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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0.15 20:41 수정 : 2008.10.15 20:41

강원도 흥법사터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스러진 시간 앞에 서다

빛바래고 시든 것들, 떨어져 바람에 날리고 쌓인다. 쌓이고 뒹구는 게 나뭇잎만은 아니다. 무너지고 쓰러져 뒹구는 것들이 가을 하늘 아래 허다하다. 빈 들에 버려져 굴러다니는 것들 만나러 간다. 망한 옛 절터, 폐사지(廢寺址)들이다. 천년 세월을 잡풀 우거진 들판에 눕고 앉고 쓰러져 나뒹구는 보석들을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이다.

‘전 국토가 박물관’인 우리나라는 폐사지의 나라이기도 하다. 방방곡곡 3천여곳에 크고 작은 옛 절터가 흩어져 있다. 스러진 절터에 고인, 아득한 시간의 향기에 반한 이들은 이것을 ‘아름다운 폐허’라 부른다. 가을의 하루, 옛 절터를 찾는 일은 그래서 천년 세월 흥망성쇠의 허망함과 텅 빈 들판에 가득한 절절한 울림을 되새기며 위로받는 여정이 된다.

옛 절터가 보여주는 건 짓밟히고 깨지고 불타고 남은 것들, 버려져서 더욱 단단해진 것들이다. 단단해질 대로 단단해진 것들이, 다져질 대로 다져진 폐허 위에 널렸다. 놀라운 건 폐허 속에 살아남은 보석 같은 유적들이다. 집도 절도 없는 빈터에 국보·보물급 문화재들이 깔려 있다. 천년 세월을 견딘 석탑과 부처상, 비석들은 현란한 조각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섬세하고 또 투박하게 새긴 글씨들도 나그네의 눈을 거듭 새로 뜨게 한다. 폐사지는 불교 유적 이전에 이미 이 나라 역사·문화의 토양이다. 잡초에 묻힌 주춧돌, 발끝에 차이는 기왓조각 하나까지 모두 조상들의 손자취·발자취가 서렸다.

삼국시대 이래 우리 땅에 번창하던 절들은 화재나 자연쇠퇴로 사라진 곳이 적지 않지만, 수많은 사찰이 몽고 침입과 임진왜란을 거치며 소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복원된 절들도 다시 육이오 때 불탄 곳이 많다.

일부 중요 절터들에선 발굴 및 정비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대부분은 방치돼 있는 상황이다. 옛 절터 중 문화재나 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되는 곳은 100여곳뿐이다. 나머지는 집터로, 논밭으로, 야산으로, 잡목숲으로 남아 있다. 일부 절터의 발굴·정비 작업은 예산부족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옛 절터들의 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보호·보존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시민단체인 문화복지연대는 3년 전부터 ‘1폐사지 1지킴이’ 운동과 옛 절터 순례행사를 펼치고 있다. 절터를 찾아가 여는 ‘달오름 음악회’도 올해로 4회째 진행했다. 국회에선 폐사지 보존을 위한 법안 제정을 추진 중이다.

무너져내리고 바람에 쓸리기 쉬운 가을, 폐사지 여행길에 마음의 보석 하나씩 건져 오시길.

단, 폐사지의 보석도 아는 만큼 보이는 법. 잠깐이라도 공부하고 떠나면 훨씬 풍성한 시간여행을 즐길 수 있다.

글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캘리그라피 이현정(봄이와)


원주 거돈사터는 정비가 잘 돼 있는 대표적인 폐사지다. 앞에 보이는 것은 법당터의 불좌대.

고즈넉한 산속 숨은보물 찾기

여주에서 충주까지 남한강변을 따라 간 아름다운 폐사지 5곳

폐사지 기행의 대표적 코스로 꼽히는 곳이 여주~원주~충주로 이어지는 남한강변이다. 강변길을 따라가며 신라·고려를 거쳐 조선 초까지 번창하던 옛 절터 다섯 곳을 순례할 수 있다. 절터마다 고승들의 발자취가 뚜렷하다. 도로상 총 거리는 약 73㎞. 수도권에서 갈 경우 일찍 출발하면 하루에 다섯 곳을 모두 둘러볼 수 있다. 원주 법천사터와 거돈사터엔 문화유산해설사가 수·목·금요일에 상주하며 방문객들을 맞는다.

◎ 여주 고달사터(북내면 상교리)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을 지나 들어선 널찍한 절터. 마사토를 깔고 기단석 틈을 조정하는 등 정비작업이 한창이다. 올해 말까지 탐방로 조성 등 정비작업을 마무리할 예정이라고 한다.

혜목산 자락 ‘사방 30리가 절터’라는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때(764년) 창건돼 고려시대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크게 번창했던 절이다. 고려 초기 3대 선원 중 하나다. ‘고달’이란 석공이 이곳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석조물들을 완성한 뒤 출가해 고승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폐사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먼저 절터의 오른쪽 길을 따라 오르면 산 밑으로 높이 2.5m의 원종대사 혜진탑(보물 7호)이 모습을 드러낸다.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린 거북의 등에 네 마리의 용이 탑을 떠받치고 있는 부도다. 여기서 왼쪽 숲으로 뚫린 멋진 돌계단을 오르면 고달사 유적의 백미라는 고달사지 부도(국보 4호)를 만난다. 원감국사의 부도로 알려진다. 거북과 용·구름의 모습이 어우러진 중대석과, 사천왕상이 돌아가며 새겨진 몸돌의 조각이 섬세하고 화려하다. 지붕돌 밑에 돋을새김으로 조각된 비천상도 눈여겨볼 만하다.

숲길을 내려와 절터 중앙 쪽으로 내려서면 목이 잘린 거북상, 거북상·머릿돌이 남은 원종대사 혜진탑비(보물 6호), 우아한 석불대좌(보물 8호·불상을 놓았던 대)를 차례로 만난다. 혜진탑비의 몸체는 일제때 낙뢰로 쓰러져 깨진 것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관중이다. 법당터 앞쪽에 있던 쌍사자석등(보물 282호)도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지고, 기울어진 지대석만 남아 있다.

두 눈 부릅뜨고 절터를 지키고 있는 여주 고달사터의 원종대사 혜진탑비(보물 6호)의 거북상.

돌계단을 오르니 서있는 웅장한 조각상

◎ 원주 흥법사터(지정면 안창리)

고달사터에서 나와 좌회전해 88번 지방도를 따라 22㎞를 달리면 원주 땅 3대 폐사지의 하나로 꼽히는 흥법사에 이른다. 통일신라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절로,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진공대사가 고려 태조의 왕사로 신임을 받으며 크게 번창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본다.

민가와 인삼밭 앞 널찍한 축대 위에 비석 몸체가 없는 진공대사 부도탑비(보물 463호)와 수수한 멋을 간직한 삼층석탑(보물 464호)만이 남아 있다. 탑비를 세웠던 거북상과 지붕돌의 화려한 조각이 인상적이다. 몸체가 깨진 부도비 일부와 진공대사 부도탑은 국립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절터 대부분이 개인 소유로, 발굴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수수하고 소박한 자태의 원주 흥법사터 삼층석탑(보물 464호).

국내 부도탑의 최고 걸작, 지광국사 현묘탑

◎ 원주 법천사터(부론면 법천리)

흥법사에서 문막읍을 거쳐 49번 지방도를 타고 부론·귀래 쪽으로 22㎞쯤 가면, 진리가 샘처럼 솟는다는 뜻을 가진 법천사 터가 나온다. 법천리 서원마을 전체가 옛 절터다.

몸통이 빈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에 차를 두고 잠깐 산길을 오르면, 옛 부도각 터가 나타난다. 축대 위의 좁은 터에 세 채의 건물터가 있고, 그 사이에 국내 부도비 중 가장 아름답다는, 11세기의 고승 지광국사 부도탑비가 서 있다. 지광국사 현묘탑비(국보 59호)다. 거대한 몸체의 거북상과 점판암 비석, 지붕돌 모두가 섬세하고 화려한 조각으로 치장돼 들여다볼수록 눈부시다. 구름무늬 위에 놓인 거북의 머리는 용의 모습인데, 특이하게도 수염을 조각해 놓았다. 수염이 머리 무게를 지탱하는 형태다. 압권은 비석 몸체 양 옆면에 새겨진 용의 모습이다. 쌍룡이 여의주를 놓고 다투며 몸틀임을 하는 형상이 매우 아름답다. 비석 앞면 위쪽은 봉황무늬, 삼족오, 비천상, 해와 달의 형상들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비석의 일부는 세월의 무게로 깨지고 부서져 나가 고색창연한 맛을 더한다.

탑비 앞에 짝을 이뤄 세워졌던(1085년)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101호)은 국내 부도탑 중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오사카로 빼돌렸던 것을 반환받아 경복궁 경내에 보관하고 있다. 건물터 한쪽에 모아놓은 석탑 일부와 광배, 연꽃무늬 받침대 등 석물들은 화려했던 법천사의 옛 모습을 보여준다. 높이 3.9m의 법천사 당간지주는 마을 안쪽 창고 옆에 서 있다.

부도탑도 멋지고 석등도 우아하다. 충주 청룡사터의 보각국사 정혜원융탑(국보 197호).

◎ 원주 거돈사터(부론면 정산리)

발굴을 끝내고 잘 정비된 대표적인 옛 절터다. 법천사터에서 599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자작고개를 넘어가면 정산2리, 절터 들머리가 나온다. 법천사~거돈사 9㎞.

절터에 이르면 먼저 웅장한 석축과 수령 1천년을 헤아린다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나그네를 맞는다. 느티나무의 뿌리가 석축의 커다란 돌을 품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석축 사이 돌계단을 오르면 보물 750호인 삼층석탑이 차츰 모습을 드러내고, 이어 광활한 절터가 펼쳐진다.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후기 탑으로, 널찍한 사각 축대 위에 흙을 쌓고 그 위에 탑을 세운 점이 특이하다. 높아진 하늘 아래 잠자리들의 탑돌이가 한창인데, 탑 앞에는 연꽃무늬가 선명히 새겨진 배례석이 묵묵히 놓여 있다. 탑 뒤쪽 법당터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세워진 투박한 화강암 불좌대에선 옛 절터를 감싸고 흘러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절터 오른쪽 끝에는 고려 광종의 총애를 받은 고승 원공국사 부도비(원공국사 승묘탑비·보물 78호)가 서 있다. 탑비엔 최충이 짓고 김거웅이 썼다는 구양순체의 선명한 글씨가 아름답다. 절터 위쪽에 서 있던 원공국사 승묘탑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서울로 가져간 것을 회수해 1948년 경복궁에 뒀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보존하고 있다. 탑이 있던 자리엔 모조품을 세웠다. 절터 앞 정산분교터 운동장엔 길이 9.6m짜리 당간지주 한 짝이 쓰러진 채 잡초에 묻혀 있다.

폐사지의 석물들은 하나하나가 선조들의 삶의 자취가 깃든 것들이다.

첩 무덤 쓰려고 청룡사를 불태운 사연

◎ 충주 청룡사터(소태면 오량마을)

거돈사터~청룡사터 약 21㎞. 화장실이 딸린 주차장에 차를 대면 산기슭으로 난 울창한 숲길이 기다린다. 방치된 폐사지의 분위기가 제대로 다가오는, 어둠침침하고 적막한 산길이다. 위전비(조선 숙종 때 불자들의 기증 내용을 기록한 비석)를 지나면 항아리 모양의 부도인 적운당 부도가 있다. 옆길로 잠시 발걸음을 옮기면 여말 선초의 고승 보각국사 정혜원융탑비(보물 658호)와 사자석등(보물 656호), 보각국사 부도인 정혜원융탑(국보 197호)이 모습을 드러낸다. 부도의 팔각 몸돌엔 사천왕상을, 모서리 기둥 형상엔 용을 조각했다. 뒤쪽의 탑비는 비 몸체만 세워진 모습이다.

고려 말 작은 암자에서 출발해 조선 초 대찰로 성장했다는 청룡사의 폐사 이유가 놀랍다. 구한말 판서를 지낸 민씨가 명당으로 알려진 청룡사 자리에 첩의 무덤을 쓰려고 중을 시켜 불질러 폐사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여주 원주 충주/글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남한강 옛절터 여행쪽지

충주권은 청룡사터부터 시작하세요

남한강 옛절터 여행지도
◎ 남한강변 옛 절터 여행은 수도권에서 갈 때 여주 고달사터부터, 충주권에서는 목계나루 부근 청룡사터부터 시작하는 게 좋다. 수도권에선 영동고속도로의 여주나들목을 나가 37번 국도 따라 여주로 간 뒤 버스터미널 네거리에서 여주대교 쪽으로 우회전, 여주대교 건너자마자 북내 쪽으로 우회전한다. 345번 지방도 만나 좌회전해 주암리 쪽으로 직진해 올라간다. 외룡리 지나 내룡리에 왼쪽으로 빠지는 고달사지 가는 샛길이 나온다. 길 따라 가다 88번 지방도를 만나 다시 좌회전하면 곧 오른쪽으로 고달사지 팻말이 나온다.

◎ 여주 이포대교 앞 천서리에 막국수촌이 형성돼 있다. 많이 알려지기로는 강계봉진막국수(031-882-8300), 홍원막국수(031-883-1500), 천서리막국수집 등이다. 5년 전 생긴 시원막국수(031-883-3824)는 조미료를 쓰지 않고, 100% 메밀을 쓰며, 그것도 햇메밀만을 고집하는 집이다. 깔끔한 메밀맛을 내는 집이다. 원주 문막읍에선 대감집(033-734-5637)의 보리밥과 일승 김치찌개(033-734-5420)의 김치찌개가 유명하다. 충주 가금면 장천리 옛 목계교 건너의 목계솔밭나루터가든(043-855-6493)이나 강변횟집의 참마자조림·잡고기매운탕 등도 맛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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