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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12 06:00 수정 : 2019.07.26 10:56

[책과 생각] 황우창의 어디서든, 음악
⑦서구 문화의 집산지 , 산티아고 순례길 (바스크를 중심으로 )

혹시라도 순례길의 초반부가 두렵다면 , 내내 독립을 외치며 목소리 큰 바스크 사람들의 억센 기질이 두렵다면 , 이들에게 음악 이야기부터 조심스레 나누어 보자 . 바스크의 ‘새야 , 새야 ’와 녹두밭에 앉으려고 하는 우리나라 ‘새야 , 새야 ’를 비교해 이야기해도 좋다 . 바스크 사람들과 파차란을 마시면서 베니토 레르춘디나 미켈 라보아 , 이마놀이 노래한 자유의 갈망에 공감해 보자 . 그곳은 잠시 , 마치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을 단 한 달 동안 만날 수 있도록 신이 허락하신 길일지도 모른다 . 비록 순례길에서 돌아와 그들을 아프게 그리워하게 될지라도.

구불구불 산길을 지나 갑자기 등장한 평원 길을 걷는다. 앞뒤로 사람들은 보이지 않고, 온통 사방은 그저 평지일 뿐이다. 그늘도 없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멀리 성당 종탑이 보인다. 작은 마을이든 큰 도시든, 그곳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성당이라더니, 이제 쉴 곳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발톱이 들리고 물집 속에 또다시 생긴 물집이 꽤 괴롭지만, 조금만 더 가면 순례자 전용 게스트하우스, 알베르게에서 신발을 벗고 치료하면서 쉴 수 있다…. 입가에는 미소가 맺힌다. 노란 화살표와 조가비 표시를 따라 걷다 보니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저 멀리 앞서 걷던 순례자도 알베르게를 찾나 보다. 그런데 가까이 갈수록 뒷모습이 익숙하다. 7년 전에 함께 걸었던 캐나다 순례자다. 다시 올 거면 말이라도 하지. 반가운 마음에 그 동료 순례자의 이름을 크게 불러 본다. 이름을 듣고 멈칫하던 순례자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이다. 꿈이었다. 꿈속에서나마 나는 그리운 그곳을 다시 걷고 있었고, 동이 트는 지금 이 순간 나는 다시 현실로 막 돌아오고 있었다.

카스트로헤리스로 향하는 길 위의 순례자들. 올 때는 혼자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순례자들은 동료들과 함께 걸을 때가 많아진다. 사진 황우창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본 여행자들은 한동안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증언한다. 짧으면 몇개월, 길면 수년. 글쓴이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경험한 뒤 꽤 오랫동안 그 후유증에 시달린 경험이 있다. 그 길을 다시 걷는 꿈을 몇번이고 꾸었는지 모른다. 특히나 인생에서 전환점을 맞이하는 사람들 중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염두에 둔 예비 여행자기 많이 보인다. 그러나 그곳은 인생의 해답이라든지 ‘무언가를 얻으러 가는 곳이 아니라 버리러 가는 여행’이다. 머릿속을 비울 수 있는 여행. 걷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고, 걷는 일이 끝나면 세계 각지에서 모인 순례자들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인사하며 함께 문화를 공유하는 곳. 사람에 따라서는 평범한 트레킹 코스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평생 꿈꾸던 여행일 수도 있다. 수년 전 항공사 광고에서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여행자의 버킷리스트 1위로 소개하지 않았던가.

메세타 위 작은 마을 온타나스의 입구 전경. 제일 높은 건물이 마을 중앙 성당이다. 사진 황우창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산티아고 순례길 가이드북의 저자 존 브라이얼리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순례자의 길에 서 있을 때 우리는 내면의 깊이를 확장시킬 수 있다. 그리하여 속세에서 벗어나 우리의 근원이 존재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된다.” 현대인에게 산티아고 순례길의 가치를 잘 설명한 최고의 한마디가 아닐까 싶다. 잠시 현실에서 떠나 내면의 나를 발견하는 곳, 2천년 가까운 긴 세월 동안 축적된 서구 문화의 집산지, 바로 ‘카미노 데 산티아고’이다.

국내에서 다시 각광받는 산티아고길

사도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스페인 북쪽 800㎞를 걸어가는 이 순례길이 최근 우리나라에서 다시 한번 각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파울루 코엘류의 작품 <순례자>가 2000년대 중반 국내에 뒤늦게 소개될 때도 한바탕 산티아고 순례길 열풍이 불었다. 그리고 십여년이 지난 지금, 산티아고 순례길이 다시 한번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여행 관련 예능 프로그램이 대세인 와중에도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다. 작년에 이어 올해 들어서도 방식만 바뀌었다 뿐이지 순례길 관련 방송 프로그램은 꾸준히 선보이고 있는 중이다. 현역 국회의원이 걷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왕년의 아이돌 그룹이 왁자지껄 떠들면서 추억을 회상하는 예능 프로그램, 올해 3월부터는 아예 순례길에 있는 마을 현지에 국내 배우들이 자리를 잡고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리얼리티 쇼까지. 보는 각도만 다를 뿐이지 그만큼 대중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궁금해하고,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도 자신의 소중한 여행을 즐겁게 회상하고 싶은 욕구를 여러모로 맞추는 데 성공한 것 같다. 물론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본질이 성지 순례이기 때문에, 종교적인 접근을 하자면 현재 가톨릭 채널에서 작년 말부터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시청하면 되겠다.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묵으며 집필한 곳으로 알려진 오스탈 부르게테. 순례길 이틀째 아침에 만날 수 있다. 사진 황우창
그러나 막상 순례길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부담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여행 정보, 언어, 순례길 준비, 여행 경비, 현지 안전, 체력 등등. 그리고 좋은 여행의 조건 중 하나인 ‘동행자’까지. 그런데 대부분 예비 순례자들은 혼자 가는 것 같은데 이게 과연 안전할지 괜찮을지 걱정스러운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경험자로서 한마디 하자면, 모두 괜찮다. 남녀노소 누구든 할 만하다고 말하고 싶다. 걸으며 만나는 사람들이 동료가 되는 과정도 순례길의 미덕 중 하나다. 그중에서도 현지에 대한 존중, 특히 현지인들과 현지 문화에 관한 이해와 존중을 가장 으뜸 조건으로 권하고 싶다. 졸저 <나는 걸었고 음악이 남았네>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에 관한 부분을 할애했던 이유도, 그 길 위에서 만난 순례자들과 현지인들의 이야기를 어떻게든 담아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는 흔히 ‘프랑스 길’이라고 불리는 스페인 북쪽 지역이다. 그렇다면 현지인들과 그들의 문화를 우리는 어떻게 존중해야 할까. 간단한 예를 들자면 영어식 이름 ‘스페인’보다 그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부르는 이름 ‘에스파냐’로 불러주는 식이다. 별것 아닌 듯해도, 이것은 존중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들의 언어와 관습, 그들의 문화와 예술을 모두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가 노력하는 만큼 알고 가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들과 섞여 그들의 문화 속에 깊이 자리를 잡은 것들을 살펴보면 된다.

스페인어, 프랑스어, 바스크어, 영어 등 4개 언어로 표기되어 있는 에스테야 입구 안내판. 사진 황우창
전통주 파차란과 민요 ‘새야 새야’

이렇게 한 달 정도 순례길을 걷다 보면, 이들의 문화와 생활 가운데 반복해서 자주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특히 순례길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와인을 비롯한 음주 문화일 것이다. 최대한 단순화시킨 와인 예절이라든지, 상그리아나 틴토 데 베라노처럼 계절에 맞게 변형시킨 와인 계열 음료 등등. 심지어 맥주에다 레몬주스를 섞어서 마시는 여름 전용 음료 클라라라는 것도 있다. 여기에 바스크 지방 전통주 파차란이나 갈리시아 전통주 오루호까지 범위를 넓힌다면, 아마 현지인들 또는 현지인 순례자들과 밤새 문화 교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순례길 초반에 만난 바스크 사람들에게, 파차란을 찾는 한국인 순례자는 꽤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향긋한 과일향이 매력적인 이 증류주를 찾으니, 호기심을 참지 못한 바스크 순례자들이 삼삼오오 모이더니 질문 공세를 펼친다. 바스크어는 한마디도 할 줄 모르지만, 당신들의 음악을 사랑한다고 말했더니, 미덥지 못한 모양이다. 에라, 당신들의 아름다운 노래에 반해 이곳 바스크까지 왔다고 술김에 부풀려서 한마디 하고선, 그들의 민요들 앞 소절을 메들리로 불러본다. ‘초리아 초리’(Txoria Txori: 새야 새야), ‘고이시안 아르기 아스티안’(Goizian Argi Hastian: 이른 아침에) 등등. 순간 나를 둘러싼 바스크 사람들은 잠시 침묵하더니 곧바로 직원을 부른다. “어이, 이 한국인 순례자 한 잔, 그리고 나 한 잔.” 순간 글쓴이 앞에 대여섯 잔이 쌓이더니, 곰살맞은 바스크 순례자 한 명이 건배와 함께 순례사의 인사말을 외친다. “살루드, 이 부엔 카미노!”(건배, 그리고 좋은 순례길이 되기를)

팜플로나 외곽에서 만나는 바스크 사람들의 홍보 문구. “순례자여, 당신이 걷고 있는 이 길은 바스크의 나라입니다!” 사진 황우창
바스크 지방 음악은 지난 회 연재에서 다룬 내용처럼, 이베리아 반도의 지역을 고스란히 닮았다. 플라멩코로 대표되는 남쪽의 고지대 평지 음악이 화려한 변화와 장식음을 담고 있다면, 변화가 제법 심한 산악 지역 바스크에서는 소박하고 온화한, 그리고 소편성 포크 스타일이 대부분이다. 초민 아르톨라와 아마이아 수비리아가 70년대에 결성했던 대학생 밴드 아이세아도 그랬고, 이들이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에 다시 모여 발표한 석 장의 민요 모음도 바스크의 소박함을 잘 담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앞서 글쓴이가 바스크 현지에서 용기내어 불렀던, 아름답고 소박한 민요 ‘이른 아침에’가 1집에 담겨 있다.

초민 아르톨라와 아마이아 수비리아가 남긴 바스크 민요 모음 1집 음반. 사진 황우창
혹시라도 순례길의 초반부가 두렵다면, 내내 독립을 외치며 목소리 큰 바스크 사람들의 억센 기질이 두렵다면, 이들에게 음악 이야기부터 조심스레 나누어 보자. 바스크의 ‘새야, 새야’와 녹두밭에 앉으려고 하는 우리나라 ‘새야, 새야’를 비교해 이야기해도 좋다. 바스크 사람들과 파차란을 마시면서 베니토 레르춘디나 미켈 라보아, 이마놀이 노래한 자유의 갈망에 공감해 보자. 첫 단추가 잘 끼워지면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는 길이 편하다. 그곳은 잠시, 마치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을 단 한 달 동안 만날 수 있도록 신이 허락하신 길일지도 모른다. 비록 순례길에서 돌아와 그들을 아프게 그리워하게 될지라도.

음악평론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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