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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20.01.02 09:38 수정 : 2020.01.02 09:44

지난 12월27일 아침 8시25분, 함백산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한 등산객이 해돋이를 보고 만항재로 내려가고 있다. 김선식 기자

커버스토리 | 눈꽃 여행

눈송이 내리는 하늘 바라본 지 오래
낭만 따위는 관심 없는 나 눈길 속으로
세파에 빙벽 두른 맘 눈사람처럼 녹아
봉화 오지, 정선·태백 함백산 눈꽃 여행

지난 12월27일 아침 8시25분, 함백산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한 등산객이 해돋이를 보고 만항재로 내려가고 있다. 김선식 기자

차 앞유리에 쌓인 눈을 보고 아이가 소리쳤다. “엄마! 큰일 났어! 눈이 시들어가고 있어!” 엄마는 말했다. “눈은 시드는 게 아니야, 녹는 거야.” 아이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오래전 되뇌었던 시가 꿈에 뒤엉켰다.

‘자동차는 말썽이다. 왜 하필 눈사람을 치고 달아나는가. 아이는 운다. 눈사람은 죽은 게 아니고 몸이 쪼개졌을 뿐인데, 교통사고를 낸 뺑소니 차를 원망하는 것이리라. 「눈사람은 죽지 않는단다. 꼬마야, 눈사람은 절대 죽지 않아.」 아이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아저씨, 눈사람은 죽었어요. 죽지 않는다고 말하니까 이렇게 죽었잖아요.」’(자동차에 치인 눈사람, 시집 <눈사람>, 최승호)

지난 12월27일 함백산에서 중함백으로 가는 길에 만난 파란 하늘과 상고대. 김선식 기자

아무런 쓸모없는 눈, 어차피 더러워질 눈, 언젠간 녹을 눈. 어릴 적 눈을 뭉치고 눈덩이를 굴려 만든 눈사람은 모두 녹아버렸다. 눈 내리는 하늘을 고개 들어 바라본 지 오래다. 매해 보는 그 눈이 아니던가. 그을음 뒤집어쓴 눈더미나 안 밟으면 다행이라고 여겼다. 별나게도 새해를 앞두고 ‘눈 오는데 눈길이나 걸어야지’라고 생각했다. 또다시 눈이 더러워지고 녹아 사라지기 전에 그 쓸모를 한 번쯤 찾고 싶었던 걸까. 수십년째 눈송이의 낭만 따위는 멀리한 나를 일으켜 세워 눈길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지난 12월26일, 세파에 찌들어 일상의 빙벽을 겹겹이 두르고 있던 나는 온몸으로 눈을 영접하고 종국엔 눈사람처럼 녹아버렸다.

지난 12월26일 경북 봉화 ‘낙동강 세 평 하늘길’ 양원역~승부역 구간을 걷는 여행객들. 김선식 기자

기차 타고 5시간 달려간 오지마을에서 눈을 맞았다. 경북 봉화 오지마을 분천역과 승부역을 잇는 ‘낙동강 세 평 하늘길’(12.1㎞). 협곡이 가로막은 좁은 하늘에서 좁은 땅으로 눈이 내렸다. 눈도 사람도 어렵게 다다른 길이었다. 눈송이는 사뿐히 내려앉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협곡 배경은 흐릿했고 눈송이들만 선명했다. 강물에 떨어지는 눈은 올챙이처럼 튀어 올랐다. 수면이 거울처럼 비춘 눈꽃의 낙화였다. 눈 흩날리는 철길과 물길 사이를 걸었다. 세 개의 길은 평행선을 그리다 교차했다. 여행객들은 난생처음 보는 것처럼 하염없이 눈을 바라봤다.

지난 12월27일 해돋이 즈음 함백산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 김선식 기자

예로부터 민초들이 소원을 빌던 강원 정선·태백 함백산, 그 일대 7.68㎞를 오르내렸다. 새벽녘부터 설산의 빛을 지켜봤다. 신비로웠다. 까맣다가 불그름하다가 하얘졌다. 새까만 산에서 은가루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눈송이 결정체들을 봤다. 여명이 스미는 동안 능선은 발그레 물들었다. 어느덧 새파란 하늘에 새하얀 상고대(나무나 풀에 내려 눈처럼 된 서리)가 피었다. 파랗고 하얀 ‘겨울왕국’이었다. 눈부셨다. 눈길은 짐승 발자국만 뚜렷했다. 어렴풋한 사람 발자국이 그저 고마웠다. 그리고, 단 하루라도 잘 살고 싶었다. 바야흐로 새해다. 눈의 계절이다.

지난 12월27일 중함백에서 은대봉으로 가는 길에 만난 풍경. 김선식 기자

정선·태백(강원)·봉화(경북)/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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