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8.06.13 22:46 수정 : 2018.06.14 00:40

클립아트코리아.

[ESC] 커버스토리

정치적으로 올바른 욕은 가능할까?
국립국어원도 연구 중
욕 무조건 참으라고 할 순 없어
스트레스·분노 해소에 도움
건강한 대안 욕·욕 앱 활용 추천

클립아트코리아.
‘욕’을 한다. ‘욕’에 대해 취재하면서 지난 5일부터 하루에 몇 번 욕을 하는지 세어봤다. 가장 적은 날은 두 번, 가장 많은 날은 열여섯 번이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은 날은 없었다. 욕은 이렇게나 일상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그러나 누군가 아무렇지 않게 일상적으로 내뱉은 욕이 누군가에게는 깊은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평생 욕을 한마디도 안 하고 살 자신은 없다. 욕을 무조건 참아야 할까? 욕을 하면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를 포기할 수 있을까? 약자와 소수자를 차별하고 멸시하는 욕만 아니면 괜찮은 게 아닐까? 답은 없다. 다만, 이 질문들을 깊이 생각하기 시작한 순간 아무 욕이나 하던 때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한 사람의 말과 글이 그 사람을 드러낸다는 면에서 보면 이 생각은 더욱 강해진다.

“이런 쑥 뿌리 같은 놈!” “한여름 음식물 쓰레기보다 더러운 자식!” 지난 8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회사원 김지원(가명·27), 주영아(가명·29)씨의 대화가 심상치 않다. 그들은 머리를 싸맸다. 욕을 고민한다. 욕은 자고로 ‘내뱉는’ 것인데, 내뱉지 못한다. 친구 사이인 김씨와 주씨가 요즘 만나 자주 하는 이야기는 바로 ‘욕’에 관한 것이다. 이야기는 김지원씨가 지난 3월 겪은 일에서 시작된다. “대학 동창들이 모인 자리였다. 무심결에 ‘X신 같다’라는 말이 나왔다. 한 친구가 언짢은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지원아, 내 앞에서는 그 말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했다. 그때까지 몰랐다. 그 친구는 청각 장애가 있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주영아씨는 자신을 향한 욕을 들은 뒤 고민이 시작됐다. “지하철에서 제 가방을 밀고 가는 한 사람이 작은 소리로 ‘X발X’이라고 내뱉는 소리를 들었다. 흔히 하고, 듣는 말이지만 여성의 성기를 비하해 모욕감을 주는 것임을 알게 된 뒤로는 그 말을 듣기가 싫다. 듣기 싫으니, 성기를 빗대 욕을 하기도 싫어졌다.” 그래서 이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은 ‘정치적 올바름’까지 나아갔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거나 차별받는 그룹을 배제하거나 하찮은 존재로 만들거나 모욕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표현이나 행동을 피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욕은 과연 가능할까? 욕을 하지 않는 게 가장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아니냐는 반문도 나온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배제하고 차별하는 말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 정도는 해야 한다는 의견이 여기저기에서 나온다.

유튜브 1인 창작자(크리에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허챠밍(본명 허민주·28)씨는 “스스로 100% 완전무결하게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나의 말과 글 속에 담긴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혐오적인 표현을 줄이려고 배우고, 노력하는 중이다”고 말했다. 그가 요즘 안 쓰려고 노력하는 말 중의 하나는 ‘미친’, ‘미친 ○○’ 등이다. 가장 많이 쓰던 말이지만, 정신질환자나 그들이 고통받고 있는 질병 자체를 감정의 표현 수단으로 삼아 왔다는 것에 문제의식을 가진 뒤부터 쓰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친구들과 대안을 고민했다. 현재는 ‘썅’이라는 말로 대체하고 있다. 썅은 천한 계급인 ‘상놈’에서 나온 말인데, 적어도 현재는 조선시대 같은 신분제 사회는 아니니까 써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쭉정이도 대안 중에 하나다.”

국립국어원에 욕설에 대해 문의를 했다. 차별의 뜻을 담은, 불평등한 말들을 솎아 낼 수는 없을까?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확실한 답을 얻지 못했다.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차별적 언어에 대한 부분은 아직 전면적인 조사는 못 하고 있다. 따라서 그에 대한 국립국어원의 공식적인 계획이나 입장은 확정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다만 국립국어원은 지난 2006년부터 2009년에 걸쳐 ‘사회적 의사소통 연구’를 진행했다. 이 연구에서는 ‘장애인’, ‘성별’, ‘지역·인종·민족’ 관련 언어에 담긴 차별적 언어 표현을 조사하고, 그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무엇이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언어인지 학문적인 논의가 미진한 상황이라, 아직은 정부 차원에서 ‘차별적 언어’라고 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차별적 언어를 걸러내는 것부터 난관이다. 여기에 더해 혐오와 차별 없는 욕을 찾는 여정은 더욱 고생스럽다. 분노 등의 감정을 충분히 담아낼 수 있어야 하고, 짧게 내뱉을 수 있어야 한다. 문학박사이기도 한 서울과학기술대 신기상 명예교수가 1992년 발표한 <우리말 욕설 연구>를 보면, 욕설의 보다 상세한 특징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강음을 쓰면 어감이 강해져 높은 혐오도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앞서 소개한 김지원, 주영아, 허챠밍씨가 대안으로 삼은 표현(쑥 뿌리, 쓰레기, 쭉정이) 가운데서도 강음이 초성에 공통으로 들어간다.

클립아트코리아.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한들 ‘욕하기’를 권장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조건 참으라고 권장할 수도 없다. 욕의 효용을 따지면 더욱 그렇다. 건국대 하지현 신경정신과 교수는 “무조건 욕을 하지 말라는 주장에는 반대한다. 언어적 차원에서 욕을 하며 공격성과 분노를 표현하고, 거기에서 멈출 수 있다면 참기만 하는 것보다 정신 건강에는 도움이 된다. ‘욕하기’라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행동이 그 개인에게는 일종의 ‘환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물리적으로 공격성을 표출해 스스로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말로 하는 게 나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하 교수는 “욕하기는 ‘자신을 공격하는 것에 대한 또 다른 공격적인 방어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 위안의 행동인 셈이다. 그래서 ‘욕하기’ 자체를 잘못됐다고 봐서는 안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욕을 하면 신체적인 능력도 강화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영국 키엘대는 지난달 5일 리처드 스테판 박사가 영국심리학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소개했다. 81명을 대상으로 욕설이 신체 능력에 끼치는 영향을 파악하기 위한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 참가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에는 운동 전에 욕을 하도록 했고 다른 그룹은 조용히 해달라고 했다. 실험 참가자들의 힘을 측정했는데, 욕을 하도록 한 참가자들의 힘이 그렇지 않은 참가자들보다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리처드 스테판 박사는 그 원인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는 “우리는 욕설의 힘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을 남겼을 뿐이다.

전문가의 의견과 각종 실험 결과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스트레스나 분노를 무조건 참기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표출하는 게 일상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어디에다 욕을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면, 앱의 도움을 받아보자. 안드로이드 운영체제 기반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욕먹어도 싸다 스트레스 해소 질러버리자’라는 정직한 이름의 앱을 내려받으면 된다. 이 앱을 개발한 이태삭씨는 “아주 단순한 앱이라 앱을 내려받는 사람이 꾸준히 있을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요즘도 매일 10~30명이 이 앱을 다운로드한다”고 설명했다. 욕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적고, 말하기 버튼을 누른 뒤 욕을 실컷 하면 화면 속 캐릭터가 건조한 기계음으로 사과한다. 욕을 퍼부었는데 돌아오는 기계적인 사과에 웃음이 피식 난다. 욕 때문인지, 사과 때문인지 분노와 스트레스는 잠깐이지만 사라진다.

혹은 최근 ‘건강한 욕 문화’(?)를 지향하는 이들이 격하고 천박한 욕 대신 대안으로 내세우는 말들을 써도 좋다. ‘x발’의 변형 버전인 ‘쉬밤, 쉬댕, 슈밤, 신발, 수방’ 같은 거나 ‘멍멍이 짓’, ‘멍멍이’, ‘멍멍이 소리’ 같은 거 말이다. ‘쌍화차’나 ‘십장생’을 쓰는 이들도 있다. 쌍화차가 억울하려나!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남의 인격을 무시하는 모욕적인 말, 또는 남을 저주하는 말. 이명희 일우재단 전 이사장과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녹취 파일에 다량 포함돼 이른바 ‘대한항공 갑질 사태’를 촉발했다. 주로 분노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하며, 사용자 입장에서는 그로 인해 억압된 감정을 해소하는 효과도 있다. ‘ㅆ, ㄲ, ㅍ, ㅃ, ㅊ’ 등 거센소리가 많이 들어간다. 어원을 신체적 결함이나 질병, 특정계층 비방, 성적인 것에 두는 경우가 많고, 지나친 욕설은 대인관계를 망가뜨릴 수 있기에 주의를 요한다.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ESC : 커버스토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