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8.08.13 17:53 수정 : 2008.08.16 11:04

난 수피아 칠공주의‘가방모찌’였다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씨네21>과 함께하는 불량추억 공모전 수상작 2등 공선옥


광주서 자취할 때 이야기다. 때는 1980년 여름. 광주의 고등학교들은 그해 여름방학을 하지 못했다. 지난 5월, 학교는 문을 닫았다. 우리는 방학을 반납하고서 5월에 하지 못한 공부를 해야 했다.

집이 시골인 나는 방학 때 집에 가서 콩밭도 매야 하고 고구마밭도 매야 했지만 학교에 나가야 하니 집에도 내려갈 수 없었다. 날은 더웠다. 아이들도 선생님들도 교실 창밖에서 요란하게 울어대는 매미소리에 잠시 잠시 정신을 빼앗기곤 하는 그런 여름날이었다.

수피아-조대부고 껄렁패를 막아선 벌교패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올 무렵이면 나는 왠지 모르게 쓸쓸해졌다. 어차피 선풍기도 없는 자취방에 가봤자 할 일도 없고 덥기만 할 것이었다. 석양녘, 내 발걸음은 나도 모르게 학교에서 가까운 광주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시대적 상황에서 오는 답답함이 있었지만 또 사춘기적 달착지근한 슬픔도 아주 없지는 않아서 당시 나는 어디론가 하염없이 떠나는 꿈을 꾸곤 했다. 그럴 때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답답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어서 역으로 나갔다.

역에서 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을 부러운 눈으로 그냥 바라보는 것이다. 나도 그들처럼 어디 먼 데로, 서울로 떠나고 싶었다. 이 답답한 도시 광주를 하루라도 빨리 떠나고 싶었다. 그렇게 역 대합실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어깨를 툭 쳤다. 뒤돌아보니 자주색의 교복을 입은 수피아 여고생이었다. 머리를 양갈래로 땄다.


“야, 사대부고!”

척 보자마자 반말이다.

“너, 어디 가고 잡지? 우리 따라 벌교 갈래?”

마침 그 다음날이 일요일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차비도 없는디.”

“차비는 우리가 낼 텡게 너는 우리 가방이나 맡아도라.”

나는 네다섯 명이나 되는 수피아 여고 일행의 가방을 도맡아 그애들을 따라 벌교행 기차를 탔다. 뜬금없는 여행이었다. 그렇게 기차를 타고 난생처음 벌교를 갔다. 벌교에 갔더니 왠지 껄렁껄렁해 뵈는 남학생 한 패가 다가왔다. 모자는 하나같이 쓰지 않았거나, 삐뚜름이 쓰고 바지는 배꼽바지에 가방은 손에 들지 않고 옆구리에 꿰찼다. 그애들도 학교에서 바로 벌교로 온 모양이다. 교복을 보니 바로 조(선)대부고생들이다. 아, 말로만 듣던 수피아와 조대부고의 껄렁패들이 오늘 벌교에 다 모였는갑다. 나는 그제야, 그들의 정체를 조금 눈치채고 있었다.

광주에서 온 가시내들과 머시매들은 곧 한패가 되어 벌교 읍내를 가로질러 한창 서커스 공연을 하고 있는 가설극장 앞에서 멈추었다. 벌교의 여름밤은 그야말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그때 유명하기로 치자면 수피아- 조대부고 패에 비교가 안 되는 벌교패들이 쓰윽 앞을 막아섰다.

“어디서 온 조무래기들이냐?”

삐뚜름한 모자가 척 앞으로 나갔다.

“광주서 왔는디?”

“앗따 겁나게 큰물에서 와부렀다잉.”

“벌교보담은 쪼깨 크제.”

“그려, 그타치고, 벌교는 뭔 일이여?”

“여그서 굿헌다는 소식이 광주까정 들리더라고.”

“벌교굿이 광주굿만 허겄어? 보다시피 여그는 벨로 먹잘 것이 없어. 그렁게 기양 조용히 션헌 물이나 한 바가지씩 처묵고 싸게 꺼지더라고잉.”

“우리한테 물멕일라고 그러요 시방?”

“하먼.”

우세스러워 차마 쓸 수 없는 이야기

그리고 그 다음에 벌어진 사태를, 그해 여름 벌교에서 일어난 일을, 나는 여기에 쓸 수도 없을뿐더러 우세스러워 어디다 대고 말도 못 할 일이다. 하여간 이차저차 이러구러 해서 광주패, 벌교패들 전부는 벌교경찰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한참 동안 머시매들을 조사하던 경찰이 여고생들을 향해 물었다.

“어이, 근디 요 가시내들은 다 뭐라요?”

건너편 경찰이 답했다.

“수피아 칠공주랑만.”

“수피아 칠공주는 옷이 똑같애서 알겄는디, 어이 거그 가방 보듬고 있는 너는 뭣이냐?”

수피아 칠공주 중의 누군가가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 가방모찌야라우.”

아, 나는 그해 여름 벌교에서 수피아 칠공주의 ‘가방모찌’였던 것이었던 것이다.

그해 여름의 벌교사건 이후로 나는 아무리 답답해도 아무리 슬퍼도 역에 가서 답답함을 달래지는 않는다. 슬픔이 몰려와도 화장실에 가서 달랬으면 달랬지 역이나 터미널 같은 데로는 가지 않는다.

공선옥/강원 춘천시 칠전동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ESC : 커버스토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