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황우창의 어디서든, 음악
⑨서구 문화의 집산지, 산티아고 순례길 2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일찌감치 이 카미노를 걸었을 테고, 카미노가 좋아 이 길 위에 눌러앉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도 젊은 날에는 뜨거운 가슴을 안고 더 넓은 세상을 보려 했을 것이다. 이제 늙어버린 선배 순례자들은 오스피탈레로가 되어, 이곳에서 그들처럼 뜨거운 가슴을 안고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알베르게는 늙어버린 오스피탈레로들만의 안식처이자 후배 순례자들에게 안식을 제공하는 곳이다.
스페인에 있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물리적인 거리는 말할 것도 없고, 서로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건너온 순례자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순례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본질이 혼자 걷는 것이지만, 적어도 걷는 일이 끝나는 오후부터는 순례자들끼리 문화의 교류가 벌어진다. 순례자 숙소 알베르게에서, 마을 여기저기에 있는 식당에서, 광장에서, 야영지에서. 때로는 현지인을 통해 스페인의 문화를 경험할 수도 있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순례자 숙소 알베르게에 있는 사람들이다. 흔히 오스피탈레로(Hospitalero)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 대부분은 바로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걸었던 선배 순례자들이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순례자들의 고충을 이해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
비야마요르데몬하르딘 알베르게의 늦은 오후 정경. 정리를 마친 순례자들과 오스피탈레로가 함께 모여 문화 또는 정보 교류를 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황우창 제공
|
때때로 그들은 유머도 곁들일 줄 안다. 레온주에서 갈리시아로 넘어가기 직전, 산골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 루이텔란에는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 알베르게가 하나 있다. 엘 페케뇨 포탈라, ‘작은 포탈라’ 알베르게란다. 크레덴시알이라 불리는 순례자 여권과 진짜 여권 두개를 내미는 동안 배우 존 말코비치를 닮은 오스피탈레로는 까칠한 어투로 지켜야 할 규칙을 설명했다. 이건 안 되고 저건 하면 안 되고. 그리고 가장 힘주어 말한 부분은 ‘다른 순례자들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니 음악이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아침 6시30분 이전에는 절대로 움직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늙은 순례자들의 안식처 알베르게
과연 아침 기상 음악은 어떤 것일까. 그 당시 글쓴이는 사실 이미 6시 이전부터 깨어 침낭 속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기상 시각 즈음, 드디어 스피커로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 곡은 카치니의 ‘아베 마리아’, 그리고 연이어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에 등장하는 아리아가 들린다. ‘네순 도르마’(아무도 잠들지 말라). 우리나라에서는 ‘공주는 잠 못 이루고’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그 노래다. 어제의 까칠했던 모습들은 어디로 가고, 이 아침 음악으로 선보이는 유머라니. 이제 카미노를 걸어야 할 시간이니까 아무도 잠들지 말라는 이야기일까.
오스피탈레로들은 때로는 엄격해 보이지만 때로는 스스럼없이 유머와 위트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가장 기억에 남는 오스피탈레로 중 한명은 레온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미겔이었다. 졸저 <나는 걸었고, 음악이 남았네>에서 자세히 묘사했던 바로 그 흥겨운 오스피탈레로다. 지친 몸을 이끌고 알베르게로 들어오는 순례자들 한명 한명에게 일일이 인사말을 건네던 유쾌한 사람. 한마디로 흥이 넘치는 사람이랄까. 궂은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늦은 오후가 되니, 흥 많은 미겔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근심 어린 얼굴로 연신 하늘을 올려다보기에 조심스레 이유를 물어보았다. 가뜩이나 늦은 시각에 순례자들이 비를 맞으며 힘들게 걸을까봐 걱정스러워 그렇단다. 알베르게에 있는 오스피탈레로들은 그런 사람들이다. 항상 순례자들을 돌보고 아끼고 걱정해주는 사람들.
|
아르수아 순타 알베르게에서 만난 시끌벅적한 스페인 순례자들, 그리고 역시나 유쾌했던 오스피탈레로와 함께.? 황우창 제공
|
내가 만난 오스피탈레로들은 평범한 인생을 거부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미겔처럼 하루 24시간 동안 내내 흥겨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현실을 거부하는 파르티잔처럼 보인다. 아침에는 셋, 저녁에는 이제 나 홀로 남았지만 그래도 나아가야 한다는 레너드 코언의 노래처럼, 그들은 이제 홀로 이곳에서 매일 바뀌는 순례자들의 얼굴을 마주해야 한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일찌감치 이 카미노를 걸었을 테고, 카미노가 좋아 이 길 위에 눌러앉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도 젊은 날에는 뜨거운 가슴을 안고 더 넓은 세상을 보려 했을 것이다. 인생을 달관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청춘을 보냈을 것이고, 프랑수아즈 아르디의 노랫말처럼 ‘이제 더 이상 숲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이제 늙어버린 선배 순례자들은 오스피탈레로가 되어, 이곳에서 그들처럼 뜨거운 가슴을 안고 찾아오는 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알베르게는 늙어버린 오스피탈레로들만의 안식처이자, 후배 순례자들에게 안식을 제공하는 곳이다. 그래서 가끔 나는 미겔과 같은 오스피탈레로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아련해지는 것을 숨길 수 없다. 현명한 오스피탈레로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만족하고 봉사하며, 그들이 깨친 것들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기회가 될 때마다 오스피탈레로들은 후배 순례자들, 특히 카미노를 처음 걷는 초짜들에게 항상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고 노력하고, 후배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강요가 아니다. 후배 순례자들이 알아들으면 좋고, 알아듣지 못해도 그만이다. 오스피탈레로들의 말과 행동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은 후배 순례자들의 몫이다.
|
카리온데로스콘데스에 있는 지자체 알베르게에서 아야마 수녀, 한국인 순례자들과 함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들은 수녀원이나 수도원을 개조한 것들이 많으며, 오스피탈레로는 수녀일 확률이 높다. 황우창 제공
|
생장 알베르게에서 스페인 순례자들과 말다툼을 하던 무서운 여주인 다니엘은 하루 종일 굶었던 내게 온정을 내민 오스피탈레로였다. 벤토사의 알베르게 산 사투르니노의 오스피탈레로는 순례자의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해 정성스럽게 알려주었다. 시수르메노르의 마리벨 론칼은 천사의 재림 그 자체였고, 자상한 형님 같던 비야마요르데몬하르딘의 프리츠나 순례자의 아버지 같던 오스피탈데오르비고 알베르게 ‘산 미겔’의 주인장도 있다. 그들은 모두 각자 자신만의 신념을 안고 살아간다. 앞서 언급한 루이텔란 알베르게의 오스피탈레로 루이스는 그 신념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 중 한명이었지만, 정작 다음날 아침 글쓴이가 길을 떠나기 전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없이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그의 손을 잡는 일뿐이었다. 그가 보여준 오스피탈레로의 신념, 그리고 그의 파트너 카를로스가 보여준 인품과 요리 솜씨는, 얼핏 시설만 보면 허술하고 보잘것없는 조그마한 알베르게가 왜 카미노 최고의 알베르게 중 하나인지를 알 수 있는 증거들이다.
환대와 감사의 릴레이
알베르게는 오스피탈레로의 신념과 순례자를 대하는 마음가짐, 그리고 행동으로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지 알베르게에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는지, 와이파이 시설이 구비되어 있는지, 알베르게 주변에 좋은 식당과 현금지급기가 있는지의 여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시설만으로 따지자면 최악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만하린의 알베르게 역시 주인장의 신념이 수많은 순례자에게 공감을 얻으면서 명성을 얻게 된 것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들은 확신에 찬 자신들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동안, 그들의 청춘을 떠나보낸 사람들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들 오스피탈레로가 없다면 알베르게의 미래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한 예로, 산후안데오르테가에 있는 지자체 알베르게에는 순례자에게 마늘수프를 대접했다는 유명한 호세 마리아 신부님이 계셨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신부님이 2008년에 돌아가신 뒤로 이 알베르게에서는 더 이상 수프를 제공하지 않는 것 같다. 호세 마리아 신부님이 돌아가신 뒤로, 이 산후안데오르테가 알베르게는 그저 과거의 명성만 남아 있을 뿐이다. 낙후된 시설보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건 들끓던 관광객들과 버스들이었다. 물론 그곳을 지키던 오스피탈레로들이 신념도 없고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알베르게를 빛내던 오스피탈레로 호세 마리아 신부의 부재는 가뜩이나 황량한 알베르게 앞 광장을 더욱 쓸쓸하게 만들 뿐이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카미노 관련 국내외 각종 커뮤니티를 통해 추천 알베르게들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글쓴이는 마음이 아프다. 시설 부족이나 다른 이유로 문을 닫았다기보다, 혹시라도 그곳을 지키던 오스피탈레로 누군가가 그곳을 떠나거나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닐까 싶기 때문이다. 실제로 만하린 알베르게가 문을 닫을 뻔한 일이 있었다. 그곳을 지키던 오스피탈레로가 심장 이상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만하린 알베르게가 한동안 문을 닫았다는 소식이 커뮤니티를 통해 퍼진 일이 있었다. 이후 그 커뮤니티는 이 오스피탈레로를 돕기 위한 기부 운동을 펼쳤는데, 그 뒤로 들리는 소식으로는 이 오스피탈레로가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회복했다고 하니 만하린 알베르게가 당분간 문을 닫을 일은 없을 것 같다.
짐을 꾸려 길을 떠나는 다음날 아침, 순례자는 보통 오스피탈레로를 만나기가 힘들다. 대부분 새로운 준비를 하기 위해 알베르게 어디선가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이텔란 알베르게의 루이스와 카를로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것은 운이 좋은 경우이다. 레온의 미겔에게 전해야 할 감사 인사는 오스피탈데오르비고 알베르게 ‘산 미겔’의 주인장에게, 그리고 그에게 받은 환대의 감사는 다음번 알베르게에 있는 오스피탈레로에게…. 이런 식으로 나는 항상 오스피탈레로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재로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자니 그들이 문득 떠오른다. 우리나라 유명 배우들이 식사를 준비하고 알베르게를 관리하며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역할, 바로 오스피탈레로가 하는 일들이다. 그 길을 다시 걸을 때에는 못다 했던 감사 인사를 절대로 빼먹지 말아야겠다.
음악평론가, 작가
|
오스피탈데오르비고에 있는 알베르게 ‘산 미겔'의 입구. 마을에 진입해서 반대쪽 바깥 어귀에 자리잡고 있다. 순례길 사상 최고의 친한파(?) 오스피탈레로를 만날 수 있다. 황우창 제공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