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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24 21:06 수정 : 2019.04.24 21:10

지난 16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 예술 제본 공방 렉또베르쏘에서 만난 예술 제본가 조효은 대표.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커버스토리/종이책

예술 제본 공방 ‘렉또베르쏘’
2017 국제예술제본 비엔날레에서 수상
기계 제본과는 다른 개성
“책 아름답게 꾸며 오래 보존하는 법”

지난 16일 서울 마포구 연남동 예술 제본 공방 렉또베르쏘에서 만난 예술 제본가 조효은 대표.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전자책, 오디오북 등이 책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 그 변화 속에 ‘책’은 없다. 책장을 넘기는, 물성이 있는 ‘책’ 말이다. 진짜 책과 가짜 책을 나누고자 꺼낸 이야기는 아니다. 책 문화에서 우리가 쉽게 잊거나, 생각지 못한 부분에 관한 이야기가 여기 있다. ‘제본’ 이야기다. 손으로 책을 짓는, 예술제본장정가(예술 제본가)를 ESC가 만났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 연남동의 한 상가 2층으로 올라갔다. 복도의 모양은 반듯하지 않고, 계단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았다. 건물 바깥의 작고, 눈에 띄지 않는 간판만이 그 장소를 표시했다. 무거운 철제문을 열었다. 바깥 공간의 분위기와 모든 것이 달랐다. 나무와 종이와 가죽의 깊은 향기가 코를 스쳤다. 예술 제본 공방 ‘렉또베르쏘’의 향기다. 렉또베르쏘는 라틴어로 책의 앞장(렉또)과 뒷장(베르쏘)를 뜻한다.

“이제야 예술 제본과 그 가치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 공방이 문을 연 게 1999년, 올해로 20돌을 맞으니 빠른 속도는 아니지만, 확실히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조효은(40) 렉또베르쏘 대표이자 예술 제본가는 다소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예술 그리고 제본. 단번에 궁금증이 드는 말의 조합이다. 문학과 미술이 결합한 ‘북 아트’와는 결이 다르다. 예술 제본은 “책을 튼튼하게 만들고 아름답게 꾸며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책치례”라고 조 대표는 설명한다. 손에 잡히는 ‘책’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예술 제본은 책과 함께 발달했다. “중세 이전에 기독교 문화권에서 책은 곧 성서였다. 인쇄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수도원에서 성서의 필사, 채색, 제본을 맡는 수도사가 따로 있었다. 제본을 맡은 수도사는 ‘리가토르’라고 일컬었다.” 조 대표는 설명을 이어갔다. “중세 시대에 인쇄술이 발달하고 책이 대중화하면서 제본(현재의 예술 제본)도 발달했다. 누군가는 제본가에게 의뢰해 특별한 책을 만들어 소장하기도 했고, 간소한 방식의 제본도 생겨났다.” 중세부터 근대에 이르는 동안 예술 제본은 화려하게 꽃 피웠다.

산업혁명은 제본에도 영향을 끼쳤다. 기계 제본이 등장했다. 접착제가 발달하면서 책을 실로 ‘엮지’ 않고, 붙여 고정하는 ‘무선 제본’도 도입됐다. 출간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춘 기계 제본이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기계 제본 책만이 전부인 국내 ‘책 문화’의 현실은 너무 빈약하다. 조 대표는 “국내 독자 대부분은 출판시장에 나온 책만을 경험하는데, 예술 제본의 세계를 알면 책에 관한 사고를 완전히 확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제본 관련 도구들이 빼곡한 렉또베르쏘.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예술 제본을 경험해보지 못한 기자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 의미가 희미하게 다가왔다. 그때 조 대표가 책 한 권을 꺼냈다. 제본하지 않은 책이다. 그는 “이런 책을 다양한 형태로 제본하는 경험을 한국인들은 거의 해보지 못했다. 국외에서는 미제본 책을 자신이 바라는 스타일대로 제본해 소장하는 문화가 발달했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예술 제본을 할 수 있는 미제본 책을 출간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조 대표가 감수로 참여한 <하우스 오브 픽션>은 극히 드문 사례 중 하나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예술 제본을 위해 이렇게 출간하는 책을 ‘리브르 아 를리에’라고 한다. 국외에서는 드물지 않지만, 국내에서는 워낙 희귀한 형태라 <하우스 오브 픽션> 출간 때 ‘리브르 아 를리에’ 판은 책으로 인정받지 못한 해프닝도 있었다.” 과연 그의 설명을 들으며 예술 제본을 경험하니, 예전에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을 떠올리게 됐다. 문득 어머니가 자주 읽는 책을 튼튼하고 예쁘게 꾸며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제본할 책을 분해하여 보수하기.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책등에 톱질해 홈을 내고 수틀에 연결하여 꿰매기.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망치로 책등 둥글리고 판지(책표지에 쓰이는 두꺼운 종이)에 구멍 뚫어 책과 판지 연결하기.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여러 가지 색상의 실을 골라 머리띠(책머리와 책등이 만나는 부분) 만들기.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돌출 띠 집게로 책등을 가죽으로 싸고 장식지 붙이기.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표지 장식하기.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예술 제본가들은 책을 엮기만 하지 않는다. 책을 짓는다. 책을 건축한다. 예술 제본의 과정을 짧은 시간이나마 지켜보니, 이 표현들이 딱 들어맞는다. “제본은 구조를 쌓아가는 과정이다. 재료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구조와 재료를 결합하지 않으면 튼튼한 책이 완성되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건축과 유사한 점이 있다”고 조 대표는 말했다.

그는 설명을 마친 뒤 예술 제본 가운데 ‘고전 제본’(실로 엮고, 가죽으로 겉면을 감싸는 제본)을 하는 책과 그 과정을 보여줬다. 한 권은 <성경>, 한 권은 <동의보감>이었다. 모두 1천장이 넘는 두꺼운 책들이다. 2500장 정도 되는 <동의보감>은 분해 중이었다. 제본된 책을 일일이 낱장으로 떼어낸다. <성경>은 수틀에 있었다. 책 등에 홈을 파고, 그 홈에 노끈을 댄 뒤, 명주실로 한 장, 한 장 엮는다. 그가 실을 휘감아 엮을 때마다 절로 숨죽였다. 누군가가 평생을 볼 책이라고 생각하니, 지켜보는 사람의 긴장감이 배가 됐다.

[ESC] 예술 제본은 이렇게

1. 제본할 책을 분해하여 보수하기

2. 프레스기로 분해한 책을 압축하고 재단기로 가장자리 자르기

3. 책등에 톱질해 홈을 내고 수틀에 연결하여 꿰매기

4. 망치로 책등 둥글리고 판지(책표지에 쓰이는 두꺼운 종이)에 구멍 뚫어 책과 판지 연결하기

5. 여러 가지 색상의 실을 골라 머리띠(책머리와 책등이 만나는 부분) 만들기

6. 판지를 사포로 갈아내기

7. 표지에 쓰이는 가죽의 접히는 지점 등을 갈기

8. 돌출 띠 집게로 책등을 가죽으로 싸고 장식지 붙이기

9. 면지(책표지 안쪽과 책에 이어 붙이는 종이) 붙이기

10. 금박 등으로 표지 장식하기

도움말 조효은 렉또베르쏘 대표, 정리 이정연 기자

예술 제본을 직접 경험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예술 제본한 책을 소장하는 방법과 예술 제본을 직접 배우는 방법이다. 온라인 상담을 인공지능 상담사가 대체하는 세상이지만, 렉또베르쏘는 제본 의뢰 시 대면 상담을 원칙으로 한다. “의뢰인의 얘기를 직접 들어야 한다. 왜, 어떻게, 언제까지, 얼마의 예산을 갖고 제본하려는 지에 대해 대화한다.” 그는 의뢰인과의 대화에서 예술제본의 가치를 더욱더 깊게 느낀다. “구체적인 방향을 설명하며 책에 뚜렷한 애착을 보여주는 의뢰인을 만나면 정말 반갑다. 예술 제본에 관심을 갖고 시도하는 사람에게 이 세계를 알릴 수 있어 소중한 시간이다.” 렉또베르쏘는 예술 제본 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예술 제본의 기본을 배울 수 있는 초급과정은 8주에 걸쳐 진행한다.

제본가나 의뢰인이 바라는 대로 제본할 수 있도록 펴낸 책을 `리브르 아 를리에`라고 한다. 사진은 리브르 아 를리에로 출간한 <하우스 오브 픽스>를 예술 제본을 거쳐 완성한 책.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조 대표의 손에 군데군데 상처와 굳은살이 있다. 그저 책이 좋아 예술 제본의 세계에 뛰어든 지도 18년째다. 대학 3학년 때다. 친구들이 취업 준비에 열을 올릴 때 그는 책에 사로잡혔다. 예술 제본의 기본은 ‘튼튼한 책을 만드는 제본’이다. 조 대표는 “제시간을 충분히 들여 진행해야 완성도가 높아진다. 예술제본에 1부터 10까지의 과정이 있다 치자. 만일 2를 제대로 완성하지 않으면 3이나 4의 과정에 그 결과가 드러나지 않을지 몰라도, 결국 8이나 9, 10에 와서 드러난다. 작업 태도에 관한 이야기지만, 삶에 관한 태도와도 연결된다”고 말했다.

조 대표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꼽아 달라 부탁하자,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고심하던 그는 “최근에 가장 의미 있었던 책을 꼽자면 지난해 헌법재판소 개소 30돌을 맞아 만든 <순 한글판 헌법책자>다. 많이 힘들였고, 그만큼 걱정도 많았는데 좋은 결과물이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그 책을 들고 사진을 찍으셨더라. 뿌듯했다. 영구 소장된다고 하는데, 몇십년 뒤에 다른 제본가가 보더라도 참 잘 만들었다고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IMAGE11%%] 미래의 평가는 알 수 없지만, 조 대표를 비롯한 렉또베르쏘의 예술 제본가들은 최근 높이 평가받고 있다. 프랑스에서 2년마다 국제예술제본 비엔날레가 열리는데, 지난 2017년 렉또베르쏘 소속 제본가들이 단체상을 받았다. 20년 가까이 예술 제본 외길을 걷고 있는 조 대표의 목표와 소망은 하나다. “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자신의 선택에 따라 유일하고 특별한 책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많이 알리고 싶다. 책이 그냥 좋은, 저 같은 사람들이 예술 제본을 꼭 접하셨으면 좋겠다.” 그가 말하는 예술 제본의 세계가 궁금하다면 올해 하반기 열릴 렉또베르쏘의 20돌 기념 전시회 정보를 놓치지 말자.

[%%IMAGE12%%]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종이를 여러 장 묶어 맨 물건.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기록하여 꿰어 맨 것. 문자나 그림을 체계 있게 담은 물리적 형체. 고대의 기록물은 파피루스나 양피지 두루마리 형태였다. 이후 양피지 가운데를 접고 여러 겹으로 겹쳐 표지를 씌운 코덱스(codex) 형태가 우리가 아는 책과 가깝다. 인쇄술과 제지술의 보급으로 지식이 대중화하고, 책의 개인 소유가 가능하게 되면서 수요가 생기고 책은 상품으로 거듭났다. 글쓴이가 죽어도 글은 책 안에 담겨 긴 세월을 건넌다. 정보를 기록하고 휴대하고 운반하는 보편적인 저장 물건으로 가장 오래된 형태. 책은 신비한 종이 묶음이다.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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