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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17 18:44 수정 : 2008.09.19 16:28

데일리 프로젝트 벼룩시장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오랫동안 새것, 새 물건은 성장·발전·성취를 드러내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었다. 새 학년에 올라가면 서랍 안으로 퇴청한 몽당연필 대신 새 연필이 필통을 채웠고, 대학 합격이나 취직은 새 옷, 새 양복으로 칭찬받았고, 새집에 이사가면 새 가구와 새 가전제품이 묶여서 따라왔다. 미군에서 흘러나온 ‘구제품’으로 추위를 막고, 속옷까지 줄줄이 물려 입던 시절의 땟구정물 기억이 사람들로 하여금 새것, 새 물건에 열망과 집착을 키웠을 터이다.

벼룩시장, 우리에게는 구제시장이라는 말로 내려온 중고 물건 시장은 당연하게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대표적인 벼룩시장인 서울 청계천의 황학동 벼룩시장은 시간 많고 궁핍한 노인들의 놀이터처럼 인식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고개를 둘러보면 벼룩시장은 주변에서 다양한 형태로 생겨나고 있다. 그만큼 벼룩시장에 대한 인식이 바뀐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지금은 동대문 풍물벼룩시장으로 이름과 장소가 바뀐 황학동 벼룩시장이 중고 물건을 파는 상인들의 모임이었다면 최근 많은 이들의 발길이 닿는 벼룩시장은 대부분 일반인들이 자신이 쓰다가 필요가 없어진 물건을 직접 팔러 나온 진짜배기 벼룩시장들이다.

벼룩시장 하면 낡은 물건, 나이든 사람 같은 이미지도 바뀌고 있다. 배낭여행이나 유학 등에서 외국 벼룩시장 문화를 접한 사람들이 장사 반, 재미 반의 좌판을 열면서 벼룩시장은 젊고 유쾌한 놀이터로 변신 중이다. 재활용 운동에 앞장서온 아름다운 가게 등이 환경을 생각하는 소비를 강조하면서 이 뜻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인식변화도 벼룩시장의 문화를 젊게 바꿔가는 요인의 하나다.

배낭여행이나 유학 등에서 외국 벼룩시장 문화를 접한 사람들이 장사 반, 재미 반의 좌판을 열면서 벼룩시장은 젊고 유쾌한 놀이터로 변신 중이다.
쓰다 버린 물건, 낡은 물건이라는 고정관념을 떨칠 만한 옷가지나 장신구, 책과 장난감이 말간 얼굴로 새 주인의 손길을 기다린다.
전시물을 돋보이게 하는 조명도, 쇼핑의 편의를 돕는 에어컨이나 히터도 사용하지 않는 벼룩시장은 햇빛을 조명삼아 시원한 바람이 통하는 야외에서 열린다. 무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에는 방학을 한다. 햇빛이 따사롭고 바람은 시원한 요즘이 벼룩시장을 즐길 만한 최고의 계절이다. 주말에 데이트 어디서 할까, 가족 나들이 한번 할 때 됐는데 … 고민한다면 망설이지 말고 뚝섬이나 강남, 홍대 앞 벼룩시장에 들러보길 권한다. 구청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집 근처에서 여는 벼룩시장도 찾아볼 수 있다. 쓰다 버린 물건, 낡은 물건이라는 고정관념을 떨칠 만한 옷가지나 장신구, 책과 장난감이 말간 얼굴로 새 주인의 손길을 기다린다. 눈썰미가 있다면 대형 상점이나 전문매장에서도 구할 수 없었던 한정 모델의 제품을 구하는 행운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공연을 보거나 맥주를 마시며 포근한 가을 낮의 여유를 즐길 만한 벼룩시장도 많다. 싼값에 근사한 물건을 고르는 횡재를 바라지 않아도 그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유쾌한 장터다. 가을, 벼룩시장으로 소풍 가자!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뚝섬 아름다운 나눔장터


판매자만 1200명, 뚝섬의 스펙터클

서민형 장터에서 이벤트형 파티장까지 세곳의 벼룩시장이 보여주는 세 가지 색깔

벼룩시장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 낡고 분위기 있는 소품을 발견했던 황학동 벼룩시장? 고급 가죽점퍼를 말도 안 되게 싼 가격에 건졌던 배낭여행의 추억? 아직도 기억에만 머물고 있다면 지금도 시시각각 쏟아져 나오는 벼룩시장의 알토란 같은 물건들을 눈 뜨고 놓치는 꼴이다. 호들갑을 떨자면 ‘국민 벼룩시장’이라는 말을 붙일 만한 ‘뚝섬 아름다운 나눔장터’에서 젊고 세련된 판매자와 물건들이 모이는 데일리 프로젝트 벼룩시장, 시장이라기보다 흥겨운 파티 같은 이벤트형 벼룩시장까지 취향별·규모별 선택지도 다양하다. 9월의 첫 주말, 장터들을 둘러봤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팔기 위해 뚝섬 아름다운 나눔장터에 참가한 어린이.

매주 토요일 8천여명이 몰린다
◎ 뚝섬, 아름다운 나눔장터

9월6일 12시~. 뚝섬, 아름다운 나눔장터=입이 쩍 벌어진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모르는 사람은 드넓은 규모와 진기한 풍경에 도무지 어디다 눈의 초점을 맞춰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물론 이런 대규모의 벼룩시장이 새로운 건 아니다. 진기한 건 그 거대한 스펙터클을 채우는 사람들이다. 기존의 벼룩시장에서 만나던 중노년의 판매자들뿐 아니라 아이를 데려온 엄마와 엄마의 좌판 옆에 동화책과 장난감들로 자신의 돗자리를 채운 아이들, <멀홀랜드 드라이브> 같은 디브이디와 만화책들을 전시한 젊은 남자, 머리띠와 핀·인형을 파는 교복 입은 소녀들, 고급스러운 원피스 차림에 양산을 쓰고 공주처럼 앉아 손때 묻은 명품 가방을 파는 아가씨가 모두 이 장터의 장돌뱅이다.

2004년 뚝섬 유원지에 개장해 2006년부터 매주 토요일 열리는 이 장터는 600개가 넘는 자리가 늘 빼곡이 찬다. 판매에 참가하는 인원만 1200명을 넘고, 관람객도 평균 7천~8천명에 이른다. 온갖 사람들이 모이는 만큼 시장에 나오는 물건도 가짓수를 헤아릴 수 없다. 단 한 가지 없는 건 새 물건. 환경친화적인 재활용이 장터의 취지인 만큼 참가신청을 할 때 짐을 검사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안경 낀 아저씨의 옆구리로 이미 들어간 <멀홀랜드 드라이브> 디브이디를 애석해하며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보라색 돌이 반짝이는 목걸이를 발견했다. “얼마예요?” “올여름에 사서 한 번도 안 쓴 건데 2000원 주세요.” 안 썼는지 썼는지는 믿거나 말거나라고 해도 이 정도 물건을 2000원에 사는 건 거저다. “이 귀걸이는요?” “500원 주세요.” 이쯤 되면 이성을 잃은 광란의 쇼핑질주가 시작될 만한다. 나눔장터의 물건들은 이처럼 대체로 놀랄 만큼 싸다. 주최측에서 가격 가이드라인을 주지는 않지만 판매수익보다는 나에게 필요 없는 물건을 필요한 사람에게 합리적으로 처분한다는 시장의 목적을 판매자들이 실천한다.

비싼 브랜드의 청치마가 눈에 띄었다. 빨면 지워질 것 같지만 옅은 얼룩이 있다는 이유로 3000원 부르던 걸 2000원에 깎았다. 빙고! 그 옆 좌판의 초등학생 아이는 연필로 수첩에 무언가 부지런히 적는다. 오늘의 매상을 기록하는 듯. 이런 어린이 장돌뱅이는 아름다운 나눔장터가 가장 좋아하는 판매자이기도 하다. “나이가 든 사람은 자기 스타일이 굳어 재활용 습관을 갖기 어렵지만 어린이들에게는 스며들 공간이 많기 때문에 어린 참가자를 적극적으로 유도하는 게 장터의 큰 방향”이라는 게 아름다운 나눔장터를 진행하는 박설경 간사의 말이다. 아닌 게 아니라 둘째 주와 넷째 주 ‘놀토’에는 어린 참가자들이 부쩍 늘어난다. 8월 넷째 주 행사가 끝날 무렵 이곳에 왔을 때 “머리핀 두 개와 인형 합해 오백원~!”을 외치던 교복 입은 소녀와 “동화책 세 권에 천원~ 떨이 떨이~”를 외치던 통통한 남자 꼬마가 생각났다. 그 모습이 귀여워 작은 곰인형을 사고야 말았다.

미우미우, 크리스찬디오르같은 명품구두를 만원짜리 한장에 챙길 수 있었던 〈블링〉의 벼룩시장.〈블링〉제공

젊고 세련된 물품을 원한다면…
◎ 이태원, <블링> 벼룩시장

9월6일 3시~, 이태원, 클럽 잡지 <블링> 벼룩시장=용산구 이태원하고도 마을버스를 타고 동빙고동 주택가로 꼬불꼬불 찾아 들어간 <블링>의 벼룩시장. <블링>의 벼룩시장은 말 그대로 아는 사람만 아는 벼룩시장이다. 주택가에 숨어 있는 <블링> 사무실을 찾기도 어렵거니와 이제 세번째로 열린 행사이기 때문에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탓이다.

널찍한 사무실 앞마당. 열 개 정도의 좌판이 펼쳐졌다. 좌판에 앉은 사람들의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잘나가는 패션지의 스트리트 화보에 찍힐 정도의 세련된 분위기다. 홍대나 강남의 클럽 문화를 다루는 무가지 <블링>의 분위기와도 어울려 보이고 실제로 <블링> 편집진이 초청한 주인장들로 사진가, 영화감독, 디자이너, 클럽 디제이 같은 아티스트들이다. 파는 옷이나 소품들도 젊고 세련된 물품들이 많다. 나로서는 마음은 굴뚝같지만 체형이 못 받쳐 줘 여러 제품을 만지작거리다가 번번이 포기하기를 반복.

젊은 분위기는 비단 참가자와 물건들만이 아니다. 잡지의 성격답게 디제이들이 후원 형식으로 참여해 턴테이블에서는 흥겨운 음악이 부드럽게 깔리고 저쪽 앞에서는 바비큐 그릴에서 소시지가 좋은 냄새를 흘리며 구워지고 있다. 그리고 시원한 맥주. 과하게 부끄러움을 타는 사람이 아니라면 꼭 물건을 사지 않아도 앞에 탁 트인 한강을 보면서 맥주 한잔, 소시지 한 개만 싸게 먹어도 남는 장사인 흥겨운 곳이다. 굳이 벼룩시장이라고 이름 붙이기보다는 한낮의 가벼운 파티라고 불러도 손색없다.

두 달에 한 차례씩 벼룩시장을 여는 <블링>의 이주영 편집장은 “잡지의 정체성을 살린 파티나 재밌는 이벤트를 해보자고 생각하다가 벼룩시장을 기획하게 됐다”며 “물건을 사고팔면서 이야기를 하니까 파티보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말을 트고 파티라는 말이 주는 어색함이나 낯선 분위기가 사라진다”고 말했다. <블링>처럼 뜻이나 취향이 맞거나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여는 작은 벼룩시장은 요즘 유행이라고 할 만큼 늘어나고 있다. 상수역 앞 젊은 미술작가들의 작업실 앞에서 매월 둘째 주 토요일 여는 ‘세컨드 새터데이’도 그런 벼룩시장의 하나. 이 벼룩시장을 기획한 일러스트레이터 박진영씨도 이주영 편집장과 마찬가지로 “돈을 벌어가는 시장이 아니라 물물교환을 하면서 같이 즐겁게 놀아보자는” 생각으로 지난 6월 처음 시장을 열었다.

<블링> 벼룩시장에서 망설이다가 단편영화를 만드는 이사강 감독에게 무려 10센티미터짜리 하이힐을 샀다. 질 좋은 가죽에다 예쁜 디자인과 1만원이라는 싼 가격에 지르고 말았는데 이 구두를 신을 일이 언제나 있을까, 쩝.

세련된 옷과 소품들을 발견할 수 있는 데일리 프로젝트 벼룩시장.

활기찬 강남의 일요일을 만끽
◎ 청담동, 데일리 프로젝트 벼룩시장

9월7일 1시~. 청담동, 데일리 프로젝트 벼룩시장=청담동에 벼룩시장이라니, 어쩐지 삼합에 막걸리를 먹는 캐리 브래드쇼만큼이나 어색해 보이지만 실상 데일리 프로젝트는 벼룩시장을 낡은 구제시장에서 젊은이들의 트렌디한 문화로 변화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한 곳이다. 지난해 7월 서울 강남구 청담동 복합매장인 데일리 프로젝트의 테라스에서 처음 열린 벼룩시장은 이제 한가하면서도 활기찬 강남의 일요일을 대변하는 곳이 됐다.

나오는 물건들도 꽤나 비싸지 않을까 지레 겁먹기 쉽지만 제품도, 전시 방식도,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외국물’임을 강조하며 도도하게 전시된 7만~8만원짜리 원피스가 있는가 하면 “사놓고 장롱에만 처박아 놓았던 옷들을 처분하기 위해 나왔는데 이름 나오면 사람들이 된장녀로 오해할 거 같아 이름은 밝힐 수 없다”는 젊은 여성은 수십 벌의 옷을 그야말로 도떼기시장처럼 쌓아놓고, 3000원, 4000원을 부른다. 외국 잡지 몇 권을 바닥에 깔아놓고 판매보다 독서에 몰두하는 남성이 있는가 하면, 장사는 아랑곳없이 맥주와 담배를 즐기며 여유로운 한때를 지내는 외국인과 한국인 판매자가 있다.

매장 들머리 쪽, 설치미술가 이지양(29)씨의 좌판은 안 입는 옷가지에서 직접 만든 가방과 컵받침, 바비와 켄 인형, 조그만 화장품 등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쏠쏠하다. “런던에서 공부할 때 브릭레인이나 캠든마켓 같은 벼룩시장에 자주 다녔다”는 이씨에게 한국과 외국의 벼룩시장이 어떻게 다른지 물었더니 “성격이 아예 다른 것 같은데 한 예로 외국에서는 저런 걸 어떻게 다시 쓸까 싶은 물건도 시장에 많이 나오는 반면, 한국에서는 새것과 다름없는 물건들이 많은 것 같다”고 말한다. 외국의 오래된 벼룩시장 구경을 통해 젊은이들 사이에 중고 물건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지만 아직 바뀌지 않는 어떤 마지노선 같은 게 사람들의 머릿속에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처음 들어왔을 때 찍어뒀던 보라색 남자셔츠를 사러 갔더니 그새 팔렸다. 무한한 인내와 관찰력을 갖고 보석을 찾는 곳이 벼룩시장이지만, 또 좋은 물건을 발견했을 때 잽싸게 낚아채지 않으면 다른 이의 몫으로 돌아간다는 깨달음을 얻은 하루였다.

글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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