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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4.26 08:57 수정 : 2018.04.26 10:08

한강 근처의 망원정 앞에 선 밤섬보전회 유덕문 회장 사진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ESC] 커버스토리

1968년 여의도 개발 목적 밤섬 폭파
62가구 443명 주민 와우산으로 이주
실향민 유덕문 기억하는 밤섬
"뱀장어 구워 먹고 수영해 등교"
1960년대엔 삼성 이병철 아들들 놀이터

한강 근처의 망원정 앞에 선 밤섬보전회 유덕문 회장 사진 윤동길 (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영화 <김씨 표류기>(2009)는 원효대교에서 뛰어내렸다가 무인도인 한강 밤섬에 표류하게 된 남자와 그를 망원경으로 지켜보는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픽션에 다시 ‘만약’을 더해본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8년 2월10일, 여의도 개발을 목적으로 밤섬이 폭파되지 않았다면 남자는 그곳에 쭉 살아온 밤섬 거주민을 만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만약의 일이다. 현실에는 1930년대 밤섬에서 태어나 살던 터전을 잃었고, 고향 섬에 퇴적물이 쌓여 다시 형체를 갖추고 철새도래지로 거듭나는 모습을 지켜봐온 밤섬 실향민들이 있다. 유덕문(79)씨도 그중 한 명이다. 지난 17일, 밤섬보존회 회장 유덕문씨를 만나 밤섬 사람 이야기를 들었다.

―전기와 수도가 없는 밤섬에선 한강 물을 마시고 살았다는데?

“우물이 있긴 했지만 형식적인 거였고. 한강 물이 훨씬 먹기가 좋았다. 모래톱에 구멍을 파두면 맑은 물이 고이는데 그걸 퍼서 물지게로 지고 왔다. 밤엔 코가 까맣게 될 정도로 그을음이 나는 호롱불을 켰다. 동생이 태어날 때 지금의 마포구 용강동 조산원에 따라갔다가 전깃불을 처음 봤다.”

―밤섬 장어구이가 유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주로 어떤 물고기를 잡았나?

“밤섬 사람이 뱀장어를 어떻게 잡았냐면, 우선 실에다 굵은 지렁이를 꿰었다. 그걸 둘둘 감아서 장대에 묶었다. 장어 이빨이 안쪽으로 말린 옥니라서 지렁이 뭉치를 물었다 하면 잇새에 실이 끼어서 걸려 올라왔다. 이걸 ‘뭉치질’이라고 했다. 장어구이와 술을 팔 정도의 집은 두세 집뿐이었고, 먹기는 주로 소금구이로 석쇠에 구워 먹었다. 장어는 장마 때만 잡고 한겨울에는 한강 얼음을 깨고 팔뚝만한 잉어를 잡았다. 비늘도 엄청 두꺼워서 그걸로 골무를 만들어 썼다. 헝겊 안에다가 말린 잉어 비늘을 앞뒤로 넣어서 손에다 끼우는 거다.”

―밤섬에서 학교는 어떻게 다녔나?

“서강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점심은 집에서 먹었다. 마침 배가 있으면 타고 건너가면 되는데 급하면 머리에 고무줄 바지를 쓰고 건너서 밥 먹고 다시 학교로 갔다. 밤섬 사람은 초등학생만 되어도 340m쯤 되는 한강을 헤엄쳐서 다녔다. 물에서 놀고 있으면 가끔 마포나 용산으로 오이, 채미(참외의 인천, 경기도 방언), 수박 이런 것들을 팔러 가는 배가 지나갔다. 그 사람들한테 “수박 주세요. 채미 주세요” 하면 하나씩 던져줬다. 그걸 건져서 모래톱에서 먹기도 했다. 영등포에 있는 중학교에 다닐 때에는 대방동, 신길동 쪽으로 오리를 키우는 샛강이 있어서 점심을 오리 알로 먹곤 했다.”

―‘마포팔경’으로 꼽을 정도로 밤섬 백사장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밤섬 백사장은 모래알이 굵고 깨끗하고 하다. 놀러 오는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마포로 돌아가는 배에 사람이 너무 많이 탔다가 사고로 죽은 일도 있었다(1956년 8월21일 밤섬에서 문총(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이 주최한 ‘문화인 카니발’을 마치고 마포로 돌아가던 중에 정원 이상이 모터보트에 승선했다가 십여 명이 물에 빠져 목숨을 잃은 사건). 놀러 온 사람들이 모래밭에서 앞으로 넘고 뒤로 넘고 텀블링을 하는 걸 구경하다가 나도 친구들이랑 텀블링을 많이 했는데 그 덕분인지 중학교에서 기계체조를 했다. 1964년 도쿄올림픽 대회에 후보 선수로 가자는 걸 입대 때문에 못 갔다.”

2008년 밤섬의 전경. 버드나무들이 민물가마우지들의 배설물로 인한 백화현상이 일어나 하얗게 변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밤섬 주민들은 주로 어떤 일을 했나?

“배 만드는 기술자들이 있고 어업을 하는 집도 있고. 밭농사하는 사람들은 땅콩이나, 파, 시금치를 기르기도 하고, 그 외에는 영등포나 마포 쪽으로 일을 나갔다. 조선 시대 말부터 밤섬에서 대대로 배를 짓던 이들이 우리였다. 지금은 하나도 없다. 그나마 남아 있던 이일용씨도 가지고 있던 연장을 서울시 박물관에 기증했다. 예전 창경궁 연못에 보트를 띄웠는데 그것도 밤섬에서 지은 거다.”

―1967년 당시 김현옥 서울시장이 주도한 여의도 개발계획 때문에 밤섬 주민들 이주가 시작되었다고 들었다.

“1960년대 초일 거다. 삼성 이병철 회장이 ‘밤섬을 나한테 팔아라’라고 했다고 하더라. 수상호텔을 짓겠다는 거였다. 아버님이 그 당시에 통장으로서 마을 회의를 했는데, 주민들이 여기서 나가면 어업은 어떻게 하고 배는 어디서 짓느냐고 억만금을 줘도 싫다고 해 무산됐다. 그 무렵 이병철씨 아들들이 모터보트를 타러 밤섬에 주말마다 왔다. 집 한 채를 주말에 쓰고 평일에는 개방했다. 자가발전기 냉장고도 있었는데 그 안에 있는 거 얼마든지 먹으라고 했다. 우리가 그 당시에 캔맥주 같은 걸 어디서 맛이나 보겠나!”

―밤섬이 폭파되기 전, 밤섬의 돌과 흙이 여의도 방죽 공사에 쓰인다는 걸 알았나?

“그건 1967년에 이주를 시작하면서 알았다. 그때 핑계를 어떻게 댔냐면 ‘장마가 지면 밤섬이 물 흐름에 걸림돌이 되어서 잘못하면 서울 시내로 물이 넘쳐 크게 사고가 나겠다. 한강 물 흐름을 좋게 하려고 밤섬을 폭파해야 된다’고 했다. 박정희, 김현옥 시장, 다 군 출신이니, 그때만 해도 한마디 찍소리 하면 날아갈 판인데, 어디 머리띠 두르고 ‘으으’를 할 수가 있었나. 밤섬 폭파하는 날, 나는 구로동 종점에 있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스물아홉 살 때다.”

―62가구 443명의 밤섬 주민들과 함께 와우산 중턱으로 이주를 했다고?

“그때 우리가 받은 게 밤섬 전체 토지보상 838만원, 건물보상 702만원 합쳐서 1540만원이었다. 그거로는 자재값도 안 되는 판이니 인력으로 지었지. 배 짓던 목수들이라 집 짓는 거는 다른 사람보다 빠르지. 나중에 근처에 지은 와우아파트가 무너졌을 때, 우리 동네 통장이 바로 가 수습하고 하다가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1970년 4월8일, 마포구 창전동 와우 시민아파트 15동이 준공 4개월 만에 붕괴해 33명이 숨지고 39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고가 있었다.) 나중에 달동네가 미관상으로 좋지 않다고 아파트로 재개발을 했다. 그때도 우리는 등기 비용도 없어서 보상을 제대로 못 받은 사람들도 있고, 또 입주권이 있어도 돈을 더 보태지 못하니까 밤섬 사람들은 90%가 입주권을 팔았지. 그렇게 또 흩어졌다.”

밤섬이 내다보이는 망원정 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흩어진 마을 사람들을 모으는 것은 밤섬 시절부터 수백년간 이어온 도당굿이다. 와우산 중턱으로 옮긴 부군당에서 매년 1월2일에 하는, 마을 사람들의 안녕과 복을 비는 행사는 서울시무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됐다. 밤섬 실향민들이 1년에 하루, 고향 섬에서 제사를 지내는 ‘밤섬 귀향제’를 지낼 수 있게 된 것도 밤섬이 폭파된 지 30년 만의 일이었다. 경제적으로 발전한 여의도와 운명이 갈린 밤섬을 보면서 아쉬운 마음이 없는지 물었더니 유씨는 댐 건설로 고향이 아예 물에 잠긴 실향민도 있다고 말을 이었다.

“영원히 물속에 가라앉아서 안 보이는 거보다는 퇴적물이 쌓여서 겉으로 육지같이 땅이라도 보이니까 그것이 조금의 위안은 된다. 밤섬이 새들이 찾아오는 세계적인 습지로 다시 태어났잖아. 그것도 없이 거기가 수몰되었다면 ‘이 근처가 우리 집이었고 누구네 집이었다’고 얘기나 하겠나. 그 땅을 밟아보니까 한편으론 밤섬 사람들, 거기 가서 살라고 하면 가서 살았을 거 같아. 거기서 살고 싶다.”

한강의 섬

밤섬을 비롯한 한강의 여러 섬이 자연재해와 개발로 운명이 바뀌었다. 서울의 지형과 한강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을축년(1925년) 대홍수 때 남대문 앞까지 넘친 물살이 서울 한복판을 물바다로 만들었다. 이때 한강 양쪽에 제방을 쌓기 위한 암석을 채취하느라 선유봉을 깎아내기 시작했다. 1940년대는 여의도 경비행장 건설을 위해 남은 모래와 자갈이 쓰였고, 이후 제2한강교 건설과 ‘한강 개발사업’으로 납작해진 선유봉은 지금의 선유도가 됐다. 이후 선유도는 정수장으로 쓰이며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되었다가 2002년 4월 선유도 시민공원의 형태로 돌아왔다. 저자도는 조선 시대에 기우제를 지내고 얼음을 채취하는 ‘벌빙’ 터였다. 저자도 역시 을축년 홍수로 이전의 아름다운 풍광을 잃었고, 1970년 초에 압구정 아파트 건설에 사용된 뒤 지금은 물속에 잠겨서 볼 수 없게 됐다. 1978년에 수도권 쓰레기 매립지로 지정되었던 난지도는 1993년까지 거대한 쓰레기산이었으나, 이후 생태공원으로 복원되어 선유도와 함께 돌아왔다.

참고문헌 <한강의 섬>, 서울시 한강사업본부 누리집의 ‘한강의 섬’ 편

한강 한강의 <흰>이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2016년에 <채식주의자>로 같은 부문을 수상한 이후, 한강의 작품이 다시 후보에 오른 것. 또한 한강은 한국의 중부를 가로지르는 큰 강의 이름이다. 사람 이름과 강의 이름, 두 고유명사가 같아서 한강을 통해 한강을 떠올리게 된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 성장과 개발의 역사가 역동적으로 흐르는 한강은 다양한 놀 거리가 있고 문화 행사가 이어지는 시민의 쉼터이기도 하다.

유선주 객원기자 oozwis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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