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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4.10 20:08 수정 : 2019.04.11 18:13

지난 1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국방송>(KBS) 본관 5층 스튜디오의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삼국지> 녹음 현장. 이정연 기자

커버스토리/목소리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삼국지’ 녹음 현장
‘유비’, ‘노숙’ 대화를 1명이 동시에 연기
“현대물 지향, 장르 상관없이 최신 음악 넣어”
성우 덕후들은 방송 1돌 축하 선물 세례까지

지난 1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국방송>(KBS) 본관 5층 스튜디오의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삼국지> 녹음 현장. 이정연 기자
동영상 콘텐츠가 쏟아지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라디오 드라마, 너무 예스러운 콘텐츠 아니냐고? 아니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듣는 드라마’라는 걸 빼고는 모든 것이 새롭다. 성우 덕후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 라디오 드라마가 있다. <한국방송>(KBS) ‘제1라디오’에서 평일 오전 11시40분부터 54분까지 송출되는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삼국지>다. 성우들이 열연하는 녹음 현장을 찾았다.

“언어는 ‘반응’이다. 어휘로 내용은 전달할 수 있겠지만, 인공지능이 과연 서브 텍스트(대사로 표현되지 않은 생각, 느낌, 판단 등의 내용)까지 만들 수 있을까?” 이곳은 인공지능 세미나 현장이 아니다. 지난 1일 오전 9시30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국방송>(KBS) 본관 5층 성우 연습실. 국내 성우 팬들 사이에 이름 높은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삼국지>의 녹음 전 리허설 현장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피디나 성우나 대사를 주고받는 데는 도통 관심이 없다. 기자의 얼굴에 살짝 비친 궁금증을 알아챘는지 김호상 피디(PD)가 친절하게 설명했다. “서로 요즘 어떤 부분에 관심이 가는지 등을 먼저 이야기한다. 그런 내용을 실제 대사에 녹이기도 한다. 팀워크에 도움이 된다.” 성우들이 연기 열정을 쏟아내기 전, 분위기를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시간이랄까.

그 뒤로도 한참 ‘인공지능 합성음성’, ‘목소리의 저작권’, ‘중국드라마 <삼국지>의 대단한 작품성’, ‘국외 목소리 시장의 실태’ 등에 관해 이야기가 오갔다. <와이파이 삼국지>에 관한 것은 “오늘 나오는 마량이 ‘백미’라는 표현이 있게 한 사람이로구먼” 정도. 기자가 먼저 조바심이 났다. ‘대사는 서로 언제 맞춰 보나요?’, ‘녹음 전 대화가 진짜 도움이 되기는 하는 건가요?’

오전 11시20분, 10명 넘는 성우들이 녹음실 ‘아르에스(RS)-15’에 모였다. <와이파이 삼국지>는 월요일과 금요일 오전 녹음을 진행한다. 1시간에 14분짜리 라디오 드라마 3편을 녹음한다. 성우들은 배우처럼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고, 분장할 이유도 없다. 드라마 촬영 현장과 차이가 크다. 변화가 없다. 과연 무엇을 써야 한단 말인가. 잘못 찾아왔나 싶은 후회가 밀려올 즈음 스튜디오 바깥에 녹음 시작을 알리는 빨간색 ‘온 에어’ 표시등이 켜졌다.

<와이파이 삼국지>에서 해설을 맡은 강수진 성우가 녹음을 하고 있다. 이정연 기자
“천하란 나누어진 지 오래면, 합쳐지고 합쳐진 지 오래면, 나누어진다.”

강수진 성우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울렸다. <와이파이 삼국지> 286화 녹음의 막이 올랐다. 소름이 오소소 올라왔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 어린 시절 추리 소년을 꿈꿨던 이라면 “아, 그 탐정!”이라며 물개 박수를 치게 할 그 주인공의 목소리였다. 강수진 성우는 애니메이션 <명탐정 코난>에서 주인공 남도일의 목소리를 맡아 연기한, 31년 경력의 베테랑 연기자다. 소름이 돋은 건 목소리 때문만은 아니다. 분명히 리허설 때는 대사를 주고받거나 목을 가다듬는 제스처도 없었는데, 망설임 없이 터져 나온 그의 목소리는 몸 전체의 피부로 전해지는 듯했다.

녹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목소리 연기의 향연이 펼쳐진다. 이 드라마에 참여한 프리랜서 성우(한국에서 성우는 각 방송국의 공채를 거쳐 경력을 시작하고, 전속 성우 2년 계약이 끝난 뒤에는 프리랜서 성우로 활동한다)만 7명이다. 강수진 성우와 함께 홍진욱(조조), 박영재(유비), 남도형(관우·이적), 조민수(장비), 이자영(제갈량), 이규창(주유) 등 유명 성우들이 여럿 출연한다. <한국방송> 전속 성우들도 함께 나온다. 카메라는 없지만, 온몸과 온 얼굴로 연기한다. 그 표현력은 목소리로 응축돼 뿜어져 나온다.

성우 연기의 매력이 이런 데 있구나! 감탄하는 와중, 그 순간이 왔다. 제일 궁금했던 순간이었다.

유비와 노숙이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이다. 강수진 성우가 “그렇게 만나지 말라고 바랐는데 만났네, 만났어”라고 해설을 한다. 귀만 쫑긋 세웠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유비), “아니, 저녁 만남도 아니고 오찬을?”(노숙), “특별히 만수르 세트를 준비했습니다.”(유비), “현금 없으면 못 먹는다는 그 만수르 세트.”(노숙)

이윽고 눈을 크게 떠 녹음실을 보니 유비도 박영재 성우, 노숙도 박영재 성우가 아닌가! 티브이 드라마 <셜록>의 존 왓슨의 목소리를 연기한 박영재 성우다. 목소리만 들었을 때는 분명히 2명이었는데, 실제 연기한 이는 1명이었다. ‘1인 2역’의 순간을 목격했다.

사진 <한국방송> 누리집 갈무리.
라디오 드라마에서 이런 경우는 부지기수다. 그런데 <와이파이 삼국지>는 조금 더 특별하다. 기존 라디오 드라마 등에서는 1명의 성우가 여러 인물을 연기하면, 그 목소리가 확실히 다르게 들릴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김 피디는 딱히 그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 장비 역을 맡은 조민수 성우는 “여러 인물의 대사를 동시에 치다 보면 감정이 부딪힐 수도 있고, 목소리가 섞이기도 하는데 오히려 그런 부분을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분위기다. 그 자체를 재미 요소로 가져가는 게 있다. 예를 들어 손권, 손책, 손견이 동시에 등장하는데 이 역할을 1명의 성우가 한다. 비슷하게 들린다면, ‘같은 집안이니까 비슷하겠지’라는 식이다”라고 말했다.

김호상 피디는 엔지(NG)가 나면 아주 드문드문 말을 보탰다. “이 부분은 감정을 너무 잡지 말고 들어가자고요.” “화나는 감정이 고조되는 걸 좀 정확하게 드러냈으면 좋겠네요.” 연기 지시는 최소화한 느낌이다. 김 피디는 “이 드라마의 원작은 고전이지만, 라디오 드라마 자체는 ‘현대물’을 지향한다. 그래서 성우들이 어떤 캐릭터를 가져와도 상관없다. 제갈량 역을 여성인 이자영 성우가 맡는 것도 그렇고, 최대한 자유롭게 열어두는 것을 표방한다”고 말했다.

‘현대적’인 삼국지. 그 특색이 드러나는 지점에 몇 번이나 “피식” 웃음이 났다. 전투 장면 뒤에 방탄소년단의 노래 ‘안판만’이 나오고, 홧병이 난 주유가 등장한 뒤 ‘아파’라는 가사의 노래 메들리가 나온다. ‘이적’이라는 등장인물이 나오자 가수 이적이 활동한 밴드 패닉의 ‘왼손잡이’가 배경 음악으로 나오는 데서 웃음이 빵 터졌다. 게다가 이적 역의 남도형 성우는 가수 이현우와 비슷하게 목소리를 연기해서 자꾸 대본과 성우와 들리는 목소리를 번갈아 확인해야 했다.

김호상 피디의 전략은 성공한 듯하다. “라디오 드라마는 14분 분량의 스낵 콘텐츠다. 한 회마다 재미있는 포인트를 줘야 한다. 그래서 배경 음악도 뻔해서는 안 된다. 장르 가리지 않고 최신 음악을 쓰는 이유다. 정치적인 풍자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대사 안에 녹인다. 누구나 들어도 웃을 수 있는, 개그 요소를 넣고자 한다.” 이런 노력을 팬들도 모르지 않는다. <와이파이 삼국지> 팬들은 적극적으로 이 라디오 드라마를 즐긴다. 한국 성우 덕후 최유민씨는 성우마다 연기를 모아 에스엔에스나 블로그에 공유한다.

<와이파이 삼국지> 방송 1돌을 맞아 팬들이 보낸 케이크. 사진 김호상 <한국방송> 라디오 피디(PD) 트위터 갈무리.
지난 3월 <와이파이 삼국지> 방송 1주년에는 팬들의 선물 세례도 받았다. 제갈량 역의 이자영 성우는 “팬들께서 주요 배역 이름과 명대사를 새긴 텀블러를 선물로 주셨다. 정말 감사했다”고 말했다. 조민수 성우는 “성우를 그저 신기하게만 보고, 뭘 하는지 잘 모르는 분들도 있는데 팬들이 있어 힘이 많이 된다. 거의 처음 겪는 일이라 얼떨떨할 때도 있지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녹음이 시작된 지 1시간이 넘어가고, 막바지에 이르자 각 성우의 목소리가 귀에 익숙해지는 듯했다. 성우의 멋진 목소리가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멋진 캐릭터가 들려온다. 김호상 피디는 라디오 드라마를 비롯한 오디오 콘텐츠의 힘을 믿는다. “라디오는 속일 수 없다. 누군가와 1시간 정도 이야기해보면 알게 된다. 그 사람이 진심으로 이야기하는지 아닌지. 목소리는 속일 수 없다. 결국 라디오는 진실을 전달하는 매체라는 믿음은 변함없다. 외국에서 오디오 콘텐츠 소비가 늘고 있는 걸 보면 그런 믿음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목소리 목구멍에서 나는 소리. 목소리는 폐에서 나온 공기가 성대를 통과하고 진동하면서 만들어진다. 1900년대 초 라디오가 발명되면서 목소리 등이 담긴 오디오 콘텐츠는 퍼지기 시작했다. 티브이(TV) 대중화로 라디오 등의 매체는 외면 받았지만, 최근에는 개인 인터넷 라디오 방송, 오디오 북, 팟캐스트 등 스마트폰으로 즐길 수 있는 오디오 콘텐츠가 더욱 다양해지고 있다.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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