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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04 19:25 수정 : 2009.03.06 10:28

일제강점기부터 고래잡이해온 이승길씨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일제강점기부터 고래잡이해온 이승길씨
포경금지로 폐선된 배는 고래 박물관 전시

“옛날엔 밍크 같은 건 아예 안 잡았지. 장수경이는 많이 잡았고.” 장생포항 ‘최고 포장’으로 불리던 이승길(80·울산 남구 장생포동)씨 말이다. 포장이란 포경선에서 대포로 작살을 쏘아 고래를 잡는 ‘포수’의 존칭이다. 밍크는 중형인 밍크고래, 장수경은 대형 고래인 참고래를 이른다.

이씨는 장생포 현대 포경사의 산증인이다. 일제 때부터 포경선을 탄 몇 안 되는 인물이다. 그는 16살 때 ‘화장’(취사 담당)으로 포경선을 탄 이래, 1986년 포경 금지 때까지 40여년을 고래와 함께 살았다. 일제 때 일본 포경선들은 당시 장생포에서 구룡포로, 다시 강원 북부 장전항으로 이동하며 참고래를 잡았다. 척당 연 100마리 안팎을 잡아 제 나라로 가져갔다. 광복 직후엔 일본 포경선들이 떠나, 한동안 고래를 못 잡았다. 3년 뒤 일본에서 포경업에 종사하던 한국인들이 돌아오며 퇴직금 몫으로 50톤급 목선 두 척을 받아왔다. 이 두 척의 목선이 사실상 장생포 포경업의 출발이었다. “3년간 일 안 했더니 고래가 지천입디다.”

그는 가늠자도 없는 구경 70㎜ 포를 장착한 목선을 타고 주로 참고래를 잡았다. 29살 때 포수에 오른 이씨는 위치 선정에서 발사·포획까지 동물적인 감각을 발휘하며 ‘명포수’로 떠올라 선주들의 ‘스카우트’ 대상이 됐다. “다른 배들 큰놈 잡은 거 보모 작살이 다섯, 여섯 개 박힌 게 많아요. 난 주로 한 방에 눕히는 걸 마이 했지!” 30년 포장 생활에 두 차례나 ‘그해 최다 포획 포수’가 됐다.

“바다에 나가가 이래 지켜보모 사람 키 두세 배가 넘는 ‘분기’(고래가 숨 쉬며 내뿜는 물과 공기) 현상이 있는 기라. 그라모 엔진 소리를 줄이고 다가가 요래 있으모 떠올라요. 숨 쉴라꼬.” 이동 예상 지점으로 가서 5~10분 기다린 뒤 떠오르면 포를 조준해 작살을 쐈다고 한다.

밍크고래는 잡은 뒤 배에 끌어올려 해체작업을 했지만, 참고래는 꼬리 쪽을 배에 묶어 끌고 포구로 돌아와 해체작업을 했다. 참고래의 껍질·뼈로 기름을 짜면 40~50드럼이 나왔다고 한다.

70년대 들어 참고래 개체수는 급감했고, 마침내 참고래 포획이 금지됐다. 포경선들은 그동안 큰 관심이 없던 밍크고래잡이에 눈을 돌렸다. 이씨가 마지막으로 잡은 참고래는 “길이가 70자(약 21m)가 넘는 대물”이었다.

포경 금지 이후 그는 주변에 고래잡이 이야기 들려주는 걸 낙으로 삼고 산다. “누구는 우리를 고래백정이락 할지 몰라도 우린 그걸로 묵고살아야 했어요. 할 줄 아는 기 그거라.”

그가 타던 포경선 제5진양호는 1986년 이후 폐선으로 남았다가 뱃머리를 복원해 고래박물관 안에 전시하고 있다.


“인자 고래 관광 시작한다는데, 좋은 일이요. 돌고래 떼 보모 참 멋있을 기요.”

울산=글 이병학 기자·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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