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6.20 19:50
수정 : 2018.06.20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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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나물 채취용 모노레일을 타고 일하는 김승환씨 부부. 김승환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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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커버스토리│ 독도·울릉도 여행
20여년 평범한 도시인으로 산 김승환씨
행복 찾아 울릉도로 10년 전 이주
오징이잡이 돕자 섬 주민들 구성원으로 인정
아내와 스노클링하는 울릉도 여름은 최고
"행복은 욕심 버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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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나물 채취용 모노레일을 타고 일하는 김승환씨 부부. 김승환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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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도시 생활에 지친 이들이 너도나도 찾던 섬이었다. 섬이 제공하는 고립과 단절에서 그들은 고독하지만 잔잔한 행복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젠 찾는 이가 많아 제2공항이 곧 생길 정도로 더는 고즈넉한 섬이 아니다. 가수 이장희가 이주해 유명해진 섬 울릉도. 요즘 제주의 대안으로 울릉도가 떠오르고 있다. 안 가본 사람은 있으나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는 아름다운 섬, 그 섬에 이미 10년 전 이주한 도시인 김승환(53)씨가 있다. 케이비에스미디어(KBS미디어. 옛 KBS영상사업단)에서 20여년 일했던 그가 ESC에 보내온 울릉도살이는 소박하고 행복한 삶의 기록이다. 현재 ‘울릉도농부해맑은농장’을 운영하며 건강한 울릉도 먹거리를 육지에 소개하고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 20여년. 지칠 줄 모르고 달렸다. 조직의 일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한 평범한 삶이었다. 하지만 문득 뒤돌아본 나의 뒷모습에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느 날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아들과 학교운동장에 산책하러 갔다가 씁쓸한 경험을 했다. “몇 동에 사세요?”, “거기는 몇 평인데!”, “어떤 차 타세요?” 아들 친구는 어른도 물어보기 힘든 질문을 천진난만하게 내게 던졌다. 어린 친구의 해박한(?) 부동산 정보와 자동차 지식에 쓴웃음을 지며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 대화는 이후에도 머릿속에서 맴돌며 지워지지 않았고, ‘내게 행복은 무엇일까?’란 질문을 하게 했다. 답을 못 찾은 나는 닻을 못 내린 배처럼 떠다니며 긴 시간 몸살을 앓았다.
결국 2008년 4월, 대한민국에서 가장 먼저 해가 솟는 이곳 울릉도 북면 현포로 이주했다. 당장 정답을 찾는 것보다 ‘해보고 싶은 일을 더 늦기 전에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바쁜 직장 생활에도 틈틈이 평촌 농산물도매시장에서 경매와 판매를 하는 삼촌의 일을 도왔던 나다. 물론 아내와 함께였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농산물의 미래에 대해 자주 얘기를 나눴다. 더 늦기 전에 평소 관심 있던 농수산물 판매로 삶의 궤적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두려움은 컸다.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잘 살 수 있을까? 어느날 울릉도에 살고 있던 동서의 초청을 받았다. (처형의 남편, 그러니까 동서는 울릉도가 고향이다.) 그 방문은 내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섬에 반해 버린 우리 부부는 울릉도 정착을 결심했다. 부모의 일방적인 결정에 혼란스러워 할 아들이 걱정됐다. 그래서 아들 스스로 결정하게 하려고 두 번이나 사전답사를 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시작한 귀농 생활이었지만 처음부터 농사를 지었다면 견디지 못하고 육지로 돌아갔을 것이다. 안정적으로 안착하기 위해 선택한 일은 울릉도 특산물 판매였다. 오징어와 호박엿이 모든 것인 줄만 알았던 울릉도는 싱싱한 자연산 해산물과 이른 봄 눈 속에서 싹을 틔우는, 맛과 질이 우수한 산나물과 임산물로 뒤덮인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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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 앉은 김승환씨 부부. 김승환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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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전에 집수리 막노동부터 했다. 사람 귀한 섬이라서 초보 일꾼도 일거리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섬 주민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일로 노동만 한 것도 없었다. 1년 동안 주민들 농사에도 품을 팔았다. 좋은 농작물을 키우고 고르는 법을 처음 글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열심히 익혔다. 아내도 명이 김치 담그기와 절임 방법, 나물 삶는 법을 배웠다. 가을 오징어 철엔 오징어 배를 따는 법, 말리는 법 등을 배우면서 섬 생활에 적응해 갔다.
어느 날 가까워진 동네 형님이 버려지다시피 한 부지깽이나물 밭을 일궈보라는 제안을 했다. 내심 횡재다 싶어 달려들었는데 매일 밤 열정을 불태워도 익숙하지 않은 일에 녹초가 되고 말았다. 일주일 만에 손을 놓아버렸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김을 매지 않으면 잡초가 다른 밭까지 피해를 주니 빨리 하라는 주민의 독촉을 받고 동네 형님에게 “다른 분께 넘기시라” 했다. 이 일은 협동체로 연결된 농촌을 이해하는 데 소중한 경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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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나물을 채취하고 있는 김승환씨. 김승환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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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섬 주민과 어울리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이질적인 존재였다. 고민 끝에 고른 일은 가을 오징어잡이 철에 오징어를 배에서 어판장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매일 오후 3~4시에 출항해 다음날 오전 6~7시에 입항하는 오징어잡이 배의 일은 선원들에게 고된 일이다. 내가 한 일이 그들에게 작은 도움이 됐다. 하루도 빠짐없이 굳은살이 박일 정도로 열심히 했다.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마을 주민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처제 부부도 우리를 보고 결국 울릉도로 이주했다. 이미 처형 부부가 살던 터라, 세 자매가 울릉도에 모여 억척스럽게 서로 격려하며 살게 된 것이다.
비닐하우스 재배가 없는 섬, 울릉도. 채취한 봄 산나물을 절이면 그것을 먹은 이들이 맛있다고 칭찬해줬는데 가슴에서 뿌듯한 쾌감이 올라왔다. 몸을 많이 움직이는 생활은 도시인이 상상할 수 없는 행복감을 준다. 가끔 이곳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를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난다. 바다 일로 거칠어진 섬사람들이 우리를 퉁명스럽게 대하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차를 태워주고 김치를 건네는 이들이 섬사람들이다. 내 우려는 기우를 넘어 무식한 생각이었다. 더 빨리 섬에 이주할 걸 하는 후회마저 든다. 그건 섬의 자연을 만날수록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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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깃대봉에서 바라본 현포해안과 김승환씨. 김승환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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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와 확연히 다른 날씨와 계절은 울릉도의 또 다른 신비다. 여름 태풍을 연상시키는 거센 3~4월의 봄바람, 30도가 넘는 여름이지만 더없이 시원함을 선사하는 그늘 등. 여름이 기다려지는 건 매년 아내와 함께 스노클링을 즐기면서 얻는 기쁨이 크기 때문이다. 관광객이 모르는 한적한 바닷속은 짙푸른 에메랄드빛에 돌돔, 방어 등이 노니는 곳이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처럼 물결 따라 해초가 춤춘다. 가을은 또 어떤가! 설악산처럼 울긋불긋하진 않지만 은은한 파스텔 톤의 가을 단풍은 눈이 부실 정도다. 개인적으로 최고로 치는 풍경은 겨울 설경이다. 한 폭의 동양화다. 하지만 ‘버스 운행은 중단될까? 어르신들은 다니기 불편하지 않을까?’ 이런 걱정부터 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이제 나도 울릉도 사람이 다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섬엔 부모의 직업을 묻는 아이가 없다. 부모가 무슨 일을 하는지, 부자인지,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아도 개의치 않고 우정을 쌓는다. 육지의 지인들은 묻곤 한다. 섬이 지루하지 않으냐고? 비 올 때 하늘색이 다르고, 눈 올 때 또 다르다. 같은 비와 눈이라도 바람 부는 방향에 따라 또 다르다. 가을 하늘의 별들은 쏟아질 듯 빛난다. 지루할 틈이 없다. 변화무쌍한 온라인 시장에서 믿음과 신뢰로 대를 이어 장사하는 가게를 만들자는 작은 소망도 생겼다.
‘나에게 행복이란 무얼까?’가 화두가 되어 선택한 울릉도살이. 행복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라는 큰 진실을 얻었다. 지금 난 행복하다.
글 김승환(울릉도 이주민)
독도·울릉도
동해 한가운데 자리한, 보물단지 같은 대한민국 영토. 삼국시대부터 지켜 온, 경관이 매우 아름답고 신비로운 섬 무리임. 행정구역상 독도는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독도리 1-96번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방한 때 만찬 차림에 ‘독도새우’가 선보이면서 포털 검색어에 오르는 등 독도에 대한 관심이 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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