴다면 이들의 문화 가운데 어디에 초점을 맞춰 이들을 살펴볼 것인가. 선뜻 생각나지 않는다면 이들의 음악부터 살펴보자.

에스토니아 합살루에 있는 차이콥스키 기념 의자. 그가 머물렀던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합살루의 경치에 반해 이후에도 종종 언급했다고 한다. 황우창 제공

‘백만 송이 장미’는 라트비아 노래

에스토니아의 평화로운 소도시 합살루의 해변가에 가면 돌로 만든 작은 벤치가 있다. 이 돌에는 악보 일부와 함께 한 작곡가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차이콥스키다. 휴양차 왔다가 이 도시의 아름다움에 반했다는데, 합살루의 작은 기차역도, 대주교의 성채도, 화려하거나 강렬한 인상보다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잠시 그늘 속에 앉아 바라보고 있자면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편안해진다. 해변을 따라 조그맣게 이어지는 도로를 걸어도, 이어지는 소박한 아름다움에 어느새 동화되어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게 된다. 합살루뿐만이 아니다. 탈린을 상징하는 알렉산데르 넵스키 정교회 사원에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사제와 신자들이 부르던 무반주 합창은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아름다움 그 자체다. 로마 가톨릭 성당이나 루터교 교회 안에서와는 또 다른 묘한 분위기. 함께 여행을 떠났던 일행이 이미 모두 밖으로 나간 줄도 모르고 넋을 놓고 서 있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에스토니아 탈린의 옛 시가지 정경. 소박한 듯 아름다운 정경을 포함한 이 주변은 모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황우창 제공
밖으로 나와 조금만 걸으면 만날 수 있는 옛 시가지는 투박하지만 인간미가 넘친다. 그 시가지 입구에는 정교회 성당, 로마 가톨릭 성당, 그리고 루터교 교회가 벽을 맞대고 나란히 서 있다. 이 세 건물을 마주 보고 있는 작은 카페에서 나른하지만 예쁘장한 선율이 반복해서 흐른다. 아르보 페르트의 ‘거울 속 거울’이다. 에스토니아에는 무신론자의 비율이 인구에서 꽤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는데, 맞은편에 나란히 자리 잡은 세 가지 종교 건축물을 마주 보고 무신론자 작곡가의 음악이라니. 물론 대중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에스토니아라는 이름을 통해 키릴레 로 같은 독특한 음악을 만들어내는 가수를 연상할지도 모르겠다.

가운데에 자리 잡은 나라 라트비아를 이야기하자면 우리나라만큼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의 원곡이 러시아 가수 알라 푸가초바의 노래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사실과 다르다. 원래 이 노래는 라트비아 작사가 레온스 브리에디스, 작곡가 라이몬츠 파울스가 만든 ‘마라가 준 인생’이 원곡이다. 1981년에 한 방송사에서 주최한 음악제에서 우승한 노래를 알라 푸가초바의 목소리로 녹음한 것이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가사 역시 라트비아어로 만들어진 마라의 인생과 고난을 담았지만 러시아어로 개사된 노래에서는 가난한 화가와 여인의 이야기로 바뀌었다.

라트비아 리가에 있는 노래혁명 기념 동판. 시가지 광장에 있다. 황우창 제공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의 중심 광장에 가면 독립을 이끌어낸 인간띠의 시작점에 동판으로 새겨진 발자국이 있다. 라트비아의 인간띠가 이곳에서 시작되었다는 문구와 함께. 글쓴이의 발도 제법 큰 편이지만 동판 속 발자국도 어지간히 큰 편이다. 하긴 발트3국의 독립을 이끌어낸 인간띠의 발자취는 단지 물리적인 크기로만 이야기할 수 없는 역사적인 족적이기도 하다. 물론 클래식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세계적인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의 고향이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라는 사실도 함께 떠올릴지 모르겠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광장에서는 음악이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곳 사람들이 라트비아 전통 음악만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 광장 한켠에서 젊은이 한 명이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는 동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브라질 보사노바가 흐른다. 세계 각지의 이국적인 음악들도 이곳 리가에서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마치 원래 그곳 라트비아에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양.

리투아니아 빌뉴스에 있는 예술의 거리. 발트3국과 주변 국가의 예술가들?의 친필 사인이나 초상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황우창 제공
발트3국 중 맨 아래에 자리 잡은 나라 리투아니아의 음악은 스미스소니언 음악 박물관, 흔히 스미스소니언 포크웨이스로 불리는 음반사에서도 독특한 합창곡과 전통 음악의 소중한 창고로서 오랜 세월 동안 각광받았다. 굳이 이렇게 나라별로 구분하지 않아도 발트3국을 구성하는 세 나라 모두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음악에 사랑과 저항, 그리고 비폭력이라는 메시지를 담아 독립이라는 최고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사실도.

성채조차 인간적이고 소박해

발트3국의 인간띠는 ‘노래 혁명’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대부분의 혁명이 무력 또는 유혈 사태를 부른다는 역사의 교훈은 이곳 발트3국에 적용되지 않는다. 당시 소련조차도 무력으로 진압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이들의 인간띠 노래 혁명은 성공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발트3국 어느 나라에 먼저 발을 디디더라도 마음이 숙연해진다.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이든, 라트비아의 리가든, 아니면 리투아니아의 빌뉴스든. 각 나라의 수도 모두 인간띠를 이어 노래 혁명을 시작한 자부심이 있는 도시들이다. 오랫동안 노래를 사랑했으며 노래를 통해 불의에 저항했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한 사람들. 이들이 바로 발트3국 사람이다.

이 세 나라가 독립 국가로 인정받게 된 것은 이제 2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13세기 이후 독일, 덴마크, 폴란드, 스웨덴, 러시아, 그리고 소련까지, 이들의 역사는 침략과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세 나라는 덴마크에서 벗어날 만하면 독일의 식민지로, 독일 이후에는 폴란드와 스웨덴에 분할되어 지배당했다. 이후 18세기 초부터는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다가 20세기에 들어 제1차 세계대전 후 독립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독일과 소련의 협정으로 1939년부터 다시 소련 연방공화국으로 편입되었다. 그리고 1989년 8월23일에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을 시작으로 라트비아 리가와 리투아니아 빌뉴스까지, 사람들은 600㎞를 맞잡은 손으로 이어 인간띠를 만들고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맞잡은 손과 노래를 부르는 입은 진압을 위해 투입된 소련의 탱크도 막아냈고, 결국 1990년 3월에 리투아니아를 시작으로 1991년 8월20일 에스토니아, 8월21일에 라트비아의 독립을 이끌어냈다. 이처럼 발트3국은 오욕과 질곡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지만 이곳 사람들은 노래와 함께 독립이라는 영광을 쟁취했다.

트라카이 성채. 리투아니아 트라카이를 둘러싼 갈베 호수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황우창 제공
서유럽 국가들의 화려한 문화유산에 견주어보면 발트3국의 유산들은 소박하다 못해 뭔가 아쉬운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결코 외양을 추구하지 않는 이들의 인간미가 물씬 풍긴다. 리투아니아의 트라카이 성채만 해도 갈베 호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모습이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룬다. 원래 용도는 외세의 침입에 대한 최후의 저항이라는데, 살아남은 성채의 외곽은 오히려 여타 유럽, 특히 스위스나 오스트리아 성채들의 위압감이나 웅장함과 달리 지극히 인간적이고 소박하다. 마치 우리네 건축물의 선과 면과 닮았다고 해야 할까.

그 소박한 마음이 때로는 간절한 염원으로 승화된 곳도 있다. 보통 ‘십자가 언덕’이라고 불리는 샤울레이 외곽 언덕을 가면 멀리서부터 촘촘하게 들어선 십자가들을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수만 개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십만 개가 넘을 거라고도 한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어느 하나도 라틴 아메리카나 서유럽의 것들처럼 화려한 금장 십자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부분 나무로 만들어졌고, 가끔 작은 나무 판이 달려 있기도 하다. 그 안에는 방문자들의 간절한 염원이 빼곡히 쓰여 있다. 작은 것은 손바닥 안에도 들어갈 것 같지만 큰 십자가들은 내 키를 훌쩍 넘어 3m가 족히 될 것 같다. 가족들의 평안과 개인의 염원을 담아 이 언덕에 글쓴이도 십자가 하나를 세워둔다. 이제 일년 만에, 이번 여름에 그 십자가가 잘 있는지 직접 가서 확인해볼 일만 남았다. 그들의 소박한 마음씨도 확인할 겸.

음악평론가, 작가

리투아니아 샤울레이에 있는 십자가 언덕. 황우창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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