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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5.08 19:55 수정 : 2019.05.08 22:02

안길백차 나무를 재배하고, 직접 차를 만들어 선보이고 있는 오정애(왼쪽), 장가영(가운데), 장성씨 가족. 이정연 기자

사라졌다 1980년대 발견된 안길백차
제주의 한 가족이 재배하기 시작
15년 지나야 찻잎 수확
차나무 재배부터 직접 판매까지

안길백차 나무를 재배하고, 직접 차를 만들어 선보이고 있는 오정애(왼쪽), 장가영(가운데), 장성씨 가족. 이정연 기자
지난 3월 제주에서 우연히 한 카페에 들렀다. “저희는 차 전문이에요.”라는 주인장의 말에 이끌려, 커피를 마시려다 ‘비자림 산책’이라는 이름의 차를 마셨다. 고소한 맛과 상쾌한 맛에 미소를 지었다. 직접 가꾼 찻잎이 들어간 차라고 카페의 주인장은 설명했다. 이곳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찻잎이 얼굴을 내미는 4월, 다시 표선을 찾았다.

제주도의 동남쪽 표선해변. 육지를 향해 깊게 바닷모래가 깔려있다. 검고 차가운 바닷물과 봄햇살을 머금은 제주의 바람이 모래를 덮는다. 6㎞ 밖 바다에서 밀려 올라온 바람이 작은 키의 차나무들을 쓰다듬는다. 제주도하면 떠올리는 차밭의 풍광이 있다. 완만한 언덕을 따라 끝없이 펼쳐지는 초록빛 차나무 바다. 가장 유명한 ‘오설록’이 제주에 일군 차밭 규모는 약 330만㎡(100만평)에 이른다. 이곳은 다르다. 작다. 아주 작다. 겨우 1만6500㎡(5천평)이다. 이 작은 차밭은 작지만 다르다. 초록 찻잎이 아닌, 하얀 찻잎이 달린 차나무가 있다.

이 작고 특이한 차밭을 일구고 있는 건 한 가족이다. 제주로 이주한 지 20년이 넘었으니, 이주민이라기보다는 원주민에 가깝다 할 수 있다. 강원도 태백이 고향인 장성(65)씨와 서울이 고향인 오정애(57)씨, 역시 서울이 고향이지만 6살때부터 제주에서 산 장가영(27)씨가 일군 차밭이다. 이들은 차나무를 가꾸고, 찻잎을 따고, 차를 만들고, 차를 우리고, 차를 알린다. 차밭부터 카페까지 운영한다. 일종의 수직계열화를 이뤘달까?

차밭을 직접 보니 하얀색에 가까운, 아주 연한 초록빛을 띠는 찻잎의 정체가 궁금해진다. 오정애씨가 입을 뗐다. “20대부터 차를 즐겼다. 그러다 1990년대 말 즈음인가? 그때 이 차를 처음 알게 됐다. ‘안길백차’라는 재배종이었다. 그 맛을 보고 훅 갔다.(웃음) 꼭 이 차를 다시 마셔보고 싶어서 2000년부터 키우기 시작했다.” 안길백차. 차나무 잎으로 만드는 차를 가공방법에 따라 6가지(중국식 분류에 따르면 백차, 황차, 녹차, 청차, 홍차, 흑차)로 나누는데, 그렇다면 안길백차로 ‘백차’를 만드는 것일까? “아니다. 안길백차는 차나무의 종류를 이르는 말이다. 안길백차의 잎은 일반적으로 녹차를 만드는데 쓴다.” 고개를 갸웃하는 기자에게 차 전문가인 강지형씨는 설명한다. 제주대에서 생명자원과학대학장을 맡고 있는 송관정 교수가 설명을 이어갔다. “안길백차는 중국에서 사라졌다가 1982년 2그루가 발견된 뒤 다시 재배하기 시작한 종이다. 안길백차와 같은 차를 ‘백화차’라고 하는데, 차나무의 변이종이라 볼 수 있다. 녹색 색소가 덜 형성되는 차나무다. 차의 감칠맛을 내는 성분인 아미노산이 일반 찻잎에는 3%가량 들어있는데, 안길백차는 8~10%가량 들어있다고 알려져있다. 그만큼 더 맛있다고들 한다.”

연한 초록빛의 안길백차. 이정연 기자
그 넓은 중국 땅에서 자취를 감췄던 차. 그 내력을 들으니, 더욱 신비롭게 느껴진다. 이 이야기에 안길백차가 제주의 땅에 뿌리내리기까지의 이야기가 더해지자 더 깊이 매료된다. 장성씨와 오정애씨는 2000년부터 안길백차를 본격적으로 재배할 날을 그리며 삽목(꺾꽂이)을 했다. 그렇게 얻은 차나무를 귀하게 키웠다. 장성씨는 “삽목을 하면 빛을 적절하게 가려주고, 아침저녁으로 물을 줘야한다. 3년 정도 지나야 20㎝정도 자란다. 그런데 삽목을 해서 키우는 도중에 나무가 많이 죽었다. 잘 살아남으면 50%정도? 지난해 삽목한 나무는 겨우 10% 살렸다. 정말 어렵다”고 말했다. 오정애씨는 정성을 많이 들이다 낭패를 본 일화를 소개했다. “차나무를 가꾸면서 제일 힘든 일이 풀뽑기다. 다른 지역은 겨울에 풀이 자라지 않는데, 제주는 4계절 풀이 자란다. 농한기가 없다. 열심히 잡초를 뽑았다. 그런데 정성들여 뽑다가 삽목해 키우던 나무의 80%가 죽었다.(웃음) 잡초를 뽑을 때 차나무 뿌리가 같이 흔들리지 않게 나무를 잡고 뽑아야하는데, 그걸 몰랐다.”

안길백차에 정성을 쏟은지 15년째인 2015년, 드디어 처음으로 찻잎을 땄다. 내다팔 양은 되지 않았다. “차를 만들어서 지인들이랑 나눠 마셨다”는 오씨. 장씨는 “나눠 마시기에도 모자랐다”고 회상한다.

안길백차에서 난 잎(왼쪽)으로 만든 녹차. 이정연 기자.
차나무 밭에서 표선해변가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는 장가영씨가 차와 음료 등을 만들어파는 카페 ‘블룸’(Bloom)이 있다. 식물이 가득한 편안한 분위기와 시원하게 펼쳐진 표선 바다가 어우러진 곳이다. “원래는 아예 커피를 안 팔았는데, 하도 찾으니 팔기는 시작했다. 그래도 주력은 다양한 차와 차로 만든 음료들이다.” 장가영씨는 지난해 4월 블룸을 열었다. “워낙 손으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걸 좋아했다”며 쑥스러운 듯이 말하는 장씨. 딸을 바라보는 장성씨의 눈빛이 촉촉해졌다. “딸이 오케이하니까 이곳도 열 수 있었다. 우리끼리 할 수 있었겠나? 정말 고맙다.”

이곳에서는 부디 커피가 아닌 직접 재배한 찻잎으로 만든 차와 차로 만든 음료를 마셔보길 권한다. 차를 고르는 재미부터 남다르다. 녹차, 홍차, 우롱차, 보이차 등 싱글 티(한가지 찻잎만 들어간 차)가 있고, 녹차나 홍차에 다양한 재료를 더해 만든 차들이 있다. 이 차들의 이름을 보면, 천천히 소리내어 읽게 된다. 성읍의 하루, 비자림 산책, 그레이씨와 감귤향, 표선 밤바다. 제주 곳곳의 특색이 물씬 풍기는 이름이다. 실제로 ‘비자림 산책’이라는 차에는 제주에서 난 비자 씨앗이, ‘그레이씨와 감귤향’에는 제주 감귤 껍질이 들어간다.

제주 표선해변 옆 카페 블룸을 운영하는 장가영씨가 혼합차인 비자림 산책을 만들기 위해 비자 씨앗을 찧고 있다. 이정연 기자
장가영씨가 손님을 맞는 사이, 오정애씨는 따온 찻잎을 고른다. 다듬은 찻잎이 넓은 탁자 위 한가득이다. 안길백차의 찻잎을 덖는 과정을 지켜봤다. 찻잎을 녹차로 만들어 마시기 위해, 뜨거운 솥에 덖어야 한다. 이 과정을 제다(차 만들기)에서 ‘살청’이라고 부른다. 연한 연두색의 찻잎을 솥에 부어 넣자, “지지직”하고 꽤 큰소리가 난다. 곧이어 찻잎의 수분이 증기가 되어 올라온다. 침이 꼴깍 넘어가게 구수한 향기가 콧속으로 훅 들어왔다. 장가영씨는 묵묵히 찻잎을 덖는다. 다 덖은 찻잎을 비빈다. ‘유념’이라는 과정이다. 힘이 들어간 것 같으면서도 부드럽게 찻잎을 어르는 그 손길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평화로워진다.

장가영씨는 혼합차 이름에 제주의 특색을 담았다. 이정연 기자
“차를 한 번 만들어보자.” 장가영씨가 기자의 손을 이끌었다. 미리 예약하면 블룸에서 자신만의 차를 만들어볼 수 있다. “11가지 재료의 향을 먼저 맡아보고, 어떤 향과 맛의 차를 만들지 정해야 한다.” 기자는 먼저 중심을 잡아줄 잎차로 우롱차를 꼽았다. 그뒤 평소 좋아하는 살짝 새콤한 향을 더할 수 있는 재료들을 골랐다. 후보 재료 7가지를 각각 우려 한모금씩 천천히 맛 봤다. 재료를 섞어 차를 만드는 경험이 처음이어서 어떤 맛이 어울릴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장가영씨는 “입안에 맛이 차는 느낌의 재료가 있고, 향이 좋은데 맛은 어딘가 비어있는 느낌의 재료가 있다. 부담없이 맛 보고 섞어보면 된다”며 독려했다. 우롱차에 들꽃 향이 나는 카모마일, 말린 귤 껍질, 평소 좋아하는 새콤한 향의 레몬그라스를 택했다. 고른 재료를 모아보니 노란빛을 띄는 게 많다. “이름 짓는 게 가장 어렵다. 어떤 차들을 이름 짓는 데만 한 달 넘게 걸린다.” 오정애씨가 말했다. 카모마일의 노란색을 보고 떠올랐다. 지난 3월 제주를 찾았을 때 보았던 아주 크고 노란 달이. 그리고 제주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 ‘오름’을 떠올렸다. “오름 위 노란 달로 하고 싶다.” 장가영씨는 기자가 만든 차를 티백에 넣고, 티백을 넣을 포장지에 ‘오름 위 노란 달’이라고 써주었다. 작은 차밭에서 시작한 찻잎의 여정이 이렇게 끝났다.

제주/ 글·사진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차나무의 어린잎을 달이거나 우린 물. 차나무의 학명은 ‘카멜리아 시넨시스’( Camellia sinensis)로, 동백나무 속의 상록 활엽관목이다. 국내에서는 식물의 잎이나 뿌리, 과실 따위를 달이거나 우려 만든 마실 것을 ‘차’로 통틀어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국외에서 차(茶·Tea)는 찻잎이 들어간 것을 일컫는다. 최근 녹차·홍차뿐만 아니라 다양한 향이나 향신료가 들어간 가향·가미차를 찾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제주/ 글·사진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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