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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3.21 09:25 수정 : 2019.03.21 10:05

얇게 깎기 시범을 보이는 이근수씨. 자세와 호흡을 가다듬고 일정한 힘으로 당기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1500명 모인 ‘전국 평대패 얇게 깎기 동호회’
회장 이근수씨는 4미크론까지 깎아 봐
머리카락 한 가닥도 얇게 켤 정도로 예리해
“목공의 시작과 끝은 대패”

얇게 깎기 시범을 보이는 이근수씨. 자세와 호흡을 가다듬고 일정한 힘으로 당기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취미 중에서도 목공은 생산적인 활동으로 꼽힌다. 하지만 ‘전국 평대패 얇게 깎기 동호회’는 좀 별나다. 얇은 대팻밥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얇아도 보통 얇은 게 아니다. 한 자릿수 미크론(?)에 도전한다. 미크론은 1㎜의 1000분의 1에 해당하는 길이 단위다. 목공에서 대팻밥을 얇게 뽑는다고 딱히 이득은 없다. 남 보기에는 하등 쓸데없는 일에 골몰하고 재미를 찾는 이들이 궁금했다.

지난 9일 토요일. 전라북도 익산시 어양동 이근수(54)씨의 집을 방문했다. 2014년부터 대패로 얇게 깎기 수련을 해온 이씨는 2016년 말 ‘전국 얇게 깎기 동호회’라는 포털 비공개 카페를 개설했다. 2018년 초에 공개 카페로 전환했고, 현재 회원 수는 1500명이 넘는다. 카페에는 목공용 수공구 중에도 대패에 관한 이야기가 활발하게 오간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패는 그저 표면을 매끈하고 평평하게 다듬는 용도에 머물러있다. 하필 왜 대패에 빠졌을까?

“나무를 만지고 공구를 다루면서 느끼는 편안함이 있다. 하지만 만들고 싶었던 것들, 가구 등을 다 만들고 나면 할 일이 없다. 둘 공간도 없다. 선물하기도 여의치 않다. 판매 목적이 아닌 아마추어의 ‘취목’(취미 목공)에 한계가 오는 시기다.” 이씨의 집은 가구는 물론, 천장과 벽면까지 편백나무다. 문틀과 장판만 빼고 다 이씨의 손이 닿았다.

이근수씨가 만든 편백나무 장롱 한 칸은 대패를 위한 공간이다.
“나무의 부드러움, 칼의 날카로움과 두려움이 다 있는 게 대패다. 하루 이틀이면 기본적인 사용법을 배울 수 있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그때부터 문제는 달라진다. 오래된 격언 중에 ‘목공의 시작이 대패고 끝이 대패’라는 말이 있다. 누구도 대패에 관해 ‘다 알았다’라고 함부로 말 못 한다. 그 정도로 깊이가 있다.”

목공에 쓰는 수공구 대패는 크게 서양식과 일본식으로 나뉜다. 우리가 주로 쓰는 건 일본식 대패. 쓰기 위해선 여러 절차가 있다. 우선 나무에 닿는 대팻집 바닥 면과 대팻집에 들어가는 어미 날의 뒷날을 평평하게 만들어야 한다. 틀어지거나 휘어진 수평을 맞추는 과정을 ‘평을 잡는다’고 한다. 날은 숫돌에 간다. 숫돌이 평평하지 않으면 날의 평을 잡을 수 없다. 그래서 숫돌의 평도 잡아야 한다.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예리하게 연마한 대팻날은 머리카락도 포 뜰 수 있다.
얇게 깎기 시범에 앞서, 은색으로 드러난 대패 어미 날의 연마를 설명하던 이씨는 기자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청했다. “대팻날로 머리카락의 포를 뜰 수가 있다. 연마를 잘해야 대팻밥도 잘 나온다.” 머리카락의 굵기는 보통 50~70미크론 사이다. 날에 대고 쓱 밀었더니 한 가닥의 머리카락이 두 가닥으로 갈라졌다. “헉” 소리가 날 만큼 날카롭다. 일반적인 대패 사용에서는 이만큼 예리하게 갈 필요는 없다고 한다. 그만큼 날이 무뎌지기 쉽고, 무뎌지면 또 연마해야 한다.

날을 넣기 위해 대팻집을 망치로 두들기던 이씨가 말했다. “눈에는 안 보여도 나무는 어딘가 부풀어 오른다. 그 평을 다시 잡아야 한다. 몇 미크론의 오차도 용납할 수가 없다. 얇게 깎기인들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 몇 미크론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듣고 있으면 묘하게 수긍이 간다.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3초가 지나면 다시 의문이 차오른다. 대체 한 자릿수 미크론의 대팻밥을 뽑는다는 것의 의미가 뭘까?

“내가 최고로 얇게 빼본 것이 4미크론. 얇게 깎기에서 한 자릿수 진입을 한다는 의미는 등산 마니아가 히말라야 정상에 올라가는 정도랄까! 가끔 얇게 깎기를 왜 하느냐 질문을 받는다. 회원들이 대신 대답을 해준다. ‘히말라야를 뭐하러 올라가지? 산에 왜 올라가지?’ 그냥 끌려서, 좋으니까 하는 거다. 카페 회원 대부분은 중년 남자들이다.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히말라야 등반은 못 해도 이거는 한다. 그런 취지다.”

이씨가 뽑아낸 대팻밥 한 줄을 들고 손 위에 올려놓으니 손가락이 비친다. 제법 얇아 보이는데, 이 정도로는 제법 잘했다고 말할 수 없단다. “그건 25미크론 정도다. 오늘은 15미크론쯤은 갈 수 있을 것 같다.” 미세측정이 가능한 전자 게이지 기구로 대팻밥 두께를 재봤다. 24미크론이다. 이씨가 가늠한 수치와 겨우 1000분의 1㎜ 오차가 난다.

게 깎기의 제철인 6월에서 10월 사이는 훨씬 얇은 대팻밥을 뽑을 수 있다.
이씨의 카페에는 ‘미크론 클럽’이라는 하위분류가 있다. 무슨 뜻인가 했는데, 이제 이해가 간다. 축구선수가 에이(A)매치 출장 100회가 넘어가면 ‘센추리클럽’에 가입하듯, 한 자릿수 미크론으로 대팻밥을 뽑아 본 이들의 영예로운 모임이랄까. 얇게 깎기도 적절한 시기가 있단다. 공기 중 습도 조건이 적합한 6월부터 10월까지다. 습도가 70%가 넘는 장마철이 최고로 좋다. 이씨는 6월에 얇게 깎기를 하기 위해 대패를 세팅하며 계속 준비한다. 마치 올림픽대회를 앞둔 국가대표 선수 같다.

비싼 대패가 있으면 얇게 깎기는 더 수월해질까? “아무리 좋은 대패를 가져도, 대패를 다루는 실력이 없으면 그 대패는 싸구려 같다. 회원들에게도 처음 중고 대패나 정크 대패로 시작하라고 말한다. 중고 대패는 여러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만, 고치면서 대패를 익혀나가기에 최고다. 취미 동호회에서 ‘장비 빨’이 실력으로 통하는 경우가 많다. 사진동호회는 카메라, 등산 동호회는 동네 뒷산을 가도 히말라야 등반용 장비를 갖춘다. 옳지 않다.”

동호회에서 얇게 깎기의 결과물인 대팻밥을 공개하는 회원은 열댓명 남짓이라고 했다. “더 얇게 뽑겠다는 각오가 없으면 대팻밥을 공개하지 못한다. 일본엔 대패 오타쿠(오덕후)가 많다. 일본 최고 기록은 2.5미크론이다. 지금은 돌아가신 분이고 대장장이였는데, 2.5미크론 두께의 대팻밥을 빼기 위해서 25년을 투자했다. 대장장이가 좋은 날을 만들었으면 누군가는 증명해 줘야 한다. 일본의 얇게 깎기 시작은 그런 차원이었다. 나는 일본 대패만 다루는 건 아니다. 한국산 날에 애착이 있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대패는 ‘강력대패’, ‘맹호대패’ 등이다. 어떤 이가 강력대패의 수준을 힐난해서 그 대패로 나무를 얇게 밀어서 강력대패의 성능을 증명한 적이 있다.”

대팻밥의 두께를 측정하는 기구. 사진의 대팻밥은 41미크론이다.
이씨는 얇게 깎은 대팻밥을 따로 보관하지 않는다. 기념으로 달라는 사람에게 보낸 적은 있지만, 아무 쓸모가 없어서 버린다고 했다. 대패에, 그리고 얇게 깎기에 바치는 열정은 돈이 되지 못한다. 말도 안 되는 수치에 도전하고, 그 과정에서 얻는 몰입감을 즐길 뿐이다. “젊은 사람이 한다고 하면 말리고 싶다. 수익이 나는 취미가 아니다. 그냥 ‘오춘기’가 온 중년 남자라면 이거 한번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엄청 깊이 빠질 거다.”

이씨의 곁에서 노트북에 무언가 쓰고 있던 아내 정은미(51)씨가 미소 지으며 말한다. “몰입하면 쫓겨날 것 같은데.” 호흡을 죽이고 대패를 당기던 이씨도 아내의 얘기에 웃음이 터진다. 정은미씨는 자신이 동호회 탄생에 큰 공헌을 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얘기하는 모습은 좋다. 하지만 내가 남편의 말을 안 들어주니까, 남편이 카페를 만든 것이다.(웃음) 알아서 발전한다.” 아내 정씨의 취미는 공부와 글쓰기다. 부부간에도 관심사를 분리하고 거리 두기를 해야 나이 들어서도 계속 친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정씨의 주장이다.

‘전국 얇게 깎기 동호회’는 ‘전국 마른 김 협회’만큼이나 호기심이 발동하는 이름이다. 진지하고, 사실 그대로인데도 빵 터지는 작명이라고 했더니 이씨가 답한다. “집안 내력인가 싶다. 요즘 핫한 분야인데, 드론 축구 아시나? 제 동생(이범수 캠틱종합기술원 팀장)이 게임 룰과 장비를 개발한 드론 축구 창시자다. ‘대한드론축구협회’를 만들고 2025년 드론 축구 월드컵을 추진하고 있다.”

이씨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되지 않는 모든 일은 “뻘짓(허튼짓)”이라고 껄껄 웃었다. 그러면서도 대패, 그리고 얇게 깎기에 대한 진지한 태도는 한 점 흐트러짐이 없다. 이씨는 “대패는 평생 풀어야 할 숙제”라고 말했다. 갓 뽑은 싱싱한 대팻밥 한 줌을 얻어왔다. 편백나무의 싸한 향이 감돈다. 쓸모는 없지만, 돌돌 말아 서랍에 넣었다.

글·사진 유선주 객원기자 oozwish@gmail.com

나무 집을 짓거나 가구, 그릇 따위를 만들 때 재료로 사용하는 재목. 소프트 우드는 노송나무, 소나무 등의 잎이 가늘고 좁은 침엽수종. 하드 우드는 고무나무, 참나무, 호두나무, 단풍나무 등 잎이 평평하고 넓은 활엽수종의 목재다. 목공들이 쓰는 수공구로 대패, 끌, 톱 등이 있다. 현대 목공은 많은 작업이 전동 공구로 이루어지지만, 자신의 필요에 맞게 길들이고 변형하는 수공구를 함께 쓰는 목공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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