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3.27 19:52
수정 : 2019.03.28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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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카툰캠퍼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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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우아한 노년
시니어 만화 창작학교에서 만화 동아리로
추억 깃든 음식 이야기 담은 `누나들의 밥상'
“만화 배우니 마음이 부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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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카툰캠퍼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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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들이 모였다! 평균 나이 72살. 그들은 시니어 아마추어 만화가다. 기획자와 작가 등 만화 전문가가 모인, 경기도 부천시에 있는 ‘카툰캠퍼스’는 2016년 1월 시니어 만화 창작학교를 열었다. 만화학교의 학생 7명은 수업을 마쳤지만, 만화를 계속 그리고 싶었다. 카툰캠퍼스는 학생들의 성화에 그해 7월 시니어 만화 동아리 ‘누나쓰’를 결성했다.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봉사활동까지 펼치고 있다. 누나쓰 결성 뒤 7명의 구성원은 음식을 주제로 꾸준히 만화를 그려갔다. 누나쓰의 만화 모음집 <누나들의 밥상>이 그 결실이다. 70여년 인생 속 잊히지 않는 음식과 추억을 만화에 담았다. 7명의 시니어 만화가가 그려낸 맛깔스러운 음식 만화 중 주요 장면들을 갈무리해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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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을 전해주는 장어-김옥순(73) 만화가 전남 목포에서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휴일이면 아버지와 함께 목포 앞바다로 갔습니다. 바위에서 하는 낚시는 무섭기도 하고, 재미없어 보이기도 했지만 아버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지루할 새가 없었습니다. 장어를 낚아 올려 집에 가져가면 어머니는 간 양파와 다진 마늘과 생강, 파 그리고 참기름 등을 넣어 만든 갖은양념을 손질한 장어 위에 여러 번 발라 아주 약한 불에 정성스럽게 구워 밥상에 올리셨습니다. 장어를 많이 잡지 못한 날이면 부모님은 저를 불러 “공부하느라 힘들지? 동생들 오기 전에 먼저 많이 먹어라”하시며 챙겨주셨죠. 그림 카툰캠퍼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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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부의 꽃게찜-김경자(65) 만화가 1972년, 47년 전의 일입니다. 서울에서 전남 영광에 사는 언니를 만나러 갔죠. 기차를 타고, 시외버스를 타고, 시내버스를 타고서야 언니가 사는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형부는 부지런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마을 앞바다에 꽃게를 잡으러 나갔지요. 서로 얼굴도 모른 채 아버지끼리 혼담을 나누다 부부의 연을 맺은 언니와 형부의 결혼 뒷이야기를 나누던 때, 형부는 꽃게를 한 아름 잡아 왔습니다. “처제, 오늘 이거 다 먹어야 서울 갈 수 있어”라고 형부는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형부는 손수 꽃게찜을 차려냈지요. 꽃게 살까지 발라주는 참 고마운 형부였습니다. 그로부터 1년도 되지 않아 형부는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때 가시는 길을 마중하지 못한 아쉬움은 두고두고 남습니다. “형부, 하늘나라에서 잘 살고 계시지요?” 그림 카툰캠퍼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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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 김치찌개-차영순(77) 만화가 예전에는 돼지고기를 요즘처럼 많이 먹지 않았죠. 고기가 들어간다고 하면 ‘소고기’를 더 많이 떠올렸지요. 어머니가 해주시던 찌개나 국에 소고기가 아주 조금이라도 더해지면 다 맛있던 기억이 나네요. 그림 카툰캠퍼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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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저 할머니로 사는 것 같지 않아요”
차영순(77) 만화가는 “노인복지관이 나에게는 종합대학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복지관에서 만화뿐만 아니라 컴퓨터는 4년, 사진은 5년을 배웠다. 차씨는 “만화를 배우면 종로와 을지로에서 여고 시절 마주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4·19혁명을 제대로 표현하게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있었다. 그런데 그 정도를 그리려면 멀었다.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있다. 차영순씨는 “이렇게 살다 보니 그저 집에만 있는 70대 ‘할머니’로 사는 것 같지 않다. 복지관에 갈 때 사람들이 어디 가느냐고 물으면 ‘학교 간다’고 답한다”고 말했다.
남을 돕는 활동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가장 뿌듯한 활동은 비슷한 또래의 친구가 병원에 갈 때 함께 가는 ‘동행 봉사’다. “어렸을 때 몸이 아파 많은 도움을 받아서 그런지 나이가 들어서는 오히려 건강하다. 받았던 도움과 사랑을 봉사하며 갚아 가는 중이다.”
■ 만화 자서전을 그리고 싶어요
노영자 만화가는 올해 78살로 ‘누나쓰’의 맏언니다. 그는 어렸을 적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만화 잡지 <만화세계>를 닳도록 보며 자랐다. “어렸을 때 보기만 해도 좋아했던 만화를 이렇게 늙어가면서 배웠다는 게 행복하다. 만화를 그리니 상상한 것과 마음속의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게 가장 기쁘고 재미있다”는 노영자씨다.
그는 만화가이자 도전가다. 맏이였지만, 딸이라는 이유로 배움을 멈춰야 했다. 그러나 이제 멈추지 않는다. 65살에는 방송통신대에 입학해 4년만에 졸업했다. 만화를 배우고 좀 더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 복지관에서 데생도 따로 배우고 있다. 멈추지 않는 배움의 폭주 기관차다. 만화가로서의 꿈도 야무지다. “사진을 배우면서 사진 자서전을 만들었다. 만화를 그려보니 만화로 자서전을 만들고 싶다. 요즘은 글쓰기도 함께 배우고 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친 뒤 그림 하나를 기자에게 보내왔다. 노씨가 102살이신 어머니 구옥진씨를 그린 그림이다. 노영자 만화가도 그의 어머니처럼 오래오래 건강하길 소원한다. “요즘은 봉사활동 다니면서 어린이 캐리커처를 그리고 있다.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누나쓰 활동을 이어갈 거다. 꼭 그렇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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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린물은 엄마의 사랑-서영희(70) 만화가 냉장고가 없던 시절, 한여름 더위를 쫓기 위해 어머니는 사카린 녹인 물을 주셨습니다. 우물에서 길어 올린 시원한 물에 이모에게 얻어 보관해 둔 사카린을 조금 녹인 ‘단물’은 여름철 제일 맛있던 음료수였죠. 그림 카툰캠퍼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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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를 그리면 손이 떨리지 않아요
“이 나이에 잃을 거밖에 없는데 만화를 배우니 나눠줄 게 생겼다. 마음이 부자가 된 듯하고, 더 평화로워졌다.” 서영희(70) 만화가의 목소리에 생기가 넘친다. 만화 그리기가 서씨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8년 전 파킨슨병을 앓기 시작했다. 악화만 되던 병세가 호전되기 시작한 건 만화를 배우면서다. “가장 안 좋았던 때랑 비교하면 지금은 70% 정도 나은 것 같다. 만화를 그릴 때는 손은 떨지 않는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제 다리의 힘도 기르려고 지하철 안에서도 앉지 않고 일어서 있으려 한다.”
그의 만화에서는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서씨는 인터뷰 중에도 목이 멘 듯 말을 잠깐 잇지 못했다. “음식 만화를 그리면서 우리 ‘엄마’를 많이 생각했다. 만화를 그리기 위해 과거 추억 여행을 하면서 그 당시의 어머니를 이제야 다시 보게 됐는데, 그게 정말 좋았다”는 서영희 만화가다. 그는 앞으로 계속 만화를 그릴 계획이다. 책을 펴내고 싶은 욕심도 있다. “음식 만화책을 하나 내고 싶다. 간단하지만 조미료를 쓰지 않는,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젊은 분들에게 소개하고 싶다.”
나이 사람이 세상에 나서 살아온 햇수. ‘100세 시대’를 맞아 나이와 관계없이 근사하게 제2의 인생을 사는 이들이 늘었다. 젊은이들의 전유물로 알려졌던 패션 분야에 도전한 60~70대 시니어 모델들이 대표적이다. “가슴 뛰는 일을 좇는다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게 이들의 조언이다.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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