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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1.23 09:55 수정 : 2018.11.23 19:18

연극 <오아시스세탁소 습격사건>. <한겨레> 자료사진

커버스토리┃세탁소
과거 빨래터는 공적 공간
지금 세탁소는 진화 중
영화·연극의 소재가 되기도
연극 <오아시스세탁소 습격 사건> 인기
여성 문제 다룬 영상물도 있어

연극 <오아시스세탁소 습격사건>. <한겨레> 자료사진

박수근 화백의 <시장의 사람들>이 경매에 나서면서 박수근 화백 작품의 최고가 기록 경신에 도전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이전 최고가 작품은 냇가에 쪼그리고 앉은 여성들의 모습을 그린 <빨래터>(45억2000만원)였다. 세탁소 이전에는 빨래터가 있었다. 사적 공간에서 빨랫감을 처리하는 게 아니라, 공용 공간(정확히는 대자연)에서 여성들이 모여 앉아 가족의 빨래를 해치웠다. 독성이 강한 양잿물을 조심해 쓰고 빨랫방망이를 휘두르는 이 시간이 과거 여성들이 누릴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사교 시간이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빨랫감을 만들어낸 가족, 특히 시집 어른들이나 남편에 대한 투덜거림, 소문의 전달 역시 이런 공간을 통해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한바탕 어려움을 토로하고는 새로운 빨랫감을 만들어낼 집으로 돌아가는 일.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최소한 말이라도 할 수 있었다는 딱 그만큼의 만족감. 여성들의 한풀이 공간이기도 했던 빨래터.

빨래터가 현대적으로 변용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빨래방(혹은 무인 세탁소)은 빨래를 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면에서 빨래터와 다르다. 여성만큼이나 남성이 많이 드나들고 가족의 빨래를 위해 오는 이들이 드물지는 않겠으나, 주요 이용자층은 혼자 사는 사람들이다. 세탁기와 건조기를 사용할 수 있는 빨래방은 집 안에 세탁기나 건조대를 설치할 공간이 마땅치 않은 이들에게 특히 인기를 끈다.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는 이사할 때 살림살이에 세탁기를 아예 셈에 넣지 않는 경우도 많으며, 공동주택의 경우 지하 세탁실 설비는 필수다. 일본의 비즈니스호텔은 호텔 1층에 세탁실을 반드시 갖추고 있다.

세탁소의 경우는 또 미묘하게 다르다. 빨래방보다는 한국에서 더 오래 존재해 온 공간으로, 일상적인 세탁보다는 계절이 바뀔 때, 혹은 물세탁이 어려운 고급 옷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이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더미를 들고 오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골목길을 돌며 “세~탁!”을 외치는 목소리를 기억하시는지. 그런데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도, 세탁하는 공간은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이 미묘하게 섞인 형태로 인식되어왔다. 미국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에는 “어느 집에나 더러운 빨랫감은 있다”는 말이 나오는데, 상징적인 표현 아닌가.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집이라 해도 남이 못 보는 데 숨겨놓은 지저분한 문제는 있기 마련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세탁소, 빨래방, 세탁실이 등장할 때는 대체로 주인공이 느슨하게 ‘긴장을 풀고’ 일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때다. 주인공이 세탁소 주인과 몇 마디 나누는 장면은 결정적 대목이라기보다는 쉼표 같은 인상을 주곤 한다. 박중훈, 안성기 주연의 영화 <라디오 스타>에는 영월 시내의 ‘곰세탁소’라는 곳과 그 주인이 등장하는데, 창문에 쓰인 ‘쎄무잠바’ ‘가죽잠바’라는 말이 세탁소가 지역 주민들 틈에서 살아온 오랜 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이유로, 서울에서는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이 본격화되는 신호로 동네 세탁소가 사라지는 타이밍을 꼽는 이들도 있다. 세탁소는 보통 1층에 있는데, 주택가를 개조해 상업 시설이 들어서면서 이용자가 줄고 임대료가 오르면서 세탁소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것이다.

영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한겨레> 자료사진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 1세대가 선택한 생업 중 하나가 세탁소라는 점도 특징적이다. 세탁소, 택시 운전, 동네 잡화점 운영 등은 미국과 유럽에서는 이민자들의 직업이다.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이 만든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1985)라는 영화는 영국으로 이주한 파키스탄인의 삶을 그렸다. 주인공 오마르의 아버지는 고국인 파키스탄에서는 좌파 지식인이자 저널리스트로 살다 영국으로 이주한 뒤 잘 적응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자살 이후 오마르는 세탁소 관리인으로 일을 시작하며 영국 사회에 발을 디딘다. 오마르는 어린 시절 알고 지냈던 조니를 만나고, 두 사람의 관계는 세탁소에서 일하는 동료이자 연인 관계로 발전한다. 이민자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또 그중 어떤 이들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주류사회의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관행 속에서 삶의 가능성을 찾는다면 어디에서 발견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작품이다.

연극 <오아시스세탁소 습격사건>은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처럼, 일상의 기능을 위해 존재하는 듯하던 세탁소를 활극의 무대로 대변신시켜 2003년 초연 이후 꾸준히 관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무대가 세탁소 내부라 비닐을 씌운 옷들이 빼곡하게 걸린 가운데 관객을 맞는 이 작품은, 죽음을 앞둔 어머니가 남긴 ‘세탁’이라는 말을 듣고, 숨겨진 유산을 찾고자 세탁소에 맡긴 빨래를 뒤지려고 한밤중에 습격하는 일가와 세탁소 주인 강태국의 이야기다. ‘더러운 것을 (최소한 겉으로 보기엔) 깨끗하게 만든다’는 뜻에서 세탁이라는 말이 ‘돈세탁’ 같은 용도로 쓰인다는 점을 감안하면, 탐욕스러운 인간들을 <오아시스세탁소 습격사건>이 어떻게 다룰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세탁소 이야기를 애잔함이라는 정서를 중심으로 풀어낸 작품으로는 일본영화 <란도리>도 있다. 주인공의 할머니가 운영하던 무인 세탁소의 문을 열고 닫는 그는 매번 빨래 하나씩을 잊고 가는 여자 손님이 있음을 알게 된다. 더불어, 빨랫감을 들고 오는 동네 사람들의 사연을 차분하게 경청한다. 가족이 있는 집에서 세탁물을 처리하기 눈치 보여, 들고 나오는 이들도 있는 법이다. 세탁물은 남 보이기 부끄러운 것인 경우도 많으니, 빨래를 들고 무인세탁소를 찾는 이들의 사연만 모아도 매일 5t 트럭을 가득 채울 수 있으리라.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세탁소의 여자들>. <한겨레> 자료사진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세탁소의 여자들>. <한겨레> 자료사진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세탁소의 여자들>이라는 영상 네 편이 있다. 닷페이스와 봄알람이 텀블벅 후원을 통해 공동 제작한 이 영상은 <유럽 낙태 여행>의 네 저자 우유니게, 이두루, 이민경, 정혜윤이 세탁소 안에 둘러앉아 토크를 주고받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낙태죄 폐지를 둘러싼 논란에 대한 여성들의 이야기. 그 시작은 “낙태죄가 폐지되면 모두가 낙태를 할 거다”라는 주장에 반격하면서부터다. “누가 낙태를 하고 싶어 해? 낙태를 하고 싶어서 섹스하는 건 아니잖아.” 여성의 몸에 대해 여성이 선택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이들의 대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유럽에서의 취재 내용 등이 더해져 이어진다. 그 옛날 빨래터에 모인 여성들이 그저 한풀이 실컷 하고 집에 가서 다시 숨죽여 살았어야 했다면, <세탁소의 여자들>은 세탁소라는 공간을 빌려 피임과 낙태라는 여성의 권리를 위해 세상을 바꾸고자 직접 카메라 앞에 앉았다. 현대 기술의 발전은 세탁 기술도 바꾸고 세탁 문화도 바꾸었으나, 여성의 권리에 대한 인식은 너무 느리게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네 편의 영상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다혜 작가·<씨네21> 기자

세탁소 돈을 받고 남의 빨래나 다림질 따위를 해 주는 곳.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전 대표는 정계 입문 당시 ‘대구 세탁소집 둘째 딸’을 내세워 성실한 노동자의 자식이라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가수 윤도현도 세탁소를 운영하던 부모의 곁에서 음악인의 꿈을 키우던 시절을 노래의 랩 가사로 옮긴 바 있다. 2018년 11월 기준, 세탁업으로 등록된 업체는 전국 2만8천여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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