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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1.05 19:07 수정 : 2008.11.08 14:24

밥상 혁명, 맘마미아!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밥상 혁명, 맘마미아!

한 달 전 기삿거리를 찾으려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단체 문자를 날렸습니다. “요새 먹을거리 관련해서 제일 궁금한 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서울에서 와플이 가장 맛있는 집은?’이나 ‘요새 20대들 사이에 가장 ‘핫한’ 맛집은?’ 같은 답문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답신은 암울했습니다. “원두커피에서도 발암물질 나왔다며! 빨리 취재해서 속속들이 알려줘라”, “중국산 식재료는 대체 얼마나 퍼져 있는지”, “(궁금한 게) 너무 많아. 농약으로 오염된 땅에서 자란 농산물 더 문제 ….” 여동생의 문자는 가장 세게 뒤통수를 쳤습니다. “원산지 표기에서 음식 성분까지 다 거짓말인 것 같아서 믿음이 안 가. 자포자기 심정으로 먹어.” 항상 힘없는 여동생의 표정은 남자친구가 없는 데서 온 ‘노처녀 병’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여동생의 슬픈 표정은 먹을거리에 대한 자포자기에서 오는 것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올 5~6월 거리를 뒤덮었던 촛불시위의 해일도, 정치에 무관심했던 10대와 아이를 가진 30대의 젊은 부모들이 쇠고기에 대한 불안감에 치켜든 작은 피켓에서 시작했습니다.

밥상 혁명, 맘마미아!
따라서 즐거움을 표방하는 〈esc〉가 이번에는 다소 진지하고 무거운 질문을 품은 채 이탈리아에서 열린 슬로푸드 국제대회에 찾아갔습니다. 슬로푸드 운동은 1986년 이탈리아 로마에 맥도널드 지점이 생긴 것에 반대해 이탈리아 언론인·운동가 등 62명이 들고일어난 데서 시작합니다. 이 운동은 22년이 지난 오늘 전세계에 회원 10만명의 모임으로 성장했습니다. 세계 9개 나라에 자체 사무실이 있습니다. 이 운동의 모토는 ‘좋고(good), 깨끗하며(clean), 공정한(fair) 음식’입니다.

슬로푸드는 우리나라에서 ‘유기농’이라는 단어 정도로 쓰입니다. 그러나 이 운동이 생긴 진짜 이유와 실천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요컨대 이들은 우리보다 20년 앞서 ‘좋고 안전한 먹거리는 무엇일까’ 등의 고민을 했습니다. 이들은 답을 찾았을까요? 이 운동의 창시자는 한국의 광우병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요? 유기농을 돈 있는 중산층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도 먹으면 안 되는 걸까요? 지난달 23일부터 27일까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슬로푸드 국제대회인 ‘살로네 델 구스토’와 ‘테라 마드레’ 행사를 취재했습니다. 이 운동의 창시자인 카를로 페트리니와 한국 언론으로는 처음으로 단독 인터뷰도 했습니다. 안전한 먹을거리, 답은 있을까요?

토리노=글·사진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취재협찬 풀무원


감각 체험 교육 참가자들이 미각, 후각 등 실습에 몰두하고 있다. 소음에 시달리는 귀처럼, 인공 식품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혀는 점점 미각을 잃는다.

잠자는 혀를 깨워라


맛경찰 고나무 기자의 테라 마드레 미각 체험기, ‘나 요리 기자 맞아?’

“생태적 감수성이 없는 미식가는 바보지만, 미식가적 감수성이 없는 생태주의자는 자기가 원하는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불쌍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미식학이 필요한 것이다.”

슬로푸드 운동의 주창자인 이탈리아 언론인 카를로 페트리니(국제슬로푸드협회 회장)는 <슬로푸드, 맛있는 혁명>(김종덕 옮김·이후)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 속의 저항운동은 항상 즐거움을 죄악시해 왔지만, 슬로푸드 철학 안에서 저항과 즐거움은 공존한다.

슬로푸드 운동의 시작은 미각 깨우기부터

맛을 아는 것은 슬로푸드 운동의 첫 한걸음이다. 미각·후각 등 감각적 경험은 개인을 형성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한다. 문제는 잘못된 세계화로 인공 식품이 맛을 가려내는 기능을 약화시킨다는 데 있다. 맛을 분별하는 능력이 약해지면 소비자는 초국적 식품기업이 만들어내는 인공적 입맛을 선택하는 ‘로봇 소비자’가 될 수밖에 없다. 테라 마드레의 부대행사로 감각 교육 과정인 ‘저니 투 디 오리진 오브 테이스트’(맛의 기원으로 가는 여행) 행사가 열린 이유다.

비디오 시청 → 감각체험 코스 → 맛보기로 구성된, 약 2시간 동안의 교육을 통해 감각을 구별하고 표현하는 법을 배운다. 왜 식품회사들이 가공 과정에서 사라진 냄새나 색을 인공색소·감미료로 되살리는지, 민트 시럽이나 레몬즙은 실제론 아무 색이 없는데 왜 민트 사탕은 녹색이고 레몬 사탕은 노란색인지 참가자들이 알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목표다. 24~26일 내내 열렸는데도 매번 젊은이들로 붐볐다. 기자도 25일 아침 10시부터 요리 기자의 자존심을 걸고 직접 뛰어들었다.

1. 시청각실을 나와 로비에 설치된 테이블에서 실습을 할 차례다. 본격 실습에 앞서 자신의 미각이 지닌 성향을 알아봤다. 작은 잔에 쓴맛이 나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맛을 보고 쓴맛을 느끼는 테이스터인지 못 느끼는 논테이스터인지 표시했다. 맛을 봤다. 쓴맛이 있었지만 그리 세지 않다. 자료집의 설명을 보니, 쓴맛에 둔감한 부류는 단 음식을 좋아하고 쓴 음식을 잘 먹는다. 샐러드에 드레싱을 많이 치고 매운 음식도 잘 먹는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인이 여기 속하지 않을까? 쓴맛에 민감한 사람은 브로콜리나 설탕 없는 커피, 맥주 등을 싫어하고 매운맛에 민감하다.

2. 첫 번째 실습은 기본 맛 구별하기다. 5개의 잔에 각각 설탕, 타르타르산(식용·공업용으로 사용되는 식물산), 소금, 글루탐산(단백질 가수분해 산물로 생기는 아미노산), 기나나무(남아메리카 안데스 지역이 원산지이며 껍질을 약품으로 쓰는 나무) 추출액을 녹인 물이 담겼다. 다음 잔을 맛보기 전에 물로 입을 헹구는 것은 맛보기의 필수다. 간장 등에서 느껴진다는 감칠맛(우마미)은 두 번째 시도에서 겨우 맞혔다.

3. 두 번째 실습은 서로 다른 입안의 느낌을 구별하는 것이다. 각각 박하(멘톨), 타닌(식물의 뿌리·껍질·잎 등에 들어 있는 떫은맛을 내는 물질. 레드와인의 떫은맛이 여기에서 나온다), 칠리 성분이 녹아 있는 물이 담긴 3개의 잔을 순서대로 맛봤다. 세 성분 모두 개성이 강해 쉽게 구별할 수 있었다.

살로네 델 구스토 행사에 등장한 유기농 육가공제품.
냄새가 맛을 결정한다

4. 냄새와 관련한 다섯 번째 실습은 만만찮았다. 6개의 작은 통에 담긴 향료를 구별해야 한다. 과연 바나나·커피·계피·마늘·양파·바닐라 향기가 구별될까? 소믈리에라도 된 것처럼 눈을 감고 코에 신경을 집중했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바나나와 바닐라 향을 혼동했다. 의외로 커피와 계피 향도 잘 구분되지 않았다. 연구에 따르면, 맛을 구별하는 데 냄새가 90%의 몫을 맡으며 미뢰(맛봉오리. 혀에서 맛을 감지하는 조직)는 단지 10%의 역할만 담당한다. 식품기업에서 가공 과정 중에 사라진 냄새를 인공 첨가물로 되살리는 이유다.

5. 열 번째 실습은 와인을 음료로 마시는 유럽인들에게 훨씬 쉬운 문제로 보였다. 두 잔에 공통적으로 타닌이 녹아 있고, 둘 중 하나에는 펙틴이 추가로 녹아 있다. 펙틴은 수용성 탄수화물인데 물에 녹으면 액체를 걸쭉하게 만든다. 와인의 맛을 구별하는 기본 요소인 타닌과 바디감(액체의 묵직한 정도)을 묻는 문항인 듯했다. 어느 잔에 타닌과 펙틴이 같이 녹아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해설을 보니, 타닌의 떫은맛이 덜한 잔에 펙틴이 녹아 있었다. 펙틴이 떫은맛을 감싸준다는 것이다.

6. 마지막 종합 실습을 하러 맛보기 방에 들어갔다. 세계 각지에서 온 30여명이 ㄷ자로 배치된 테이블에 앉아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자리에 앉자 진행요원이 초콜릿과 사과가 각각 세 조각씩 담긴 접시를 들고 왔다. 마지막 종합 실습은 사과와 초콜릿을 맛보고 종합적으로 표현하는 과제다.

골든 딜리셔스(미국 원산의 노란 사과 품종), 그래니 스미스(파란 사과의 일종. 생식·요리용), 그리지아 디 토리아나(피에몬테 지방의 전통 사과 품종) 등 서로 다른 품종의 사과 세 조각이다. 플라스틱 나이프와 포크로 사과를 조금씩 썰어 맛봤다. 산도·당도·즙·아삭거림·향의 세기 등 다섯 가지 지표를 기준으로 택했다. 어느 품종이 각 지표의 특징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지 고르는 게 과제다. 평소 먹어보지 못한 골든 딜리셔스와 그리지아 디 토리아나는 맛을 감별하기 어려웠다.

초콜릿 테이스팅이 이어졌다. 사과를 맛볼 때와 달리 쓴맛·당도·산도·점도·향의 세기 등이 지표다. 코코아 함량 50%의 다크 리터, 70%의 다크 린트와 다크 도모리 등 세 종류의 초콜릿을 나이프로 조금씩 썰어 먹었다. 사과와 마찬가지로 지표별로 가장 강한 맛을 내는 초콜릿을 고르는 것이 과제다.

다크 린트와 다크 도모리는 코코아 함량은 같지만 맛이 달랐다. 다크 린트는 신맛과 쓴맛이 더 강했고, 약간의 바닐라 향도 났다. 반면 다크 도모리에는 씹었을 때 점도를 높여주는 구실을 하는 버터가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아 초콜릿이 입안에 퍼지려면 더 오래 씹어야 했다. 냄새가 미각을 ‘속인다’는 사실도 체험했다. 다크 도모리에 사용된 코코아 품종은 달콤한 향을 더 많이 퍼뜨리기 때문에 다크 린트와 동일한 양의 설탕이 들어가 있음에도 더 달콤하게 느껴졌다.

맛을 표현하는 것도 쉬운 게 아니군

맛을 표현하는 말은 교육에서 중요하다. 감각에 대한 적절한 어휘는 미각적 체험을 이해하도록 돕는다. 맛 표현은 두 단계로 이뤄진다. 첫 단계는 개인적인 언어로 자유분방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와인을 맛본 뒤 만화 <신의 물방울> 대사처럼 “이 파워풀한 맛은 바그너의 곡 ‘발퀴레의 비행’을 지휘하는 주빈 메타(인도 출신의 세계적인 지휘자)의 왼손의 떨림을 떠올리게 하는군!”이라고 말해도 상관없다.

두 번째 단계는 주위 사람들과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맛에 대한 공통의 언어를 찾는 과정이다. 이 단계는 교육에서 근본적인 구실을 한다. 이를 통해서만 주관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음식의 질에 대해 객관적인 개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계에서는 암시적인 표현이나 “난 이 맛이 좋아/싫어” 따위의 주관적 표현을 사용하면 안 된다. 최대한 감각에 관련된 낱말을 사용해야 한다. 가령 그저 “냄새가 좋다/나쁘다”라고 하는 게 아니라 “과일향의, 훈향의, 사향 냄새가 나는, 발사믹(와인을 발효시켜 만든 식초) 향의, 견과류 냄새가 나는” 같은 수식어를 이용해 표현해야 한다.

두 시간의 교육을 마치고 나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체면을 구겼다. 각각 서너 문항으로 이뤄진 13개의 실습문제 가운데 작은 항목들까지 모두 맞힌 것은 4개에 불과했다. 벨로루시에서 온 민속음악 공연단이 휘모리 같은 업 템포의 민속음악을 연주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과연 요리기자 자격이 있는가’라는 생각뿐이었다. 현실의 레몬즙은 투명하지만, 사람들은 먹음직스런 노란 색소가 들어가야만 레몬 사탕을 먹는 것처럼 내 미각도 ‘로봇’이 된 걸까? ‘감각을 조종당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만 지킨다면, 2년 뒤 체험 땐 더 나은 점수를 받을 수 있으리라.

◎ 내 미각은 살아 있을까? 간단히 실험해 보세요

1. 사과주스와 파인애플주스를 담은 잔을 준비한다. 눈을 감고 코를 손으로 쥐어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한 뒤 각각 잔을 맛보고 이름을 맞힌다.

2. 시중에 파는 서너 가지의 초콜릿을 코코아 함량별로 사서 쓴맛·당도·산도·점도·향의 세기 등의 항목별로 맛을 평가한다.

토리노=글·사진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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